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맥 문학회의 열정
김 유 조(42회, 경맥문학회장)
<경맥 총동창회 동문가족 가을 축제>의 계절이 왔다.
우리 42회와 67회 후배기수가 파트너가 되어 주관했던 34회 축제가 2002년 10월 6일에
양재동 인재개발원에서 개최 되었으니 어언 8년이 지났으나 바로 엊그제 같다.
마침내 2008년 축제부터는 우리 기수에게도 규정상 개별 텐트가 제공되지 않아서
세월 무상을 느꼈으나, 워낙 열정에 넘치는 동기회마다의 특성이 달라서 지난해에는
참석자 수에 따라 이 원칙에도 융통성이 생겼다.
우리 42회도 이 열정의 기수에 속함은 가을바람에 펄럭이는 텐트 자락의 "42" 숫자가
웅변하였다.
우리 기수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못하였다. 무슨 짝수 신드롬이던가 그런 것이
내려오면서 자성예언의 덫에 걸린 것처럼 우리 동기회의 동문회 참여가 심드렁하던
적도 있었으나 꽤 오래전, 몇몇 열정적 동기들이 활약을 시작하고부터 이런 전설은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짝수 기수에서도 모두 혁파되었다고 한다. 만사 마음먹기에 달렸고
근본은 열정인가 싶다.
작년도에 <경맥 문학회>가 태동한 것도 바로 이런 열정어린 문인동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대 경맥사"에 아직 총동문회 단위의 문학회가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러한 명제는 꺼내놓기도 민망하였으나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물론 장르별, 지역별, 친소 관계의 알찬 모임들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통시적,
공시적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대 경맥 문학 운동"은 상기도 존재치 않았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근년에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 논의의 단계를
넘지 못하였다.
원인분석이랄까, 당시 불초가 <격문>의 형식으로 주변에 돌렸던 글의 일부를 다시
음미코자한다.
격!!!
우리의 모교 경북중고등학교(구 대구고보) 동문들의 면면을 살피면 국내외적으로 정치,
사법, 경제, 사회, 국방, 교육, 문화의 각 분야를 망라하여 가히 기라성 같은 존재들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엄존한다.
그런데 다만 문학의 영역에서만은 빼어난 우리 동문들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진건, 백기만, 신동집, 이장희, 이효상, 김사엽 등등의
이름난 문인 선배들을 다양한 장르에서 만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또한 연대를 조금 내려잡으면 경제인이자 정치인이며 훌륭한 소설가인 김준성(20회)
선배가 있고 한국 아동문학계의 시초를 튼 이재철(32회) 선배, 시와 수필문학계의
정무수(40) 선배, 지례마을 촌장이며 고유한 시세계를 간직한 김원길(41)선배, 낙동강의
작가 고 이태원(42회) 동문, 평론가로 활동하는 오양호(42회) 동문 등과 여기에 일일이
매거하지 못하였으나 활약상이 돋보이는 선후배 작가들이 문단에 꽤 많이 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치가 너무 높은가,
“대문호 대망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고 우리의 갈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자긍하여 마지않는 “빼어난 역량”을 생각하면 문학 쪽의 성취는 아직도 미흡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그 원인을 캐고 자성하는 분위기가 심각하게 상존할까.
어떤 목소리에 따르면 우리 경맥 인들은 조상대대로부터 강력하게 내려온 유학 전통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와서 시문과 같은 문학 세계로서는 상대적 성취감을 덜 느끼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과거 조정에 나아가서 목민관의 자세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아온 분위기와 전통에 따라
근대 산업사회에서도 삼부의 관직을 도모하거나 국방의 간성으로 입지하는 데에 온 능력과
관심을 집중한 탓으로 문화와 문학 분야에서는 노력이 다소 미흡했으리라는 자평과 자성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다소 단편적인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수긍이 되고도 남는 점이 있다.
그래서 그런 가, 동창회의 조직을 살펴보아도 여러 갈래의 모임이 다양하게 있지만 오직
문학인들의 모임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이런 상태와 모양새를 이전부터 안타까워하며 결속을 꾀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분위기가 중요한지 이런저런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상태를 ‘실패한 성공’이라고 하였던가.
최근에 다시 정무수(40회), 김원길(41), 박종해(41), 김광진(42), 김유조(42회), 오양호(42),
김길중(43), 배용파(43회), 정계영(44회), 김광수(45), 윤보옥(45), 권영재(46), 전선봉(46),
최종무(46), 최종고(47), 남순대(50회), 김종걸(51), 박갑수(52), 허준영(53), 손수일(55회),
최익봉(57) 등등의 동문들이 합류하여 경맥 문학 혼을 응축하고 ‘삼천리 문화의 전당’을
새롭게 구축하자는 운동을 마침내 전개하게 되었다. (후략)
이제 이럴 수는 없다는 자성이 늦게나마 일어나고 마침내 경맥 문학 혼에 신들린 선후배
동문들의 열정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용암류가 분출한 것은 2009년 10월 24일 오후 5시,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였다. 이때까지 파악된 180여명의 문인 동문들 중에서 경향
각지를 망라하여 55명의 동문이 참석하였으니 대성황이라고 자축할만한 분위기였다.
식은 재경 총동창회의 정해창 회장님의 축사와 원로 문인 이재철(32회) 정무수(40회)
선배님의 격려사와 회고사가 이어지면서 처음부터 한껏 고조되었다.
남순대(50회) 시인이 명사회를 보는 가운데 국민의례에 이어 배용파(43회) 시인이
경과보고를 하고 이어서 회칙 제정, 임원 선출 등의 과정을 거쳐 불초 김유조(42회)
소설가가 회장으로 피선되어 인사말을 하였다.
선배 문인들과 신진기예의 후배 문인들을 접목하고 아우르는 데에는 그 중간을 잇는 기수가
적절하리라는 분위기에서 초대 회장직을 떠맡고 보니 능력은 부족인데 심신이 무겁기만
하였으나 열정으로 뭉친 동문들의 격려는 큰 힘이 되고도 남았다.
이날의 식은 창립총회답게 2부에서의 시낭송과 내외귀빈의 축사, 3부의 만찬과 친교의
시간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진행되었다.
(이날 함께 짐을 지기로 한 열정의 동반자들은 지면관계상 naver cafe에 개설한
<경맥 문학회 naver://cafe.naver.com/kbmunhak>을 참조해 주시기 간곡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나서부터는 경맥 문학회의 모임과 발표의 열정이 끊임없이
불타올라서 우선 2009년 12월 11일에 송년회 모임 겸 경맥 문학회의 첫 작품 낭송회를
성대하게 가졌으며 새해 들어서 2010년 3월 20일의 작품 발표 겸 연찬회, 특히
5월29일에는 안동 지례마을 김원길 촌장님의 초대로 하루 밤을 새우며 심도있는
문학의 밤이 치루어졌다. 지금 지면 관계상 그간의 실적을 모두 제대로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끝으로 경맥 문학회는 등단 문인들만의 모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동문들의 역량과 뜻으로 볼 때 경맥인 모두가 글을 쓰고 발표할 문인의 반열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경맥 문학회는 이 모든 동문들의 잠재적 역량에 동기와 열정을 불어넣는 촉매제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경맥 문학회의 잠재적 회원은 모든 동문임이 엄연합니다.
"경맥 문학회의 가입"은 위의 naver 카페로 들어가서 "가입인사방"에 글을 남기면
됩니다.
동문 여러분, 함께 마음의 글밭을 가꿉시다. 다시 한 번 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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