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한두번쯤 고향인 영주군 내의 "순흥"에 돌아오면, 나는 조상 묘소에 때도
맞지않는 성묘나 벌초를 급히 하고나서 처가 권속들 쪽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고
상경길을 서두르지만 그래도 "초암사" 절집 까지는 걸어서 올라가 본다.
초암사 가는 길은 바로 "죽계구곡(竹溪九曲)"을 끼고 있어서 경관과 그 감상이
여간 좋은게 아니다.
더우기 이런 단풍의 계절에는 그런 느낌이 더하다.
성묘에 무심한듯한 내 행동에는 지난날 엄부(嚴父)에 대한 서운함이 내재해 있었고,
처가에 대한 외면이나 죽계구곡에 대한 애착의 밑바닥에는 "재희"가 존재하였다.
나와 그녀는 이 길에서 얼마나 많이 벅찬 감정을 나누었던가.
그래 진부한 표현을 쓰자.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구나"라고 누가 아는체 말을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밀어를 가득채우는 것은 보통 꿈과 희망이라는 미래의 몫들이기에,
"나중에, 나중에" 우린 넓은 세계로 나가자는 약속을 수없이 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평일임에도 갑자기 고향, 순흥을 찾게되었는데 회사 일로 마침
영주군 내에 내가 출장을 올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이유만은 아니어서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본 소백산 줄기마다에 불타고 있는
단풍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끌고 온 승용차를 내가 죽계구곡의 물이 가두어져 있는 저수지 인근에 주차시키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려는데 뚝방 저 쪽에 두 남녀가 꼭 붙어앉아 있었다.
가을 정취에 보기 나름으로는 어울렸으나 호젓한 곳에 두 남녀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모습이 오랜 유학(儒學)의 동네에서 아름답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더우기 여자의 모습은 멀리에서 보아도 "재희" 같기만 했다.
내 처남의 댁이 되는 사람이다.
남자는 처남이 아니었다.
처남은 여기로부터 조금 떨어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내 성씨가 순흥 안씨는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은 순흥이다.
남들이 고향을 물으면 나는 그저 편하게 조금 넓은 범위에서 "영주"라고 대답을
하지만 내 고향은 정확하게 말해서 "순흥"이며,내 피에는 국망봉에서 흘러내리는
죽계구곡의 푸르고 청량한 물길과 순흥에서 80년대 중반에 발굴된 고분 벽화의
핏빛으로 붉은 붓길이 반반씩 섞여서 들어차 돌고 있는듯하다.
죽계구곡의 쪽빛 물길이 유학(儒學)의 표상이라면 순흥고분의 핏빛 붓길은
정염(情炎)을 내포하고 있었다.
순흥 고분을 내가 그렇게 보는데에는 고분 벽실에 선연한 붉은 벽화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나와 재희가 그 고분 입구 쪽에서 밤이면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자주 입맞춤을 했기에 자연히 생성된 느낌인지도 모른다.
고분 벽화의 붉은 색갈은 언제부터인가 죽계구곡의 좌우에 늘어서 있는 사과, 혹은
능금의 붉은 빛갈과도 맥이 통하는듯하였고,재희에 대한 내 못다핀 정열의 빛갈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벽화의 붉은 빛은 오래 전에 도굴된 후의 방치로 때깔이 칙칙하게 바래었고,
능금 색갈도 저 높은 국망봉 산세에 눌려서 차단된 햇살 탓에 조금 어둡게 익었으며
재희에 대한 한 때의 내 정열도 결국은 떳떳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재희는 내 처남의 부인이자 순흥 초등학교의 한해 아래 후배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살이 어렸다.
관능도 재능처럼 타고나는 것인가.
재희는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키와 눈과 코와 특히가슴이 커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는데,
내가 엄한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유학을 가서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보면 나보다 한해 후에 영주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한 그녀는 타고난 미태(美態)로
인해 수많은 남자녀석들을 주위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재희는 서울에서 내려간 나를 보면 항상 오빠만 따르는 일편단심 민들레라고 하였다.
재희에 대한 내 감정은 아마도 내 피 속에 흐르는 고분속의붉은 붓길, 정염의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영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재나 편물 학원을 조금 다니다가 마침내
미용학원을 마치고 미장원을 열었을 때, 나는 대학 2년생이었고 그해 여름방학을 맞이
하자마자 우리는 서로 입술을 포개는 사이가 되었다.
재희의 입술은 달콤하고 뜨거웠으며 항상 궁금했던 블라우스 속의 무르익은 젖가슴에는
내 얼굴이 파묻히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통지가 나오자 종손인 나는 지금의 아내와 어른들끼리 맺은 약조대로
결혼식을 서둘러 올려야했고 대학생이었지만 징집연기원을 내지않고 그대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아내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고향에서 이내 배가 불렀고 나는 영장이 나와서 신병 훈련소로
들어갔으며, 훈련이 끝난 직후에는 시골 부농이자 군수이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금방
의병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다음 수순은 미국 유학이었는데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으로 그 계획은 중간에서 꺾이고
나는 서울의 어느 큰 제조 회사에 취직을하여 이제 중년을 맞게 되었다.
재희는 기가막히게도 내 손 위 처남의 부인이 되었다.
재희네의 지체가 좀 쳐지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 혼사가 이루어졌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고향을 계속 떠나있었기 때문이었고 과묵한 아내도 재희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말이 없었다.
처남은 앞에서 말했듯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내 아내는 나와 재희가 좋아지냈던 것을 어렴풋이 알았으나 일절 문제 삼지는 않았고 사실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다만 사람 좋은 내 처남에게 재희는 과한 여자라는 생각이 항상 든다.
재희의 뜨거운 입술과 풍만한 가슴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더욱 확신으로 와닿는다.
재희가 좁은 영주 군내, 아니 더욱 좁은 순흥 바닥에서 가끔 염문을 뿌린다는 소문을 걱정하는
아내로 부터 들으면 내 가슴도 미어진다.
재희는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그녀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오래 전에 아내로 부터 들었다.
생산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임으로 출산을 피하는듯 하다는 소리도 아내로 부터 들어
알고 있다.
정말 그녀는 무엇을 꿈구며 살고 있는가---.
역사적으로나 내 개인사적으로 모두 유서가 깊은 "초암사"까지는 왕복이 5킬로미터쯤
되었다.
오랜 도시 생활에 내 건강했던 몸도 조금은 피폐하였으나 나는 쉬지않고 달리다시피 죽계구곡을
따라서 초암사에 이르렀다.
절은 불사를 크게 일으켜 상당부분 이미 중창이 되어 있어서 예전의 허술한 모습이 아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예놀던 고향은 아니더라"라는 감상보다,내 고향의 때깔이 윤택해진
모습에 내 가슴은 뿌듯하였다.
짧은 가을 해를 뒷등에 받으며 나는 급히 저수지 뚝방쪽으로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듯 발길을
재촉했다.
놀랍게도 뚝방 건너편으로는 목조 가옥이 1년도 안되는 사이에 10여채 들어서 있었다.
아까는 방향 관계로 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았다.
그 뚝방 가운데에 재희가 아직도 서 있었다.
아까 본 사내는 온데간데 없이 그녀만 홀로 서 있었는데 과연 중년 여인의 교태란 이런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처남의 댁."
"오빠, 보고 싶었어요. 너무 무심해요."
그녀의 문신을 한 속눈섭 아래로 눈물이 방울져 있었다.
그녀가 눈물이 흔한 여자였다는 생각이 얼른 떠올랐다.
그리고 침샘도---.
"여기 펜션이 많이 들어섰네. 처남네도 삼밭이랑 능금 밭이랑 돈이 있으니까 한두채 있겠네."
"있으면 뭘 합니까. 서울 사람들 와서 놀다 가는 것 보면 부럽고 부끄러워요. 시골 살림이란게---."
"서울 거지들이 시골 부자들한테 와서 뻐기면 뭘하나. 세상이 다 아는데---."
"서울 아파트 한채면 이런 것 열채도 더 사겠우."
"그런 서울 사람 만명 중 하나나 될까---."
재희가 뚝방에 쓸어질듯 비스듬히 앉아버려서 나도 모양은 좋지 않았으나 그 옆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내가 그렇게 오빠를 사랑했고 또 서울이나 외국에 그렇게 나가 살고 싶어 했는데 그 소원을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았어요?"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전원생활이 얼마나 좋아요,
처남댁. 그리고 자꾸 오빠라고 부르지도 마시게."
"뭐라고요?!"
그녀가 종주먹으로 내 명치 끝을 때렸는데 너무나 원한이 가득했던지 숨이 멎을만큼 아팠다.
그녀가 눈물진 얼굴을 내게 갖다대려고 하여서 나는 반걸음쯤 뒤로 물러나 앉았다.
"오빠, 토마스 하디의 귀향이라는 작품을 알아요?"
"내가 문학같은데에는 원래 쑥맥이잖아. 그건 처남댁이 잘 알지."
"거기 유스테이샤 바이라고 하는 꿈많은 시골여자가 나와요."
"욕망도 많겠네---."
"빠리에 가고 싶어서 빠리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시골 부농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결혼까지
하고 시골 생활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클림 요브라이트라는 그 청년은 고향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정착하려고만 하네요---."
"마음을 사로잡았다는건 유혹했다는 말인가?"
"오빠! 유혹 없이 사랑이 되나요? 결국 유스테이샤는 남편 덕분에 시골을 벗어나겠다는 꿈은
접고 오래전 부터 사귀던 애인과 함께 시골을 탈출하려다가 저런 저수지에 밤중에 굴러떨어져서
희망과---, 아니지 오빠 말데로라면 욕망과 목숨의 끝장을 보지요. 저도 죽든 살든 오빠따라
서울 갈래."
"-----:
"놀라시지도 않네. 오빠, 저기 순흥 고분 발굴할때 우리 자주 갔었지요. 거기 석축 뒤에 숨어서
뽀뽀도하고---. 그때 유골이 많이 나왔어요. 고구려나 신라 시대 지방 토호로 보이는 40대 남자의
유골과 함께 젊은 여자들 여덟명의 뼈가 나왔다고 했잖아요. 순장(殉葬)의 풍습이라고 신문에도
크게 났고---. 하지만 시대는 한참 바뀌었어요. 저는 평생에 여덟 남자를 잡아먹고 죽을까해요.
제가 처녀때부터 사귀어 온 모든 남자, 여기 펜션에 놀러왔다가 나하고 눈이 맞은 바람난 유부남들,
어느 하나도 나를 서울이나 외국으로 데려가지 못하니 이것도 팔자인가 봐요. 한 여덟명 나 죽을 때
데려갈까 하는데 오빠는 동행을 할래요, 말래요?"
그녀가 으흐흐흐하고 소리를 삼켰는데 울음인지 웃음인지, 아니 그 둘이 모두 섞여서 기괴한 소리를
저녁 모연(暮煙) 속에서 합성해냈다.
그녀는 흐느적 일어나더니 뚝방너머로 정말 귀신처럼 사라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속에서 내가 승용차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저만치에서 손 위
처남이 자전거를 타고 닥아왔다.
"이게 누구야, 혼자 왔어? 들어가서 밥 먹고 자고 내일가면 안되나?"
"출장 길이 바쁩니다. 요즘은 좀 떨어진 학교에 나가신다더니---."
"어, 그래서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지내는데 어제 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와보는 길이네---."
"형님, 형수님과 두분이 함께 서울 나들이도 하시고 해외 여행도 다니시고 그러십시오---."
"시골이 좋아. 나가면 뭐하나. 보는 것만 많고. 허파에 바람만 들어요."
나는 출장길을 핑게삼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 완전히 어둠이 찾아와서 헤드라이트를 켜야했다.
헤드 라이트 앞으로는 저 순흥 고분의 벽화와 전실(展室) 속에서 천년을 잠자던 혼령들이 너울너울
나타나 동행을 청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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