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스크랩] 허빈 작 <첫사랑 마지막 사랑> 소설집에 관한 이야기

원평재 2011. 1. 4. 00:29

내 죽마고우, 허빈 소설가가 지난해 말경 소설집 <첫사랑 마지막 사랑>(문학과 의식)을

발간하였다.

우리시대의 다양한 문화 현상을 가감없이 드러내어서 문화적 충격은 물론이려니와

책읽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소설 출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빈 작가는 "아내의 항변, 남편의 변명"이라는

수필로 후기를 적고 있는데, 소설 발표 이후에 발생한 부인과의 다소 난감한 입장을 고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또한 스토리 성을 던지고 있다.

 

그는 애초의 소설집 서문에 내 이름도 끼워넣은 바 있었는데 후기를 읽고보니 어떤 면에서는

내 입장도 조금 난감하게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함께 이야기의 물결을 여기에서 타고 싶다.

 

 

작가의 말

 

표제작인「 첫사랑, 마지막 사랑」은 애초에 어느「수채화 전시장 풍경」이란 제목으로 2008년도

서울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주관 콩트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자유문예」와

「디지털문학 제 3호」에 실렸던 작품을 이번에 표제작으로 쓰기위해 제목을 바꾼 것이다.  

 

 소설, 나아가서 문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에 등록한 것은 내 나이 65살이 되던 2008년 2월이었다.

 

신문을 읽다가 그런 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컴퓨터로 듣는 강의라면 별 부담 없이 틈나는 대로

수학하면 되려니 하고 시작한 공부였는데 내년 2월이면 졸업도 한다.

 

 문학은 무병(巫病)처럼 찾아온 내 「첫사랑」이다. 나는 신열을 앓듯 문청시절을 보내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문학과 결별하고, 격류에 떠밀려 흘러가듯이 입대했다.

그리고 군인으로 28년을 보냈다.

보병소대장으로부터 연대장까지 주로 전방에서 보냈고, 대위 때인 1970년에는 맹호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90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들어간 직장이 「연합통신」 비상계획부장이었다.

비교적 한가한 부서라 책 읽을 시간도 있었고, 언론사라 컴퓨터와 인터넷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2002년에 어떤 문학카페에 가입하면서부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무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그 병은 내림굿을 받아 하다못해 선무당이라도 되어야 직성이 풀릴 병이었다.

번번이 신춘문예에 낙방하면서 소설공부를 기초부터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창학부에

등록했던 것이다.

 

공부 덕인지 2008년 겨울, 단편소설 「석양 무렵」 으로 「문학과 의식」 을 통해 등단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선무당이 된 것이었다.

 

 소설은 내 첫사랑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좀 더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지

못했던 점은 깊은 회한으로 남는다.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나는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절인 청, 장년기

28년을 군인이 되어 조국이 원하면 언제든지 목숨도 바치겠다는 각오로 사랑했다.

첫사랑 대신 선택한 나라사랑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덕에 내 인생은 헛되지 않았다.

 

 내 필명은 문(文)과 무(武)가 합쳐진 "빛날 빈(斌 )"이다.

나는 내 남은 열정을 소설과 문학에 바쳐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싶다.

「첫사랑 」에는 실패했지만 「마지막 사랑」에는 성공했으면 한다.

이 소설집은 대학졸업 및 칠순기념 작품집이자 「마지막 사랑」에 대한 결의 같은 것이기도 하다.

 

 평소 우의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외우 김유조 교수와 「문학과 의식」의 안혜숙 주간,

등단작의 심사위원인 정소성 교수께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해 올린다.

 

 부족하고 무심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두 며느리, 손자 손녀 덕에

나는 행복하다.

고맙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특히 내가 이 세상을 살다간 것을 가장 늦게까지 기억해줄, 손자 재원(宰源)과 손녀 아인(娥璘)에게

각별한 사랑을 표한다. 내가 마지막 사라을 바쳐야할 대상은 사실은 문학이 아니라 바로 이들 내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2010.10월 16일 허 빈 (許 斌)

 

------------------------------------------------

그런데 소설집을 내 놓은 후 내 친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터넷 문학 카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제목은 "아내의 항변, 남편의 변명"이라는 수필이었다.

 

아내는 내 소설<첫사랑 마지막 사랑>을 못마땅해 하고 몹시 부끄러워한다.

아내는 애초부터 소설가의 마누라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터라, 뒤늦게 그리 된 것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아내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라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그리 후하지 않는

편이다.

아내는 정적이고 사색적인 것을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라고 단정하고 있고, 그런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소설 읽고 영화 볼 시간에 청소하고 스포츠센터에서 땀 흘려 운동하는 것이 더 유용

하다고 믿고 있다.

그 점은 나와는 정반대이나, 그것이 그녀의 삶의 철학(?)인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내 소설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할 수 없고 난감하기까지 하다. 

아내가 특히 부끄러워하는 것은 성적묘사 부분이고, 못마땅해 하는 것은 아내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인 것 같다.

이런 아내의 생각이 생판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소설을 읽고 난 친구들이 "너 마누라한테 혼나지 않았느냐"고 걱정 반 농담 반의 독후감을

전해 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나 역시 책을 낼 때 그런 아내의 반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내와 가족들을 의식해 자기검열과정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표현을 순화

시킨다고 시켰기 때문이다.

 

작가가 가장 난감해하는 것 중 하나는 독자들이 주인공이나 작중인물을 작가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 내용은 전부 작가의 직접적인 경험일 것이란 단정적인 생각이다.

아내 역시 당신이 경험한, 한마디로 나 몰래 바람피운 이야기가 아니냐는 항변이며,

무슨 자랑거리라고 온 천하에 떠벌려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며, 특히 아들 며느리 손자

보기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아내가 부끄럽게 느낀다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고, 그래서 미안하여 책 낸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느낌은 논리나 윤리가 아니어서 그렇게 느낀다는 데야 남이 그 정당성을 왈가왈부할 수 없고

설득의 대상도 아니다.

 

소설은 이디까지나 소설이다. 소설은 허구이고 거짓말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원론적

이야기다.

누가 거짓말을 한다 싶으면 "소설 쓰고 있네!"라고 흔히 말하는 걸 보면 소설이 허구임을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하다.

모르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문득문득 작가의 실제 경험일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러나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되는데 비해,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의 소설은 그 사람이 실재하는

것처럼 소설 속 이야기도 실제 이야기일 것이라고 흔히 착각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소설속의 인물은 작가가 재 창조해낸 소설 속의 인물일 따름일 뿐 작가

자신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을 작가로 착각하는 것은 드라마의 배역과 배우를 혼동하여, 그 배우를 악인으로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실로 고백하건데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은 내 이야기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다.

그럼에도 내 경험과 생판 무관한,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은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이나, 타인의 이야기를 통한 간접적인 경험, 그리고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접촉했던, 혹은 관찰했던 인물이거나

그 인물들의 복합체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역시 내가 살아오면서 접했던 것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복합되어

재설정된 것이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기억이나 혹은 맥락을 가진 하나의 사건이 복합된 인물을 통해 재설정된

배경 속에 투영된 것이다.

 

소설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해 문자로 서술하고 묘사하여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예술적

행위다.

소설이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아내가 부끄러워하는 성적인 묘사는 내 나름대로 인간에 대한 하나의 탐구 작업이다.

나는 섹스라는 것은 인간실존의 심연에 다가가는 하나의 잠수정, 혹은 비밀의 문을 여는

패스워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가 진실로 서로 교감하며 서로의 본질에 다가가는 데 있어 '궁극적'으로 섹스 말고

다른 그 어떤 것이 있던가?

프로이트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저 위대한 성경(구약)의 내용이 그리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나의 이런 항변이나 설득은 아내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아내에게는 속수무책이었고,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목수의 아들일 따름이다.

나 역시 젊은 시절의 꿈을 이룬 소설가가 아니라, 만천하에 마누라를 욕하고 부끄럽게 만든

영감탱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가 높이 평가하는 글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생활수필 같은 글이며, 글을 쓰려면 그런

글을 쓰라고 윽박지른다.

그런데 최근에 아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아 다행이다.

그것은 내 설득이 유효해서가 아니라, 소설을 읽은 아내의 친구가 좋게 평가해 주고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 덕택이다.

 

나는 아내의 항변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소설이 추구하는 인간실존에 대한 패스워드가 어찌 프로이트적인 것뿐이라.

지금까지는 단편을 주로 써왔지만 앞으로는 아내가 읽어도, 자식과 손자가 읽어도 부끄럽지

않을 좀 더 호흡이 긴 작품을 쓰고 싶다.

인간의 삶이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러서 부침해 가는 것이거늘, 하다못해 내가 살아온 것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틈틈이 아내가 감동해 마지않을 수필도 쓰면서, 그렇게 시름시름 늙어가는 것이 인생이지

뭐 별거 있겠나 싶다.

 

아내여, 내가 쓴 소설이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그대야 말로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임은

거짓말이 아니라오. 

 

-------------------------------

 

친구의 후기에 내가 다시 몇마디 사족을 달고 여기저기 소개를 하였는데 그 일부를

여기 올려본다.

 

아름다움과 깊은 울림이 함께한 허빈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었습니다.

표지도 허빈 소설가의 심중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구나, 생각해 봅니다.

작품 뿐만아니라 항변과 변명의 후기도 또 멋진 글쓰기에 즐거운 독서자료에

다름아닙니다.

 

소제, 김 아무개의 이름이 글머리에 들어있어서 부인께는 남편의 대책없는 친구들 중의

하나로 낙인이 찍혔는가 근심도 조금 됩니다만~~~.

 

책을 보시지 않은 분들에게 피알 겸, 자료로 표지와 작가의 서문을 소개해봅니다.

아, 피알의 본뜻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이라고 하던가요~~~.

 

-------------------------------

 

지난 만추에는 잠깐 귀국을 하였다가 대책없는 친구 몇사람이 눈이 오는날 출판 기념을

핑계로 서울 도심에 모여서 저녁 나절을 지냈습니다.

눈오는 날의 도심 몇 컷을 역시 사족으로 달아봅니다.

허빈 작가는 물론 따로 출판 기념회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누었겠지만

친구들은 초대되지 않았습니다.

 

 

 

                        왼 쪽이 허빈 작가이고 오른 쪽은 사회학 전공의 교수입니다.

 

  

  

  

   

  

   

  

  

 

  

  

   

  

출처 : 문학과 의식 포럼
글쓴이 : 청담 김유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