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아침에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대전의 어느 교회 앞뜰에서 국립 "한밭 대학교" 도서관장이 같은 대학의 지리학 전공 교수 양한철 박사에게 웃음을 가득 담고 다가갔다.
"엊저녁 늦게 위원회에서 통과 되어 전화도 못 드리고 이리로 왔습니다."
"아, 제 도서들이 영구 소장 문고로 선정 되었군요?"
"네, 당연한 결과입니다만 일단 공식적인 과정도 다 마친 셈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선생님, 저희가 영광이지요."
두 사람은 한밭 대학교의 동료 교수이자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이였다. 금년도 1학기 말에 정년퇴임을 하는 양한철 교수의 약 5000권에 달하는 책이 마침내 그가 오래 봉직했던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영구 보존 도서"로 선정이 된 것이었다.
책을 기증하면 도서관이 황송해 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기증 도서를 공간 문제와 보존 가치의 급속한 변화라는 시대적 추이에 따라서 대략 사절하는 형편이 되었다. 더구나 대학 도서관의 속성이 전자 도서관으로 개편되면서 활자 도서에 대한 가치는 급락하였다. 다만 공간 사정이 아직은 좋은 몇 몇 지방 국립대학만이 일반 기증도서 속에 묻어있는 희귀 도서를 확보한다는 희망으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기증자의 이름이 걸린 영구 보존 문고 코너를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거나 학계에서 상당한 업적이 있는 모교 출신 교수의 경우, 귀중본 도서를 포함하여 2500권 이상을 기증하면 심의를 거친 연후에 말하자면 "명예의 전당"을 허락하는 세태가 된 것이다. 이제 기증도 경쟁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여보, 내 책들이 마침내 다시 살아났네. 내 마음의 고향이 생겼어."
부활절 대예배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 아내에게 양 교수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방금 도서관장에게서 들은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내 책들은---이라고 하시니 조금 듣기 거북하네요. 몇 년 전에 제 책들은 다 잿더미가 된 사정이 다시 생각나요."
초등학교에서 교장 직 까지 거치고 몇 년 전 명예퇴직을 한 이옥분 선생은 남편의 들뜬 표정이 고깝다는 듯이 토씨를 문제 삼아 조금 볼멘 반응을 보냈다. 등단 시인이기도 한 그녀는 초등학교 교장까지 오르면서 모은 교육학 관련의 서적은 물론이거니와 아동 문학 서적, 수많은 시집, 그리고 특별히 여명기의 문학잡지 및 해방 후에 우후죽순으로 나온 문예지의 창간호등을 평생 정성을 다하여 모아온 바 있었다.
교장 직이 단임으로 끝나자 그녀는 곧 명예퇴직을 신청하면서 이 책들의 처리에 고심하게 되었다. 집이 좁아서 학교를 옮길 때마다 상당한 분량은 학교 캐비닛을 쓰느라 밖으로 끌고 다닌 탓도 있었지만 이제 명퇴를 하고 칩거하게 된 마당에 다시 그 책들을 집으로 끌고 들어오기 보다는 어떻게든지 집안에 있는 그녀의 다른 책들과 함께 명예롭게 처리하고 싶은 소망이 굴뚝처럼 생긴 것이었다.
자식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남편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린 이후 주위에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사사로이 그 보물을 처리할 생각은 그녀에게 애초부터 없었다. 평소 자신의 장서들이 보물의 가치가 있다는 신념에 가득한 그녀는 이 보물들이 어떻게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진정한 보물로서 영원히 쓰여 질 것인가를 노심초사하며 밤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의 첫 번째 희망은 이 책들을 예컨대 국립 중앙 박물관 같은 기관으로 기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야박하여서 그녀가 주장하는 보물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희귀본의 자격으로 국립 도서관 행이 가능하고 평생을 그녀와 함께한 그 나머지 책들은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쓰레기장으로 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통보에 그녀는 비탄에 잠기었다. 예산이 좀 있다는 사설 박물관 겸 도서관도 사정은 더 야박하였고 일부 호사가들이 극히 일부 매입을 제안하는 경우에도 그녀가 소유한 나머지 책 전부의 운명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천권의 보물을 진정한 보물로 여기고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분신 같은 책들이 이렇게 흩어지고 그나마 대부분은 멸실될 바에야 자신이 명예 퇴직하던 바로 그 초등학교에 모두 함께 기증해버릴 결심을 하였다. 마침 초등학교 취학 아동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그 빈 교실들을 생활 박물관으로 꾸미겠다는 후임 교장의 뜻은 고귀하였고 또 천재일우의 기회 같기도 하였다. 기증자의 이름 세자를 살려주는 것은 당연한 기본 방침이었다.
하지만 가치의 기준 차이가 신구 교장 사이에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신임 교장은 시골의 맷돌과 옹기와 다 삭아빠진 농기구와 베적삼은 만고의 보물로 여겼지만 전임 교장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 나부랭이를 모조리 받아서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에 영원히 보존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언성까지 높이며 싸움을 하다가 그녀는 일천권의 책을 싣고 그때 마침 사들인 시골집으로 갔다. 퇴직금 거의 전부와 저축을 저며서 그때 유행처럼 번진 농가주택을 장만한 것이 있었다.
"그 많은 책들을 작은 농가주택 어디에 쌓아놓을 셈이요? 뒷간 창고에 넣어두었다가는 금방 거미줄 신세에다가 습기로 썩어버릴 것이고 곤충과 쥐새끼 떼들이 집단으로 서식할 텐데---. 일부 희귀 도서만 국립 도서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버립시다."
남편인 양 박사의 지혜로운 제안도 격앙된 그녀의 감정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전부 다 불태워버릴 거예요. 보물을 몰라주는 이놈의 세상에 이런 걸 남기거나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녀는 농가주택을 개조하면서 서둘러 멋있는 벽난로를 만들었다. 아니 멋있다는 것은 이옥분 교장선생님만의 자평이었고 사실은 매우 투박한 모양새였다. 이미 만들어진 벽난로를 사다가 설치한 게 아니고 그녀가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벽난로처럼 만든 것이었다. 시골에 사람이 없어서 예전에 흙일 하던 늙은이를 불러다가 겨우 어떻게 만든 얼개 위에 양 박사가 주말이면 강돌을 주워 다 벽난로의 겉을 치장하여서 그럭저럭 모양이 나온 꼴이었다.
그해 겨울이 때맞추어 추웠다. 맨 처음 책을 찢어서 불을 지핀 저녁의 분위기는 정말 극적이었다. 말하자면 점화 의식이 불붙은 겨울 저녁인 셈이었다.
밖에는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전 시내의 아파트에서 오래 쓰던 고물 전축을 농가주택으로 끌고 와서 이제는 디지털 시대라 버려질 운명의 LP 판을 걸고 푸치니 작, 라보엠 중에서 "그대의 찬 손"을 최고 음량으로 틀었다. 추운 겨울 날, 돈이 없어서 악보를 태우며 추위를 견디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유럽 오페라 사, 불후의 아리아 중에서 이날 선정된 입주 축하곡은 눈 내리는 시골 전원의 산천초목 사이로 울려 퍼졌는데 분위기는 매우 청승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부부라고 한들 항상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아니 닳아지는 살들을 맞대고 지내는 생애의 대부분은 오히려 피곤과 권태의 나날이 더 많을 수도 있어서 오죽하면 부부관계란 전생의 원수라는 말이 횡행하랴. 하지만 이 날 저녁만은 원수대적들도 화해의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애절한 아리아에 귀를 기우리다가 몸이 선득하게 추워오는 기미가 느껴지면 얼른 눈을 떠, 지천으로 쌓인 시집을 태우고 또 태웠다. 그러는 도중, 어느 순간이던 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골 동네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축하 잔치에 불청의 하객들이 떡이라도 해왔단 말인가. 부부가 밖으로 나와서 불청객들의 하늘로 향한 시선과 합일하여 지붕을 쳐다보다가 그만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시뻘건 불꽃이 엉성한 이엉 위의 조잡한 굴뚝으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다 타지 못한 불티들은 온 동네를 날라 다니며 대화재의 위험을 시시각각 불러일으켰고 그 불꽃 아래에서 시커먼 그름은 흰 눈이 쌓인 동네 지붕과 마당을 수묵담채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사건 이후로 벽난로는 투박한 장식물로서만 그 역할을 다 하였으나 화가 더욱 치민 이옥분 선생은 아름다운 시집과 동화책은 물론이고 곰팡내 나는 문예지 창간호 보물들도 모두 구들을 데우는 군불로 지피면서 그해 겨울을 더운 열기 속에서 지나갔다. 농가주택이라서 마침 바닥에는 온돌이 깔려 있었고 아궁이도 쓸 만하게 구멍이 뚫어져 있어서 가치가 대중없이 다양한 책들을 하여간 날름날름 받아먹었기 때문이었다.
부활절 예배 후에는 친교의 시간이 지하 홀에서 있었으나 두 사람은 시골집으로 내려갈 겸해서 그냥 주차장 쪽으로 한참을 걸어갔는데 이옥분 선생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보, 아까는 미안했어요. 당신이 내 책은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여러 가지 지나 간 생각이 났거든요. 하여간 참 잘 되었어요. 축하드려요."
"아니야, 내가 당신 감정을 살피지 못하고 너무 들떴지. 어쨌거나 부활절 선물로는 최고인가 하네."
정년을 목전에 두고 사실 양 교수는 최근 매우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IMF 이래로 명퇴다 뭐다해서 벌써 백수가 된지 10년에 가까운 경우들도 많았지만 정년이라는 것이 이렇게 심리적 타격을 준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여보,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요. 며칠 전에 당신이 서가에 있는 책들 중에서 두껍고 커버 케이스가 있는 것들은 은근슬쩍 빼들고서 흔들어 보던데 비자금 감추어 둔 데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호호호."
그러고 보니 이옥분 선생이 아까 과민 반응을 보인 원인이 복합적이었나---, 양 교수의 생각이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억울하게! 지금 이 전자 시대에 누가 그런 식으로 낭만적 비자금 창고를 운영할까. 하하하!"
양 교수의 반응이 조금 컸고 또 부정이든 긍정이든 방법론을 거론하는 걸로 보아서는 그런 혐의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모양 같았다.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도 한마디 합시다. 당신이 시집을 태울 때는 당신을 짝사랑하던 이 선생의 러브 레터가 불쑥 튀어 나왔잖아."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던가. 양 교수가 지나간 에피소드를 무기로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거야 당신이 그때 콜롬보 계획으로 뉴질랜드에 가서 일 년을 계시면서 어술라라던가 독일계 연구원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있고부터 나도 절망 속에서 위안을 찾았지요, 뭐. 시인인 이민형 선생이 참으로 신사였어요. 지금 당신이 없었던 그 때를 무사히 보낸 생각을 하면 아찔하네요. 다 당신 책임이예요!"
양 교수 부부와 이 선생은 모두 공주 사범학교 출신이었다. 그때는 고등학교 과정인 사범학교만 나오면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왔다. 어려운 시절이어서 머리 좋은 중학생들이 선망하던 과정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대전에서 야간 대학을 나왔고 양 교수는 아내인 이옥분 선생의 헌신적 노력으로 일본 유학을 가서 지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하고 돌아왔다.
이민형 선생은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다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는데 그 후 소식은 끊어졌다. 동기회 명부에서도 항상 주소 불명이었다.
"어슬라 하고는 정말 완전히 끝이 난 거지요?"
이옥분 교장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듯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게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잖소. 그때만 해도 뉴질랜드를 신서란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오."
양한철 교수는 속으로 찔끔했으나 태연하게 아내의 힐문 성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사실 어술라와는 뉴질랜드에서 헤어지고 귀국한 이래로 두어 차례 편지가 교환되다가 끊어지고 말았다.
"아, 아니구나. 편지만 온 게 아니었어. 나중 어느 날인가 사진이 왔었지. 금발 소녀의 사진이!"
양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아내가 옆에 있고 없고 간에 그런 말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결코 입 밖에 낼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그때의 일들을 자신에게 소근거렸다.
"그래, 그래. 처음에는 편지가 조금 오가다가 끊어졌어. 그런데 몇 해만이던가, 그래, 사진이 왔었지, 금발 소녀의---."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게도 국토지리원의 책임자도 지냈고 지리학회의 회장도 역임하면서 학자의 길을 순탄하게 지내왔지만 내면적으로는 뉴질랜드에서의 일을 기억에서 소멸시키느라 힘들게 한 세대를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공직을 떠나는 시점에서 다른 일도 아니고 영구 보존 장서의 문제가 나오면서 그렇게 오래토록 망각의 창고에 가두어 놓고자 빗장을 채워 놓았던 일들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람도 없이 한순간에 그의 의식계로 떠올라 버린 것이었다.
그가 그때의 일을 죽어라고 잊으려 하며 살아 온 것은 무슨 공직자의 몸조심 같은 저차원의 발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술라라는 여인에 대한 평가가 "버린 여인"이니 "잊혀진 여인"이니 하는 식의 맥락이라면 더더구나 천부당만부당의 말씀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 때의 일이 자신의 의식계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참으로 오랜만에 당시의 정황과 그 때 이미 정리해 놓았던 논리를 반추해 보았다. 잊기로 해서 그랬지 망각이라는 보자기를 걷어치우자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던 당시의 인과율과 논리의 틀은 금방 다시 정연하게 머릿속에 제기되는 터였다.
따지고 보면 사실 아내와 이민형 시인이 가깝게 지낸 전말도 아내의 말과는 달리 본말이 전도되어 있었음을 양 교수는 연대와 시기별로도 환히 꿸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아내는 일의 선후를 남편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그녀가 이민형 시인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으며 두 사람이 한동안이나마 가깝게 지낸 그 기간 동안에도 항상 아내가 주도적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시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전후의 사정이 좁은 바닥에서 양 교수의 오관에 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내는 남편이 일본 유학을 하던 때만 하여도 교사직이 천직인양 열심히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도 물론 학비와 생활비의 거의 전부를 일본 문부성 장학금으로 충당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였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 자리를 잡을 때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내는 어느새 등단 시인이 되어있었다.
"당신만 발전을 하는데---. 나도 문학 소녀의 꿈을 한번 실현하고자 안달하였지요, 뭐---."
그녀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을 하게 된 문예지, "시문학"의 편집 자문위원이 사범학교 때부터 세 사람이 친하게 지낸 바로 그 이민형 선생이었다.
그는 실력과 문운이 모두 좋아서 이미 중견 시인으로 경향의 문단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옥분 시인은 문운이 그리 밝지 못하였다. 신인상을 받고 한참 작품 활동에 몰두해야할 즈음에 아이를 가졌고 이어서 출산과 양육의 힘든 일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이 그녀와 이민형 시인의 관계를 적절하게 조절하였고 또한 그녀의 작품 활동이 변변치 못한 데에 큰 변명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 건 다행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거리 조정에는 이민형 시인의 인품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세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에 양 교수는 콜롬보 계획을 지망하였다. 유엔 기금으로 뉴질랜드에서 연구 년을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여러 가지 점을 감안해서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을 떠나있을 생각을 했는데, 그녀는 함께 가지 않았다. 공립학교에서의 휴직의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승진 연수의 기회가 왔는데 버릴 수가 없다는 아내의 말을 그는 핑계로 여겼다. 그의 아내는 두 번의 방학 동안에도 뉴질랜드로 짧게 한번 밖에 찾아오지 않았다. 방학 중의 연수 탓이라고 하였다.
그 동안에 그녀와 이민형 선생은 공동으로 시집을 출판하였다. 장정이 아름다웠으나 내용은 투박하였다. 특히 이민형 시인과 이옥분 시인의 시적 수준 차이가 너무나 큰 괴리를 이루어서 전체적 조화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이 시집의 재고들도 농가 주택에서 모두 불태워졌는데 그 책 중의 하나에서 이민형 시인의 연서 비슷한 게 튀어나오기도 한 것이다.
불을 지피다가 우연히 튀어나온 그 편지를 "연서"라고 우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옥분 선생이었고 양 교수도 마침내는 동의를 해 주었는데 내용은 보잘 것이 없었다. 서정도 낭만도 결여된 러브 레터 속에서 이민형 시인은 뚱딴지 같이 두 사람 사이의 감미로웠던 키스의 추억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문장을 삽입하여두었다. 항상 고아한 시인의 세계를 고품격 향수처럼 뿜어내며 그는 우정과 인품의 화신으로 부부 사이에 군림해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 쫓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뉴질랜드의 연구소 연구실과 독신자 숙소의 바로 옆 방에 어술라가 배정되어 들어온 것은 풍수지리상의 숙명에 해당되었다. 그녀가 그의 옆으로 그렇게 오지 않았더라면 영어에도 서툴고 또 서구 문화에 그때만 해도 생소한 편이었던 그가 그녀와 인사말이나마 제대로 나누었을는지는 심히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무슨 천지간의 조화인지 풍수지리상의 "근린 필통"의 원리에 따라 두 사람은 이웃사촌의 정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몸이 통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어술라는 인문 지리학을 전공한 독신녀로서, 학문적으로는 도시의 형성과 구조에 관한 빼어난 분석력과 직관을 갖고 있었는데 조금 지내고 보니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지구의 정 반대편으로 날라 와서 우울증을 겪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양한철 교수도 두고 온 만삭의 아내를 생각하며 절박한 척 부르짖었으나 사실은 여유가 있어도 한참 있는 소리였고 어술라야 말로 정말 절박한 심인성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어술라의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 2차대전의 말기에 있었던 연합군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몰사를 했다. 드레스덴이 종전 후에 동독에 속하여서 서방 세계에 그 참화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이 많았지만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였지만 그 공습사건은 참혹, 그 자체였다. 전투원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가있는 사이에 후방에 있는 노인들과 비전투원인 여인들, 어린이들을 모두 합하여서 20만명 이상이 하루 저녁의 연합군 공습으로 모두 불타죽은 참화가 바로 드레스덴 공습 사건이었다.
당시 어술라는 아직 강보에 쌓인 유아였는데 나이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전장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와 간호사로 병원 근무를 하는 어머니 등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날, 공습이 시작되기 전날 밤에 이모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만 빼았다시피 안고서 이웃 동네로 미리 피신을 하는 통에 두 사람만 겨우 살아남았다.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은 사흘 밤낮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나고 이모는 어술라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어술라는 캐나디언이 되었고 그 덕분에 콜롬보 계획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모, 왜 나만 갑자기 데리고 피신을 했어요?"
이런 질문을 그녀는 이모가 임파선 암으로 중년의 나이에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무슨 신비한 계시 같은 것이 그 전 날 밤 꿈에 내 마음을 훑어지나갔어. 그 길로 너를 데리고 이웃 동네 들판으로 내달렸지."
이모의 답변이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어술라는 그 말을 자꾸만 듣고 싶어 했다. 혼자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이모의 그 거짓말로 때우고 싶었다는 것이다. 죄책감이란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속죄라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심리상태가 그러하였다.
이모는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여서 공습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나중의 활동을 위하여 가족 모두를 표 나게 피신시킬 수는 없었다는 고백을 임종 때에 했는데, 어술라는 이모의 그 유언이 되려 거짓말처럼 들렸다고 한다.
혼자가 된 어술라는 이모가 살아생전에 거짓 반, 진실 반으로 자주 되뇌던 그 신비한 감정, 비의(秘意)에 가득한 느낌을 유산처럼 마음에 간직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밀교에 심취하였고 깊은 연구도 하였다. 특별히 그녀는 아프리카의 부두(Voodoo)교 의식,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이나 호주의 애보리진(Aborigin) 흑인 종족들의 원시 종교를 연구 프로젝트로 내세워서 콜롬보 계획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캐나다는 원래 이 계획의 시혜국가였고 수혜국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가였지만 그녀는 특이한 연구 주제로 인하여 다국적 연구 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 사는 삼십대 중반의 두 연구원은 정말 "근린필통(近隣必通)"의 원리가 아니더라도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들은 특별히 바다낚시를 좋아하였다. 그녀와 자주 다닌 바다낚시에서 그는 낚시의 손 맛 논쟁을 몇 차례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릴낚시 대에 붙은 줄을 바다에 던져 넣고는 이 줄을 통하여 작은 손맛이라도 감지되면 무조건 낚시 대를 윗 쪽으로 확 쳐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힘껏 끌어당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 손맛은 무시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큰 손맛이 오면 그제서야 좌우측 어느 한쪽으로 순간적인 베팅을 하여 그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려서 비스듬히 당겨낸다고 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당기기를 하는 경우 입질한 물고기 중의 절반은 놓치지만 그건 모두 잔챙이에 불과하고 큰 물고기만 건져 올리게 되는데, 절반을 놓치면서도 고독하게 또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마침내 대어를 잡아 올릴 때의 손맛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강조하였다.
작은 손맛에는 스케일이 작은 물고기, 약삭빠른 물고기, 비겁한 물고기들이 덤비는 꼴들이라서 상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큰 손 맛의 끝자락이야말로 스케일이 크거나 용감한 녀석들과 한 판 승부를 거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말하자면 평생에 대어를 한마리만 낚으면 나머지여생은 포기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종의 기인이었다.
그가 그해 일 년 간 마침내 사랑의 이야기를 일상 가운데에서 실천적으로 행하게 된 데에는 외로움과 우울증이 최대의 매개 변수로 작용한 탓이 있었겠지만 그녀의 그런 성격도 거대 서사 담론의 역할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을 건축 구조물에 빗대자면 그녀의 그런 성격은 대들보이자 또한 마감재였을 것이다.
그도 물론 주춧돌을 놓기는 하였다.
그는 한국 전란 후에 씨가 말라버려서 몇명 남아있지 않던 풍수의 아들이었다. 이름을 별로 팔고 다니지 않던 풍수를 아비로 둔 죄로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그나마 가장은 모습도 잘 나타내지 않았다. 맨 날 산야로 돌아다니느라고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던 해에 그 아비는 객사를 하고 말았다. 아들인 양한철이 타지의 여관에서 작고한 아버지로부터 수습한 것이라고는 패철, 혹은 나경이라고 하는, 지남철이 달린 방위 놓는 도구와 몇 권의 기서(奇書)와 비서(秘書)가 전부였다.
그 책들은 모두 한자로 쓰여 있었고 때로 이상한 문자, 혹은 기호들이 가득하여서 전혀 요령부득이었으나 그는 작고한 아버지의 몸에 손을 댄 그 순간에 강신(降神)의 기(氣)를 받아서 이후 풍수 관련이라면 자신도 조금은 도가 통했다고 한동안 뻥을 치고 다녔다. 그가 그런 사기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작고한 아버지의 생애가 너무나 억울하고 애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야간대학에서 토목과를 다녔는데 지리학도 부전공으로하였고 일본 문부성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교도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는 자연지리를 전공하였다.
그때도 풍수지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컸고 일본의 풍수관련 기서(奇書)들도 다수 입수하여서 그는 그 방면의 권위자를 자처하였으나 예전처럼 뻥이라고 대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접신(接神)의 체험을 강조하며 풍수지리를 내세우는 사실이 한동안 종교적으로나 국립대학 교수로서의 체통에 일부 저촉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가 워낙 과학적 체계를 내세우면서 미신이나 기복 신앙적인 측면을 공격하였기에 어려운 국면은 다 피해나갔다. 그는 도시 계획이나 산업 입지, 공업단지 심의 등과 같은 정부 발주의 프로젝트에도 관여하여 돈도 좀 벌었는데 이런 일들은 물론 나중에 얻은 과실이었다.
어술라와 연결이 끊어진 원인이니 책임이니 하는 걸 따지자면 조금 복잡한 궤적이 전제되었다.
일 년은 짧았다.
그것도 처음 얼마간의 탐색 과정이랄까 그런 시간을 빼고 보니 더욱 그러하였다. 하여간 그가 귀국할 때 쯤, 어술라는 연구 기간 연장이 받아들여져서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헤어지는 날짜가 꼬박 꼬박 닥아 올 때쯤이 되자 어술라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잠자리에서는 더욱 치열해진 것과 연구소에서는 양 교수에 대한 무표정이 그것이었다. 특히 잠자리에서도 바다낚시의 주장대로 작은 희열은 그냥 보내다가 큰 것으로 마지막 빅 원에서 온갖 열락의 고함을 아끼지 않던 그녀가 이제는 작은 자극에도 일일이 반응을 하며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의 등허리에 상처를 내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울었다. 하긴 양 교수의 초조해진 일상에도 그와 비슷한 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도 심한 양극단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헤어지는 날은 닥쳐와서 그는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왔고 그녀는 연구소를 대표하여 공항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귀국 후에 그는 몇 차례 부지런히 편지를 띄었으나 답신은 없었다. 강의 준비와 끊어졌던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을 복원하기가 그리 쉽고 한가롭지는 않았으나 그는 정말 열심히 편지를 썼다. 불임의 공포까지 겪은 끝에 아내는 그가 출국하기 전에 이미 만삭이었는데 이제는 공주를 출산하여서 전에 없이 집안에 화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가 어술라에게 열심히 편지를 쓴 것은 아직도 덜 연소된 미해결의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비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선언하겠다는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더욱이 그녀는 세상을 용기와 비겁이라는 이항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답신은 종내 없었고 마침내 그의 편지는 반신이 되었다. 안타까움 반, 안도하는 마음 반쯤이 되면서 그도 편지 쓰기를 그쳤다. 아니, 그냥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연구소에 그녀의 행방을 문의하는 절차까지 밟았다. 거기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은 연구소와의 계약이 끝나서 캐나다로 돌아갔으며 우편서신에 관한 포워딩(forwarding)은 사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금발의 소녀 사진이 날라 왔다. 봉투에 발신인은 없었으나 주소는 캐나다에서 개인이 개설한 CPO로 되어있었다. 내용물이라고는 달랑 금발 소녀의 사진뿐이었다. 그는 봉투를 샅샅이 뒤졌으나 편지는커녕 보낸 사진에 짧은 캡션도 붙이지 않았다. 양 교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헤어지던 해에 아기가 태어났다면 그만할 정도의 인물상이었다.
그는 도저히 답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다낚시 때의 습성대로 릴을 금방 감지 않고 더 큰 손맛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의도치 않다가 어떤 변화가 생겨서 그에게 사진을 보냈는지 그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진이 오기 얼마전에는 친구이자 시인인 이민형 선생이 그와 아내인 이옥분 선생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히고는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버린 일도 있었다. 떠나기 며칠 전, 술이 과해서 그랬는지 아니 작심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지 그는 자정 무렵 양 교수 집을 찾아와서 야료를 부렸다.
"치사해서 못살겠어. 이 나라 꼴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깨 쏟아지게 사는 꼴이 더 심사를 사납게 해. 그런 마음을 먹게 되는 내가 또 더 치사하게 느껴지고---."
이옥분 선생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였다. 양 교수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렇게 낙담하는 표정을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본적이 없었다. 교수인 남편의 안락한 그늘 아래에서, 또 이름난 시인 한 사람을 문학적 동반자랄까, 친구이자 동지로 파악하면서 아무 일도 없이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사실은 언제라도 무너질 가교에 불과했구나---, 그런 성찰이 하얗게 질린 그녀에게 밀어닥친 모양이었다.
그는 떠나갔고 소식이 끊어졌으며 그 얼마 후에 양 교수는 그 금발 소녀의 사진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시련 속에서 침묵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말이나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소녀의 사진만은 고이 책갈피에 넣어두었다. 어떤 책을 고를까 하다가 그는 박사 과정 때의 일본인 지도교수가 물려준 책 속에 그 사진을 넣어두었다. 그 지도교수는 또 자기의 지도교수로 부터 그 책을 받아서 보관해 오다가 양 교수에게 물려주었으니 학문 3대의 손때가 거기 묻어있는 셈이었다.
"여보, 책에 얽힌 이야기가 참 많지요---?"
"어? 응, 그렇지, 뭐---."
그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어 차에 시동을 걸다가 아내의 말을 듣고 얼떨결에 조금 막연한 답변을 했다. 아내와 말없이 걸어오면서 과거의 회상이 너무 깊었나 보았다.
"책이 곧 당신 학교 도서관으로 시집을 가네요. 무슨 비자금 같은걸 넣어둔 책은 정말 따로 없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신처럼 러브 레터나 책갈피에 넣어두었다가 그게 연서라고 황홀해 하는 그런 건 없어요."
"여보, 좀 진정하세요. 지금 당신과 무얼 다투자고 이러는 건 아니예요. 즐거운 이야기나 해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닌 야간 대학이 국립 한밭 대학에 흡수된 건 참 다행이었네요. 그래서 당신 책도 모교가 된 국립대학에서 영구 소장 기회까지 얻게 되었구요."
"서정 시를 쓰시는 여류 시인께서 세상 물정을 어찌 그리 공리적으로만 보시오, 하하하. 하긴 그래요. 5-16 군사정부의 공과가 두루 많았지만 당시 대학 통폐합은 잘한 것이었지. 나중에는 결국 다 풀어졌지만---."
"정말 비자금 감추어 둔 거 없어요?"
"없다니깐---, 그리고 있어도 그런 걸로 당신에게 꿀리지는 않아요."
"그럼 꿀리는 게 따로 있군요---?"
"당신부터 내게 고백 성사하시오. 그럼 나도 다 털어 놓을테니---."
애초에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책 이야기가 그의 잊고자 했던 과거를 이끌고 나오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그의 입술을 타고 술술 흘러나왔다. 하긴 그동안 참아왔던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들어온 아내에 관한 좁은 바닥의 소문들이 그동안 조금씩 발효해 오다가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의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도 하였다.
이옥분 선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바튼 기침을 하였다. 양 교수가 옆으로 힐끗 보니 그녀의 얼굴이 그 예전 어느 때처럼 창백하게 바래어있었다.
"여보, 후회할 일이면 말하지 말아요."
그는 걱정이 되어서 아내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아녜요. 결정적인 흠이나 고백할 잘못은 저지른 게 없지요. 하지만 조금 마음속에 찝찝하게 걸리는 건 있어요. 이제 와서 털어놓는다고 당신이 날 내쫓을 것도 아니고, 간직하기 보다는 고백하는 게 낫겠어요, 호호호."
그녀가 조금 안색이 돌아오며 웃었다.
"말씀해 보시오. 우리 교장 선생님."
그가 아내에게 말문을 터 주었다.
"제가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솔직히 이민형 선생하고 더 가까웠잖아요. 그분의 시가 정말 좋았어요. 그때 이미 학원이니 학생계니 하는 고등학생 문예지에 그 사람의 시가 장원으로 뽑혀서 활자화 되어 나오고---. 그래서 요즘 말로 하면 이민형 선생은 킹카였고 나는 또 여학생 부장인가를 해서 자연스레 가까웠지요."
"그래, 그래. 당신이 좀 여우라야 말이지. 그때는 이 선생한테 정을 주다가 내가 유학이다, 문부성 장학생이다 뭐다 떠들썩하니까 얼른 내게로 와서 결혼 작전을 폈지---. 내가 실은 다 알았지만 당신이 워낙 미녀, 퀸카라서 그냥 속아준 것이었지."
"남편감으로는 처음부터 당신이 훨씬 더 좋았어요. 솔직히 고백하오니 다른 말씀은 마시옵고 제 이야기나 좀 잘 들어주세요. 저와 이 선생하고는 추억이 많았어요. 아슬아슬한 추억까지 말이지요. 기분 나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연들을 사진으로도 많이 기록해 남겼어요. 그걸 이 선생 시가 나온 학원 잡지 몇 권의 책갈피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답니다. 이 선생의 편지도 함께---. 그때는 그 사람이 편지도 참 잘 썼어요. 청마 선생이 우체국 창가에서 쓴 것만은 못하였겠지만 말예요, 호호호. 지난번 불태우다 떨어뜨린 편지는 이 선생이 한참 질투심에 들떠서, 당신을 샘내면서 작위적으로 쓴 것이었지요. 어쩌다가 당신이 보면 약 오르라고 쓴 것이니 이미 순수시대를 지난 다음의 무가치한 것이었어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고 그를 쳐다보았다.
"용케도 감추어두었다가 적시에 적소에서 들킨 셈이 되었네. 그러고 보면 일부러 떨어뜨렸는지, 원---."
"아이구, 내가 미쳤게요. 하여간 지난번에 보신 그 엉터리 편지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이 순정한 편지들을 자작시와 함께 많이 보냈구요, 저는 또 잘 보관해 왔지요. 그게 태우지 않은 학원 잡지 서너 권에 지금 보존되고 있다니까요---. 지금에라도 태울까요?"
"그런 순정한 시절의 기록을 왜 태워---. 내가 젊을 때라면 욱하는 기분으로 찢어버리라고도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생을 정리할 때가 아니겠소. 간직하시구려. 아, 내가 지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생각들을 조금 정리해 봅시다."
그는 차를 천천히 운전해가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엇다.
"내가 도서관에 보낼 책들 중에는 진짜 보물급들이 꽤 많어---. 특히 고지도들은 값을 매길 수도 없고 역사적 자료로도 대단하지. 그게 책처럼 접어서 보관하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요. 범례라든가 지역별로 상세 지도를 다시 만들어 합철한 것은 부피만 해도 보통의 책 보다 더 두껍고 아예 표지도 하드 카버로 해 놓았다니까---. 그런가하면 내가 일본 교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에 지도 교수께서 내게 주셨거나, 그 후 그 분이 정년퇴임을 하시면서 물려주신 책들 중에도 진짜 희귀하거나 귀중한 자료들이 많아요. 예컨대 중국 동북지방의 만주국에 관한 연구와 그 강역에 관한 지도를 함께 모아 엮은 책도 인상에 남는데 그가 주장한 현상적 연구에 따르면 만주국은 예전 우리의 고구려 국과 여러모로 꼭 같더라구. 그분이 주신 책에는 그네들 표현대로 조선 근대화 계획에 관한 연구서도 많았지. 부산 지리지라는 건 부산의 개발을 위한 기초 자료로서 항구 조성에 관한 상세 계획서였는데 지도는 모두 컬러로 인쇄했더군. 그런데 그 인쇄 연도가 아주 오래되어서 소화 시대도 아니고 대정 시대의 인쇄물이었는데 통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더라구. 아,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연구서적도 있었는데 작가의 주장을 따라가 보니 그 위치가 여러 차례 편의적으로 옮겨진 과정이 명증되었더라구. 청국 관헌이 원래의 위치에서 옯겨 버린 것을 일제가 처음에는 도루 원위치 시켰다가 나중에 만주국을 세울 때는 다시 또 만주국에 유리하게 옮겼다는 것을 연구해 놓은 것이었어요. 이 연구서로 그 학자는 나중에 일본에서 큰 고초를 당했다는군---. 내 지도 교수가 또 자신의 지도 교수로 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책도 두 권이나 내게 주셨는데 그 중 하나에는 쓰지 않은 단성사 티켓이 두 장 책갈피에 들어있더군. 식민지 경성 제국 대학의 교수를 지낸 분이었던 모양인데 영화 티켓 두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결국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부분이겠지."
양 교수는 시골 국도의 분기점에 있는 붉은 신호등을 받으며 갖고 온 생수로 목을 축였다.
"저런!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란---."
단성사 티켓 이야기가 나오자 이옥분 선생이 조금 발끈하였다.
"글쎄 당신의 상상력의 세계가 고작 발끈하는 수준이니 당신의 의식계도 한심하구려."
"미안해요. 여자란 그렇게 반응해야 정상적이란 소릴 들으니 한번 추임새를 넣은 걸로 여기세요."
"솔직해서 고맙구려, 얼쑤~. 하하하."
양 교수도 가급적이면 분위기를 느긋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물려받은 두 권 중, 또 한 권은요?"
"그건 천문과 풍수지리와 선(禪)을 다룬 비의에 가득한 책이었지. 그런데 그런 내용도 신비로웠지만 그 책갈피에 옛 우표가 붙은 편지가 봉투째 들어있었는데 내용이 애절한 것이었어요. 조선 총독부 관리의 아내로 들어간 제자가 그 책의 저자인 스승과 깊이 사랑을 했는데 이제 그 관리가 경성부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게 되면서 서로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과 기약 없는 재회를 다짐하는 그런 내용이었다오. 일본말도 그 때 이래로 많이 변천사를 겪었지만 더듬거리며 지금 읽어보아도 가슴이 찡하더군."
"아니, 여보! 학문적 서적이야 당신의 고유한 세계라 치더라도 방금 그런 재미있는 사연이야 제게도 미리 좀 알려주실 수 있었잖아요. 도대체 당신은 나를 제대로 사람대접도 하지 않고 살아오셨어요."
"미안하오. 미안한건 사실이지만 이런 내용을 당신에게 말하기는 싫었지. 당신의 인생에는 항상 이민형 시인이라는 존재가 항상 이보다도 더 깊은 사연으로 인각되어 있을 거야---, 그런 오기가 내겐 있었어. 이런 정도의 감성 세계는 막말로 새 발의 피라는 고까운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또 이제 이 선생이 떠나서 당신 가슴의 풍파도 가라앉은 형편에 또 다시 이런 센티멘털 스토리로 물결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하는 나 나름의 깊은 분별과 지략도 작용하였다오."
"아이구, 참! 고맙기도 하셔라."
"뿐만 아니라 당신은 일본어를 잘 모르니까 일본어로 된 이 고서적을 내게 필요한 도구로 쓰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소. 그러니까 당신이 관심도 없고 손도 대지 않을 책으로서의 도구로---."
"도구요?"
"그래요. 내가 다 이야기할게. 당신은 이민형 시인이 보낸 만지장서의 연서와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세레나데를 담은 사진까지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도 풍문으로 알고 있는 어술라와의 사이에 오간 편지도 한장 없고 또 몇 장의 기념이 될 사진은 귀국할 때에 모두 버리고 왔지. 그러던 어느 날, 한 참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어술라에게서 한통의 편지가 왔는데 내용이라고는 정말 아무 내용도 없이 소녀의 사진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다오."
"맙소사! 내용이 없다라구요? 그만한 내용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백 마디 말이나 글보다 더한 내용이네요.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법적인 분쟁 같은 건 없었어요?"
"여보, 아무리 나이가 들어 고목나무가 되었다 칩시다. 문학한다는 여류시인의 반응이 어쩌면 그렇소?"
"당신이야말로 허구헌 날 현실 세계는 무시하고 살아온 책상물림에 딸깍발이가 아니던가요?
여기 유성구의 새 아파트와 이쪽 농가주택을 장만한 것도 다 제 현실감각이었어요. 아니, 그뿐이 아니지요. 일본 유학은 또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 당신 말이 다 옳아요. 내가 결혼 하나는 참 잘했어. 우리 딸을 캐나다로 조기유학 시킨 것도 다 당신의 아이디어였고 지출도 당신 월급에서 감당하였지."
"이런, 또 갑자기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요."
"내가 그 소녀의 사진을 그 책갈피에 넣어서 간직해 오고 있다오."
"뭐라구요? 정말 기분 나뻐 죽겠어요. 사진은 찢어버리세요. 그리고 그 책은 오늘 저녁에 가서 당장 태워버릴 거예요."
"당신 기분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그 희귀본 책까지 태워버리겠다는 심사는 너무 고약하네."
"내 심사가 고약하다구요? 아이구,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군요. 나 여기 내려주세요, 당장!"
"여보, 여기에서 내려드릴 수는 없고 일단 우리 전원주택으로 갑시다. 가서 찢을 건 찢고, 하여간 태워버릴 우선순위나 정합시다. 당신이 이민형 시인에게서 받은 만지장서 연서도 태우고 그의 시가 들어있는, 아니 당신들의 사진이 들어있는 학원, 학생계 잡지도 태우고 이 선생이 떠나면서 당신에게 넘겨준 폐허, 개벽, 장미촌, 현대문학 창간호도 태우고---."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책을 태우려면 다 태우지 그런 추억이 남은 것들은 왜 뒤로 빼돌리고 이중 잣대, 이중 플레이를 했오? 당신과 나의 이 좁은 공간에서 내가 아무리 책상물림에 딸각발이라 한들 당신의 그 일거수일투족까지 모르고 지냈을 성 싶소? 오늘 다 태웁시다. 거기 당신 화장대 뒤에 숨겨놓은 이민형 선생의 브라질에서 온 편지와 그의 시가 실린 상파울로 교포 문학지도 다 태웁시다. 한 가지 미리 밝혀둘 것은 내가 당신에게 온 편지를 훔쳐 읽지는 않았소. 우연히 무얼 찾다가 겉만 보게 된 것이오."
이옥분 선생의 얼굴이 새하얗게 다시 질렸다. 그녀는 갑자기 울려고 하는 모양이었으나 꺼이꺼이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낼뿐, 정작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제발 그렇게 너무 격하지는 마시게. 나도 울고 싶도록 감상이 많다오. 이번 경우 때문만이 아니라 항상 과거라는 족쇄가 잘 가꾸어 온 생애의 끝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은걸 절제하며 자기관리를 해왔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이렇게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간다면 참으로 인생 헛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 인생의 패자가 어디 따로 있나요. 생각해 봅시다. 어술라가 조울증에 빠진건 그 이모의 탓이었소.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레지스탕스, 그 중에서도 첩보를 빼내는 스파이노릇을 하면서 나중의 활동에 지장이 올까봐 제 가족 건사도 제대로 못하고 겨우 조카 하나만 빼내온 그 이모가 조울증에 빠진건 당연한 귀결일텐데, 그게 천형처럼 어술라에게로 고스란히 감정 이입이 되었다는구만. 무슨 생물학적 유전처럼 말이오. 정신과 의사의 말이래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된 어술라의 슬하에서 또 하나의 소녀가 성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로지 여기 내 울타리 안 쪽 만을 보호하기 위하여서 시치미를 떼고 살아온 자가 바로 나란 말이오."
"궤변 같아요. 내게서 위안이나 칭찬을 기대해요? 그리고 어쩌면 그 소녀 사진은 어술라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유년시절 자기 사진인지도 몰라요. 조울증 환자의 이상심리가 그런 식으로 모태 회귀 본능이 되어 나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뭘 좀 아는 체 한다고 생각지는 말아요. 이게 다 교감, 교장 연수하면서 들은 교육 심리학 풍월이라요."
이옥분 선생이 울음을 포기하고 현상을 유리한 국면으로 타개하면서 다시 달려들 태세를 갖추려고 하였다.
"여보, 싸우지 말자고 했지요. 하긴 당신의 말이 크게 위안도 되지만 지금은 누가 이기고 지거나, 칭찬이나 비난 받을 근거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오. 빨리 결론으로 들어가리다. 내가 평생의 소원이 만권당(萬券堂)을 지어 오거서(五車書)로 채우고 가는 것이었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걸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다행하게도 모교 도서관의 별실에서 그 꿈을 흉내는 내는가 보오. 지금 내가 그곳으로 기증하는 도서에 나와 당신이 갖고 있는 이 모든 자료들을 다 넣어서 보냅시다. '영원히'라던가, '영구적'이라던가, 하는 말의 현실적 한계를 내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인식력이 상상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이 책과 자료들이 '영구 소장 도서'로서 불멸의 생명력을 갖게 될 것 같소. 우리 대학 도서관이 참으로 훌륭한 기획과 발상을 했어요. 내가 구한 귀하거나 또는 일반적인 모든 책들뿐만 아니라 지도교수로 배출해낸 제자들의 석 박사 학위 논문, 내가 논문 작성을 위하여 준비했던 카드와 기초 자료 일체, 심지어 해적판이라는 혐의를 쓸 수도 있는 복사본, 또 그럴 마음만 있다면 내 사적인 일기장, 공식적인 앨범은 물론이려니와 내 사사로운 앨범까지도 기증만 하면 모두 소장해 주겠다니 이렇게 고맙고 의미심장할 데가 어디 있겠오. 아무래도 수집과 전시와 보존의 목적이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간 인간들의 모습을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서 보여주자는 깊고 높은 뜻이 발견되는 대목이란 말이오. 그 자료 속에 아직도 태우다 남은 당신이 보존해온 모든 공식적인 보물, 그리고 그보다 몇 십 배 더 가치가 있을 성 싶은 당신의 사적인 보물 보따리도 모두 넣어서 내 문고 코너에 영구 보존합시다---. 저 빛나는 이민형 시인의 작품과 자료들까지 모두."
"그런 내용을 왜 이제야 알려줘요? 엉엉---."
그녀의 입, 아니 목에서 그제서야 제대로 울음이 생성되어 나왔다.
"당신도 이제 와서야 사정을 다 털어놓았으니 나도 그걸 받아들여 짧은 시간이나마 고통스럽게 삭이고 타협하여 방금 내린 결정이 아니겠소. 그건 그렇고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아호 받은 게 더러 있잖소. 그걸 넣어서 영구 소장 문고의 이름을 지으라는데 무어라고 할까? 당신이 한번 결정해 주시지---."
"제가 뭘 알아요. 당신이 알아서 다 하셔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얼른 양미간을 좁히며 무얼로 고를까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어느새 그들의 농가주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끝)
작가 이력
건국대 명예교수(부총장 역임), 미국 소설학회 고문(전 회장), 헤밍웨이 문학상 수상,
<어네스트 헤밍웨이, 작가 작품세계>로 학술 진흥재단 출판도서 상 수상,
2009 계간 "문학마을" 소설 대상 수상, 경맥 문학회 회장,
세계 한인 작가 연합 이사, 소설집 3권, 평론집 1권, 기타 학술서 번역서 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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