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월간 문학 10월호

원평재 2010. 10. 27. 23:04

 

 

 

<월간 문학>은 한국 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문예지입니다.

10월이 가기전에 금년 10월호에 실린 졸작 단편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영상시대"입니다. 

 

 

사외이사로 있는 영화사 '청담 영상(주)'에서 연락이 온 것은 현충일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현충일과 주말을 묶어서 베트남 북부, 하노이와 하롱베이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작자이자

대표이사인 박 사장으로 부터의 갑작스런 전갈이었다.

"박 사장, 너무 갑작스럽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가, 벌써 십여 년 전 '인도차이나'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월남이나

하롱베이를 배경으로 영화 한편 하자고 이 교수가 먼저 말했었잖아요."

"아 그거야 ‘라이 따이한’, 즉 월남에 남은 우리 핏줄에 관한 내용들이 매스컴 탈 때 이래저래

묶어서 한 건 하자는 거였지---. 시사적인 것과 예술성을 묶어서 한편 내 놓으면 영화상

하나쯤 거머쥘 수도 있잖겠느냐---하는 당시의 전략이자 꿈이었지요."

"이 교수! 라이 따이한 전략은 맛이 갔잖아요. 우리가 지난번 잠실 롯데 민속관에서 그 쪽

 대사관 사람들하고 저녁을 하며 운을 떼었더니 절대로 그런 영화 만들어서 양국 관계 입장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 사람들이 말했잖소. 자기들은 거 뭐라더라, 그래 도이모이---,

쇄신인가 개방, 개혁인가 하는 정책으로 ‘과거를 묻지마세요’라는 것 아니었던가?!

경제만 챙긴다, 투자만 해다오---. 그런 국가적 목표를 갖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건 그랬지. 지금 우리나라의 NGO에서 고엽제니, 라이 따이한이니, 떠드니까 양국의

 선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했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문제성 있는 영화는 못

찍겠구나 하고 결론이 났잖아요."

"그래서 절충안으로 남부 베트남의 호치민시, 그러니까 문제 많고 라이 따이한 많은 사이공은

버리고, 북부 하노이 하롱베이를 택하여 조용히 한건 하자는 거 아니요. 예컨대 하노이에 어떤

라이 따이한 처녀가 있더라, 그녀가 풍광 아름다운 하롱베이나 하노이에서 인터걸을 하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이 교수 같은 중년이 베트남에서의 고전 한문 문화 관계를 연구하려고 왔다가

로맨스그레이에 빠진다---. 이렇게 방향을 선회하자는 것이지."

"에끼, 사람 잡겠네, 아니 교수 잡겠네! 하하하. 어쨌든 그런 뜻이라면 한번 접근은 해 볼만 한

프로젝트 갔구려."

이렇게 하여서 갑자기 나와 박 사장, 기획실 책임자인 정 실장, 이렇게 세 사람의

하노이-하롱베이 여행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루어졌던 것이다.

갑자기 이루어진 여행이었으므로 우리는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에 슬쩍 끼이기로 했다.

아직 기획이 덜된 상태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을 그냥 헤매기 보다는 단체 여행에 일단

합류하여 현장 답사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침 정년퇴임을 한 점잖은 다섯 쌍의 교사부부들이 떠나는 여행사의 그룹 투어에 우리 셋은

마지막 일행이 될 수 있었다.

일정은 닷새였으나 밤에 떠나서 새벽에 돌아오는 여정은 말하자면 5박 3일의 관광 코스였는데,

가볍게 필드서베이 하는 셈인 우리로서는 크게 부족할 일이 없었고, 정년퇴임한 분들도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닌 그 방면의 베테랑들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여정이었다.

 

도착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한 하노이 관광은 저 유명한 아침 자전거 출근 무리들과 함께 출발한

셈이었는데, 한 십여 년 전의 베이징의 아침 풍경을 보는 듯하였다.

아니 자전거 부대가 그렇다는 것이고 담벼락에 거울 걸어놓고 이발해주는 모습이나 가난한

노점상들의 모습은 그 보다도 더 이전의 모습,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동란에서 막 회복되던

60년대의 모습이랄까---,

그러나 관광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1년 4모작의 쌀농사를 비롯하여 충분한 식량과 지하자원,

붕타우 해변의 석유등으로 미루어 이들이 우리보다 못한 점은 '현재 가난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가슴 서늘한 소리였다.

더우기 이들은 심성이 좋아서 아직은 모든 사람들이 파업이나 데모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고

매우 상냥하고 우호적이란다.

그렇다면 프랑스나 미군을 상대로 싸우던 저 월맹의 용맹은 베트남을 적으로 삼은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고도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제갈량도 칠종칠금 했다는 이 유서 깊은 대월지(大越支) 남만(南蠻) 족의 고도의

국가발전 전략인가---.

관광객으로서의 입장은 다소 착잡하였다.

 

사이공에서 벌였던 사업이 세계경제의 불황 때문에 곤경에 빠져서 하노이로 올라와 관광

가이드를 시작했다는 마음씨 좋은 모습의 우리 동포는, 그러나 하노이가 한자로 무엇이냐는

함께한 한문 선생님의 질문에도 대답을 못하는 등, 전문적 분야에 대한 신뢰는 주지 못하였다.

교수라는 신분을 밝히고는 있지 않았지만 나도 뜨끔하여 호텔의 자료를 슬쩍 보니 하노이는

‘河內’라는 한자어의 현지 음이었다.

하노이 시내 관광은 하롱베이를 먼저 다녀오고 그 다음 이틀간이었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고속도로로 180킬로미터였는데 시간은 세 시간이 넘었다.

이유는 고속도로 자체가 우리의 국도보다도 포장이나 폭이 훨씬 못한 수준이었고,

운영체계도 통과하는 동네의 차량에 편리를 제공하는 방식이어서 '고속'이라는 개념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긴 고속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잖은가.

이 평화롭게 논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외국에서 온 뻐기는 사람들의 고속 행렬은 무슨

소용이 닿으랴.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모두 낡았는데 좀 괜찮은 차에는 어김없이 우리말이 붙어

있었다. "은혜 유치원" "삼성 기업" "경희 의료원" "건국 우유", 심지어 "웨타 김삿갓"도

붙어있었다.

모두 한국 차를 자랑하는 소유자들의 심사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한글 페인팅이 벗겨지면 다시 꼭 같이 그려 넣는다고 했다.

약간 우쭐한 기분과 사장 앞에서의 업무 추진 의욕도 겹쳐서 기획실장이 아침부터

가이드에게 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가이드 선생, 여기 호텔에서 인터걸을 살려면 하룻밤에 얼마요?"

가이드가 뒤쪽에 앉은 노부부들을 힐끗 처다 보더니 "여기는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

아가씨들은 없습니다."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성급한 김 실장이 일을 그르치네---.

영화판의 이름난 제작자 박 아무개라고 하면 얼굴은 몰라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름으로

다 알고 있을 것이고, 나는 또 뭔가.

영상 관련의 일을 한다는 것이야 알려져도 그럭저럭 넘어가련만 혹시라도 대학 교수라는

입장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살인가.

영상 학 전공교수가 영화 제작의 사전답사를 왔다고 아무리 변명한들 말이 통할까.

딴따라 전공이라 역시나이구나, 그런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김 실장이 돈으로 인터걸을 살려고 했던 것은 한두 명을 객실로 불러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전반적인 필드서베이를 해보자는 목적이 태반이었으리라. 아니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따로 또 있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었지만 하여간 일행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으니 일이 우습게 꼬였다.

사실 관광 가이드도 서울 본사를 의식해야하고 베트남 정부의 방침도 있을 터인즉

서뿌른 뚜장이 노릇을 할 일이 결코 아니렷다.

무슨 팔자 고치는 일을 도모하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런 방면으로 심도 있게 취재를 해가야 할 우리들의 입장은 처음부터 좀

난감하게 된 셈이었다.

 

 

하롱베이는 "下龍 bay"의 현지 음이었는데 동지나해 상에 기암괴석으로 된 약 3000개의

섬이 해금강을 이룬 모습으로 유네스코에도 인류 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이 되어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다지만, 7대 불가사의야

여행지마다 붙는 수식어라서 처음에는 과장법으로만 들어주었는데 차츰 현장으로

진입하면서 부터는 3대 불가사의에라도 넣어주고 싶은 장관이 속속 전개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하롱베이의 저 기이하고도 황홀한 모습은 실제 현장

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10여 년 전의 그 황홀한 감격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있었다.

삼일간이라는 바쁜 관광 일정 때문에 반나절 동안만 배를 한척 전세 내어 섬과 섬 사이를

누비며 펼쳐진 장관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어떤 석회암 동굴이 있는 섬은 내려서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쉬움 속에 돌아오는 뱃길의 갑판에서는 따라온 작은 어선과의 선상 거래로

잔뜩 산 다금바리와 상어를 현장에서 회로 쳐서 함께한 일행과 베트남 소주로 취토록

마셨다.

 

이날 저녁 무렵, 바다를 내려다보는 관광호텔로 돌아 들어오다 보니 베트남 여자 특유의

짤록 한 허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까만 머리칼의 여자들이 수상한 복장을 하고서 메인

로비를 서성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프런트 인근에는 영화, ‘인도차이나’에 나왔던 ‘까뜰린느 드뇌브’ 같은 서양 풍모에

분명 관광객은 아닌듯한 인상을 주는 여자도 서성거렸다.

그러나 관광 가이드는 그들 모두가 인터걸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는 도무지 협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명함을 내밀고 영상, 영화 관계를 아무리 설명하여도 가이드는 함께 온 교사 출신의

일행을 의식하는 듯, 또 이곳에서의 활동에도 위험을 안고 있는 듯, 조금도 허점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애초 김 실장의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자체 분석을 하고 하롱베이를

배경으로 하는 시나리오는 날 밤 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아름다운 하롱베이를 내려다보며 한국인 아버지를 닮아서 키 큰 라이 따이한이 인터걸이

되어있는데, 하노이에 잠시 들린 한국의 교수, 혹은 사업가와 로맨스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잠도 같이 자게 되지만 결국 베트남 사직당국으로 부터 적발되어서 곤욕을 치루고

서울에서는 라이 따이한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면서 광화문 앞에서는 과거를

국가차원에서 반성하라는 시위대도 생기고---.

교수 혹은 국책 사업가는 추방형식으로 귀국 비행기를 타는데 라이 따이한 처녀는 저

아름다운 하롱베이의 비취색 물속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

 

내용은 비록 삼류를 간신히 벗어날지 모르겠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서 저 아름다운 광경들을

집어넣으면 이 얼마나 멋진 한편의 서정시인가 하면서,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영상영화사의

사장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김 실장! 지금 이 시점에서 시나리오와 필드 워크가 끝나야 그나마 연말 개봉관에

가까스로 올릴 것 아닌가! 그런데 다 틀렸어!"

그의 꾸지람은 포효였고 김 실장은 연신 목을 한쪽 손으로 만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에이, 그건 박 사장께서 무리하신 거요. 관광객들 따라와서 당장 영화 제작 ‘크랭크 인’

이라니 샘가에서 숭늉 찾기지---. 기획에서 시나리오 완성까지 만도 빨라야 3개월, 제대로

하려면 6개월 아니오. 정히 급하면 귀국 하자마자 태스크 포스 만들어서 다시 구상하여

또 와요. 무슨 독촉이 이런 식이오."

"시나리오도 쓰고 기본 액션도 다 마련해 주실 이 교수가 학기 중에라도 이곳에 와서 진을

치고 일을 해주신다면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여름방학 때까지는 못 오시는 게

뻔한데 일이 추진되겠어요? 쯧쯧---."

바닷물에 자신의 몸과 애간장을 녹여내면서 수 만 년 간 자기 파괴적 몸단장을 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가다듬은 하롱베이는, 박 사장의 무리한 탄식으로 인하여 급기야

돌덩어리, 즉 석회암 덩어리로 본색을 드러내고서 김 실장과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보시게, 안단테 안단테 좀 느리게로 템포 조절하여 천천히 합시다. 난 그런 독촉

속에서는 일 못해요. 그리고 제대로 하려고 했으면 애초에 마케팅 실장도 데려오고

제작부에서도 한 두 사람 왔어야지! 갑자기 이게 뭡니까?"

내가 마침내 좀 심하게 박 사장에게 반발했고 그도 따지고 보면 누굴 탓할 입장도

아니어서 우리는 룸의 미니바를 뒤져서 애꿎은 양주만 작은 걸로 몇 병 비우고 야간

관광놀이도 집어치운채 잠자리에 들었다.

하긴 하롱베이의 밤은 따로 문화의 꽃을 피울 형편이 아직 되지 않은 듯, 칠흑 같은

밤이었을 뿐이기도 하였다.

큰 전쟁을 치루고 아직 제대로 복구가 안 된 나라이다 보니 관광지에 야간 조명을 하고

외국인들의 주머니를 털 형편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하노이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도 관광버스는 안단테 안단테로 천천히 달렸다.

그 많던 우리나라 백화점의 셔틀 버스는 운행 금지를 당하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 궁금

했는데, 이곳에서 안단테를 배우며 달리고 있었다.

롯데도 보이고 신세계도 보이고 혹은 E-마트 표시도 허리에 달고서 녀석들은 한 때

적대국이었던 이 나라에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달리고 있었다.

 

하노이에 돌아오자 우리는 필드로 나가서 골프를 치려던 원래의 계획을 접고 동행한

관광객들과 여정을 함께하였다.

어제 갑작스러운 인터걸 이야기로 이상한 동행자들로 낙인 찍혔던 우리들이었지만

그 사이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차츰 사정이 이해되어서 오히려 좋은 의미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또 다른 개별행위란 있을 수가 없었다.

일행은 시내의 바딘 광장과 호치민 영묘를 방문하여 국부로 추앙 받고 있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였는가를 직접 확인하였다.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가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으니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힘을 결집하지 않을 수 없었겠구나---,

일행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기둥이 하나인, '한 기둥 사원'과 문묘 등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기 전에

중국으로 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은 문화의 유산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한자로 비석에 새겨져 있었고 송덕비나 액막이의

상징물들이 또한 중국문화의 흐름을 웅변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수상 인형극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비어있어서 우리는 관광 가이드의 제안으로

20달러씩 내고 "발 맛사지"집으로 갔다. 진시왕릉이 있는 중국의 시안(西安)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지저분했던 현장의 인상이 부정적으로 남아있어서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호에 관계없이 역시 일행의 흐름을 따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발을 맛사지 받는 것은 황제나 여왕의 경지에 잠시나마 올라보는 황홀한

체험이 아닌가. 한번이면 어떻고 여유만 있다면 열 번은 어떠랴---.

모두들 초등학교 때 원족(遠足)가는 기분으로 들떠있었다.

"짐은 두고 몸만 내리세요."

가이드의 말에 따라 모두들 정말 몸만 내렸다.

원래 하노이-하롱베이로 여행을 떠날 때는 ENG 카메라 같은 다소 전문적 촬영기기를

휴대하여 현장 슈팅을 할까도 생각했으나, 디지털 캠코더로 낙착을 봤는데 그나마

하롱베이에서 인터걸 때문에 김이 빠져서 발 마사지 집에 도착하여 들어갈 때에는

가이드의 말에 순응했고 관광버스는 번잡한 그 집 앞을 휭 하니 떠나서 주차장으로

가버렸다.

 

마사지 집이라고 했지만 도착하여 살펴보니 표현이 좀 맞지 않았다.

이건 마사지 빌딩이랄까, 마사지 공장이랄까, 중국 시안에서 본 퀴퀴한 좁은 집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우리는 큰 건물의 2층으로 안내 되었는데 10여명이 들어가서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카우치를 설치해 둔 방이 열개는 되는 듯 싶었다. 부인들은 우리의 옆방으로 안내

되었다.

이윽고 베트남 여자들이 10여명 우르르 들어왔다.

부인들이 들어간 방으로는 젊은 청년들이 또 우르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베트(越)족의 특징을 띈 가무잡잡한 피부, 작고 왜소한 몸매, 생글거리는

웃음---, 천진무구한 이십 세 전후의 청춘 남녀들이었다. 일행들은 피곤에 지쳐서

일지감치 카우치에 몸을 눕히면서 이 여자들 중의 누구라도 괜찮다는 너그럽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벌러덩 누워서 눈을 스르르 감으며 "맛사 트루옹"이라고 중얼거렸다.

아까 들어올 때 건물 입구에 영문으로 "Matxa Truong"이라고 쓰여 있어서 앞 글자는

마사지라는 뜻일 것이고 "트루옹"은 베트남 말로 집이란 뜻인가?, 가볍게 여기며 한번

읊어본 것이었다.

"맛사 트루옹? 농, 맛사 쩡!"

맛사 트루옹이 아니라 맛사 쩡으로 읽으라는 비음 섞인 맑은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라면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상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달 까, 이상한 직관 같은 것이 내 몸을 일으켰다.

"어?!"

거기에는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가 내 발을 붙들고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아, 정말 인디언 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를 빼닮은 바로 그

여주인공이 거기 앉아있었다.

그녀는 왜소한 다른 베트 족 보다는 월등 컸고 눈도 컸으며 하여간 이목구비라는 것을

제대로 뚜렷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허리는 다른 아가씨들처럼 잘록하였으나 팔도 그쪽 사람들과는 달리 근육질에 길고도

당당했다.

내가 "어!"하며 벌떡 일어나자 박 사장과 김 실장도 함께 일어났다.

박 사장의 눈매도 벌써 빛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말 대단한 감각의 제작자가 아니던 가---.

"이 박사, 뭐하나 되겠네!"

박 사장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김 실장도 흥분했다.

"라이 따이한이 뭐 따로 있습니까. 하노이의 족발 집, 아니 발 마사지 집에 내팽개쳐진

라이 따이한! 삘이 옵니다! 삘이!"

김 실장은 항상 "필링"을 "삘"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필링이라는 표현 보다 삘이 아니 느낌이 더 온다는 것이었다.

나도 한번 삘이라고 해봤더니 필링보다 더 좋은 삘이 왔었다.

"저 슬픈 눈망울, 갈망하는 시선이 또 무언가를 불러옵니다. 삘 이상이지요."

내가 다시 외쳤다.

"하우 올드?"

내가 갑자기 가슴을 저미는 통증같은 것을 느끼며 나이를 물어보았다.

"뚜에니 뚜."

맙소사. 우리나라 여중생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아가씨가 스물 하고도 두 살이라니---.

그러자 옆에 있던 아가씨들이 "라이, 라이"라고 했다.

거짓말이라---. 나이를 올리는 거짓말도 있나---.

"라이 따이한?"

김 실장이 물었다.

"농! 농!" 그녀가 또 다급하게 프랑스어로 부인하였다.

"에 뛰 캄푸치엔느(그럼 캄보디아 사람)?"

내가 캄보디아 여자냐고 프랑스어로 물어 보았다.

"농, 농, 비에뜨남므."

"비데오 갖고 왔지요?" 박 사장이 우리를 둘러 보았다.

"이 참에 캠코더 갖고 오게 되었어요? 버스에 냅다 두고 왔지---. 제기랄! 아까 그 가이드

때문에---."

나도 약이 오른 상태였다.

이 절재절명의 순간에 기록기기를 두고 오다니, 맙소사.

박 사장도 약이 너무 올라서 김 실장을 나무랄려고 하는 것을 내가 간신히 제지하였다.

"얼굴 슈팅 안하면 어때요. 내가 캐릭터는 다 머리 속에 집어넣어 놓았어요. 걱정 말아요.

하여간 일단 라이 따이한은 족발 집, 아니 발 마사지 집에서 하나 찾은 셈이고---.

이제 콘텐츠만 남았어요. 만인을 죽여주는 콘텐츠!"

우리가 사람의 국적과 족보를 바꾸고 있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Nan Anh" 이라고 명찰을

단 포카혼타스 아가씨는 힘껏, 그리고 또한 정성을 다하여 내 발을 마사지 하면서 연신

생글거리고 웃었다. 무료한 단순 노동 속에서 무언가 이전의 일상과는 달리 조그만 변이가

감지되는 찻잔 속의 태풍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난(Nan)"이란 뜻이 난초인지, "안(Anh)"이란 성씨가 한자로 쓴다면 우리의 안씨, 그러니까

갓을 쓴 계집을 뜻하는지 온갖 바디 랭귀지를 모두 동원해도 더 이상의 진전,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맛사 쩡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한자와 연관되어 중국의 이발청(이발청)처럼 마사 청(청)인지, 집을 뜻하여

마사 정(정)인지를 시름과 서름이 섞인 커다란 눈매를 하고 있는 '난 안'에게 아무리

물어보아도 그저 까르르 웃는 소리만 답으로 나올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저 족발을 닦는 순진한 시골 처녀, 아니 하노이의 뒷골목 처녀일 따름이었다.

가이드를 찾았으나 그가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여기 지금 발 닦는 세족의식의 언저리에라도

있을 리가 없었다.

하긴 가이드가 옆에 있다하여도 더 좋을지 훼방꾼이 될지는 우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의 의사소통 같은 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난 안'은 이미 우리 세 사람의 손아귀에서 라이 따이한으로 둔갑을 했고 그녀의 진정한

실체는 이미 온데 간 데가 없어져버렸다.

 

"아니, 아니야, 이건 영화가 아니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겠어. 저 얼굴이 포카혼타스

닮았잖아. 캐릭터가 아주 카툰 스타일이야. 저 슬픈 눈망울 하며---. 몸매는 팔등신이고

허리는 가늘고 유연하며 탄력적이야. 포카혼타스 꼭 뺐네. 물론 제작단계에서는

캐릭터들을 확 달리 설정해야겠지만---"

내가 일단 영화 쪽에는 이의를 달고 애니 쪽을 고집하였다.

왜냐하면 라이 따이한이라는 캐릭터를 하나 만들자면 "난 안"같은 마스크의 존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 이렇게 발을 닦고 있는 "난 안"을 직접 쓴다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일 것이었다.

뒷골목에서 발 만지는 배경의 아가씨를 영화 스타로---?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어찌하며 오늘 그녀가 주는 저 이미지와 막상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의 포토제닉한 면, 즉 사진발이 받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일반적으로도 요즈음에는 캐릭터 구축이 어려울 때면 즉각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하지

않는가. 또한 "난 안"이 라이 따이한이 아닌데도 무리하게 설정을 했다가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고---. CG, 즉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를 하여 만화를 만든다면

그런 문제들이 전혀 등장할 리가 없었다.

나의 머리는 빨리 회전하고 있었다.

"아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면 CG 작업인데 그 제작비가 한 두 푼인가? 저 애가 아니면

어때? 그리고 영감을 얻었으면 되었지 꼭 저 모양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 이미 포카혼타스

이미지도 한 물 갔으니 다른 베트남 꽁가이를 찾으면 되었지. 진짜 이 교수가 저 애하고

큰 일 낼려는 건 아니겠지요?"

박 사장이 제동을 걸었다.

제작비 문제나 이미지 문제에 모두 일리가 있는 반론이었다.

"에이, 항상 일을 그렇게 돈 문제나 남녀 관계로만 출발하여 해석하질랑 마시오. 저 '난 안'의

모습이 어쩐지 가슴을 찢는 듯 하는구려. 저런 이미지로 우리도 만인의 심금을 한번 울려

보자는 것이지요. 내가 마치 월남 파병을 왔다가 저런 아가씨로 일점혈육을 만들어 흘리고

내뺀 사람처럼 필인지 삘인지가 와서 하는 말이라오. 또 감정에 몰입하여서 영화사 거덜

내자는 바보 같은 아이디어도 아니고---."

"알았어요. 영화든 CG로 만든 애니든 간에 제목은 '마지막 라이 따이한 처녀', 아냐 아니지,

'마지막 라이 따이한 꽁가이' 그게 좋겠네. 그러면 베트남 정부쪽에서도 큰 이의는 못 달 거야.

마지막이라는데 뭘! 그리고 꽁가이가 여자라는 것쯤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통하잖아.

이 꽁가이가 중국 화교 계 뒷골목 깡패들에게 쫓기는 마지막 라이 따이한 처녀라는

설정이라는 거지. 흥행이 되면 이 꽁가이의 옷 벗기는 게임, 도망가며 태권도로 라이 따이한

처녀가 싸우는 게임 등으로 게임 캐릭터와 게임 시나리오도 만들고---. 사실 돈은 그 쪽에서

더 들어오니까! 그래 만화책으로도 만들자."

역시 돈의 귀재, 박 사장이었다.

이 틈에 김 실장도 자기 몫을 하겠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 교수님은 애니 쪽 전공이 아니시잖아요. 역할에 한계를 좀 그어야하지

않으실는지요? 사장님."

그의 걱정스런 표정과 말씨는 무척 과장되어 있었다.

이 녀석이 나하고 무슨 감정은 없겠지만 주인을 위하여 컹컹 짖어주는구나---.

내가 그렇게 도그 푸드(개밥)주어가며 주인의 발길질에 채이는 것도 막고 두둔해 주었건만.

막판에는 인정사정없이 나를 배제하거나 평가절하를 하여 내 몫을 줄이고 주인에게 이익

배분이 더 돌아가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는구나.

"김 실장은 그런 걱정일랑 말아요. 지난번에 애니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 만들 때 나도

시나리오 부문과 기술 부문에 참여하여 자문하고 작업도 했어요. 그리고 이번 시추에이션을

애니로 만들면 나도 돈 많은 전주들에게서 한 10억은 펀딩(funding)해 올수 있다니까---."

내가 열 받은 목소리를 내었다.

"이 교수 말씀도 맞고 김 실장 걱정도 다 옳아요. 하여간 진행만 제대로 되면 그런 거야

프레젠테이션 때 데모 필름 만 한 2-3억 들여서 잘 만들면 30억 큰 손들 끌어오기도 문제

없지---. 데모 필름도 통상의 15 분짜리 말고 한 20 분짜리로 만들자"

세상이 알아주는 박사장의 배짱이었다.

"박 사장! 애니 작가 한사람 스카웃 해서 공동작업 하게 꼭 섭외해줘요. 실무적으로는

김 실장이 책임지시고---"

내가 박 사장을 업고 김 실장에게 진지하면서도 강압적인 협조 요청을 하였다.

전문작가와 공동 작업을 해야 나도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사람만 잘 뽑으면

김 실장의 훼방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 장치도 될 수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그런 역할까지도 충분히 해 낼 인물이 이미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구, 애니 작가나 CF 카피라이터들이 얼마나 성깔이 쎄요. 골치 아프게 생겼네."

김 실장이 머리를 싸맸다. 이번에는 내가 펀치와 어퍼커트를 먹인 셈이었다.

이제 라이 따이한으로 둔갑한 "난 안"은 말하자면 "3D 모션 캡쳐"라는 애니메이션 제작

장치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운명이라고나 할까---.

조금 전 영감을 주었던 콧소리, 팔등신, 티 없이 맑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 잘록한

허리는 이제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고 있는 사람들의 안중에서 완전히 소멸되려는 찰나

였으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생글생글 나의 다리와 발을 주무르고 때리고 흔들고

비벼댈 따름이었다.

"모션 캪처로는 IBM의 마야 보다는 맥스가 비용이 훨씬 덜 드니 그쪽으로 하고 제작

기일은 서너 달이면 되지 않을까?"

박 사장은 벌써 오늘이 제작 첫날, 즉 제작 개시 D 데이였다.

"그러지 말아요. 마야로 만듭시다. 돈 너무 아끼지 말아요. 영국에서 Chicken Run을

만들 때는 1년간 작가와 제작자가 영국을 함께 돌아다니며 이미지와 플롯을 가다듬었대요.

직접 영국의 농장에서 영상을 다시 여러 차례 다듬고 시나리오를 전면개작하고---.

시간 좀 주면 내가 칸느 국제 부분에서 애니메이션 부문을 휩쓸 테니까 한번 조건 없이

맡겨 봐요."

"이 양반이 젊은 작가 선생 구해내라고 하면서 여행 다닐 궁리만 하시네. 청담동, 신사동,

논현동, 그리고 아직도 충무로에 멋쟁이 작가 아가씨들 많아요. 내가 한번 스카웃해

드릴까요? 요즘은 일산에도 많다더라."

그가 떠벌이자, 이래서 아직도 "딴따라" 소릴 듣지---. 나는 혀를 찾다.

옆의 점잖은 일행들이 발 마사지와 함께 왔던 잠은 다 달아났지만 재미 있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더니 영화 쪽에도 "펀딩이 있군요"라고 말을 붙였다.

"여기도 주식시장하고 똑 같죠"라고 박 사장이 설명을 해 주었다.

 

돈 아끼는 문제와 인사문제로 입씨름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부드러운 족발 공사는 어느덧 끝났고 '난 안'의 평온하면서도 비음 섞인 섹시한

웃음소리도 그쳤다.

가이드가 어느새 돌아와서 팁을 주지 못하도록 주의를 다시 주었으나 나는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100불 짜리를 한 장 꺼내어 난 안에게 쥐어주었다.

그녀는 또 보통 보다 반 정도로 작은 예쁜 명함을 내 손에 전해 주었다.

명함이 역할을 하기에는 우리의 일정이 너무 짧구나 싶었으나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다른 인연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과 이제 끝이라는 현실감이 머릿속에서 교차하였다.

그나마 돈과 명함이 교환된 것은 어디에선가 시간을 보낸 가이드가 달려들듯 나타나기는

했지만 조금 지각을 한 형편이어서 경황없이 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그는 일행이 팁 주는 것도 차단하고 빨리 나가자며 독촉하여 내몰았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접촉을 차단한단 말인가---.

이래저래 가이드에게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거나 제작 과정에서의 차후를 부탁할 형편은

아닌 듯하였다.

또한 '난 안'으로 말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이미 해체되어 삼차원 영상기(3D 맥스)

속으로 들어가 소멸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의 잔머리 속에서 처분된 사연이긴

하여도---.

이제 그녀나 가이드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는 영상시대의 우리 삼총사에게는 필요성

자체가 소멸된, 상황 끝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녀가 우리의 발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사이에 우리는

그녀를 영상 캐릭터로 둔갑인지 승화인지를 일단 시켜버리고 현장에서는 슬픈 페이드

아웃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저 유명한 '수상 인형극'을 구경하러갔다.

베트남 농촌에서 발생한 수중 극인데 무대 뒤 물속에서 대나무로 인형들을 움직이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었다.

내용은 꽤 큰 농촌 도읍지에서 벌어지는 농촌사회에서의 인간사의 환희와 이어 다가온

위기와 고통을 담았는데 결국 용이 나타나서 해결해준다는 민담이었다.

여기에서도 어떤 미학적 직관이나 영감을 얻을지도 몰라서 나는 인형극을 모두 캠코더에

넣었는데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는 아름다운 여인은 난 안과 비슷한 모양새였고 그녀를

구하는 황금 색 용의 인상적인 꿈틀거림에는 내 몸의 근육이 이중인화되어 보였다.

 

마침내 하노이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노바이 국제공항을 떠나며 연속된 강행군의 탓인가 나는 살짝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우리가 들렀던 "맛사 쩡" 건물이 물속에 푹 빠져있었고 그 위로 맛사 쩡의 젊은

남녀들이 지붕위로 올라와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으나 구조의 손길은 막막했다.

그 때 갑자기 물속에서 황금의 용이 나타나더니 '난 안'을 위시하여 위기 속의 맛사 쩡

사람들을 품에 안고 하늘로 올랐다.

퍼뜩 잠이 깨어서 창밖을 내다보니 '난 안'이 거기 흰 구름을 발로 딛고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내게 손짓을 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영상이고 또 실재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끝)

 

 

 

 

 모짜르트 플룻과 하프를 위한 협주곡 C장조
Rondo,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