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지나갔다.
예전 기억으로는 설날이 무척 추웠던 일화와 더불어
때로는 더워서 딱치치기를 하며 윗통을 벗었던 체험이 엇갈린다.
올해는 아직 북한강의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설"의 어원은 "낯설다"와 같다고 한다.
묵은 과거를 버리고 낯선 미래를 대면하는 날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켜켜로 쌓인 묵은 해 중에서는
지나간 한해만 묵은해로 여기고 싶다.
과거는 그저 몽땅 낱장 하나로만 여기고 싶다.
낯선 앞날은 강江의 시원을 좇는 탐구이고 싶다.
결기 어린 "결의"나 "레절루션"은 젊은날의 추억으로 맡기고
새해에는 강의 상류로, 좁아지는 수로로 천천히 걸어올라가고 싶다.
가끔 연기 오르는 화덕이 보이면 시간을 재지않고 손을 부비며 앉아있으리
날마다 설날/ 김이듬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
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 2001년 계간 < 포에지 > 등단
얼음의 온도 /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너에게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 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미자/ 김도언
미자네 집 거실 바닥엔 북극곰의 가죽이 깔려 있었어요. 우리는 그 구름 같
은 풍요 위에서 섹스를 했지요. 옆에선 이제 막 백일이 지난 그녀의 아기가
옹알이를 하고 있었고요. 미자와 나는 옹알이에 맞춰 리드미컬한 섹스를 했
어요. 우리에겐 결핍만이 부족했어요. 야구선수인 미자의 남편은 부산 사직
구장에서 열린 원정경기에 7번 타자로 출장중이었어요. 그는 세 번째 타석까
지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었죠. 미자는 그날따라 미친 듯이 허리를 돌렸는데
요. 멀미가 날 정도였지요. 나는 미자에게 목을 졸라 달라고 부탁했어요. 부
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는지도 모라요. 미친 놈, 미자가 내 목을 두 손으로 감
쌌죠. 순간, 껍질로만 남은 북극곰의 귀에 연어가 물결을 털며 올라오는 소리
가 들렸어요. 눈에 힘을 주며 어깨에 쌓인 눈을 터는 곰. 연어의 붉은 살점이
허공에 뿌려졌을 때 나는 절정에 다다랐고 그녀의 배꼽 위에 사정을 했어요.
그리고 핸드폰이 울렸죠. 젠장, 어머니였어요. 두 번의 실연 끝에 정신이 이
상해진 어머니는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벽을 향해 던져버렸다고 말했죠.
우리는 곰의 말라비틀어진 비애 위에서 서러운 섹스를 했어요. 야구경기에
출전중인 미자의 남편은 네 번째 타석에서 겨우 안타를 쳤죠. 그는 이제 아기
를 보러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 계간 < 시와 사상 > 2012년 겨울호 발표
1999년 < 한국일보 > 신춘문예 등단
통속에서 배우다2/ 김인육
첫사랑
첫사랑은 무조건 아프다
잘살고 있으면......배가 아프고
못살고 있으면......가슴이 아프고
같이 살고자 하면......머리가 아프다!
고속도로 휴게소
환장할 아랫배를 틀어쥐고 끙끙대다가
공중 화장실 벽에 적힌 낙서를 읽는다
히야~, 명언이다/ 웃음꽃이 팝콘처럼 터진다
그렇군, 첫사랑이란 어차피 아플 수밖에 없는 것!
끄응, 진땀을 쏟으며/ 내 안 깊숙이 똬리 틀고 있던
지독한 뱀 한 마리를 밖으로 몰아낸다
순간, 거짓말처럼 통증의 먹구름이 걷힌다/ 세상이 환해진다
정말이지 이제 아프지 않다
은미야, 잘 살아라!
- 2000년 < 시와생명 > 등단
도심에서 문득 화신花信을 본듯하다.
하지만 착시에 분명하겠지
아직도 봄은 멀기만하다.
아직도 봄은 이렇게 긴 행렬의 끝자락에 있기나 한지~.
산이 나를 들게 한다/ 천양희
높은 산은 오른다 하고
깊은 산은 든다고 하네
오른다는 말보다 든다는 말이 좋아
산에 든 지 이십 년이 넘었네
산은 오래 들어도 처음 든 것 같고
자주 든 길도 첫길 같은데
나는 나이 들어도 단풍 든 것 같지 않고
눈에 든 풍경도 절경이 아니네
높은 자리에 든 사람도
깊은 산에 든 것은 아닐 것이네
산에 들어 내가 감탄하는 것은
산에 든 눈먼 돌은 죄가 없다는 것
갈등 속에 든 사람들은 고통의 고리를 잡는다는 것
든다는 것과 오른다는 것이
산만의 일이 아니라서
바람 든 나무 밑에 엎드려 나는
오래 일어나지 않았네
- 계간 < 시인동네 > 2012년 겨울호 발표
1965년 < 현대문학 > 등단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강인한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사십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 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 1967년 < 조선일보 > 신춘문예 등단
키스/ 김기택
처음 네 입술이 열리고 내 혀가 네 입에 달리는 순간
혀만 남고 내 몸이 다 녹아버리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온 혀가 식도를 지나 발가락 끝에 닿는 순간
열 개의 발가락이 한꺼번에 발기하는 순간
여태껏 내 안에 두고도 몰랐던 살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
뜨거움과 질척거림과 스며듦이 나의 전부인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갗으로 덮여 있는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이 되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순간
네가 나의 심장으로 펄떡펄떡 뛰는 순간
내가 너의 허파로 숨 쉬는 순간
내 배 안에서 네가 발길질을 하는 순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
- 1989년 < 한국일보 > 등단
고라니 발자국을 따라가다/ 고진하
눈길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을 따라 갔다.
해 뜨면 곧 사라질 흰 자국들, 幻의 꽃잎들을
따라가는 맘이 이리 공할 줄이야.
발자국은 물푸레나무숲 지나 낙엽송 그늘 지나
솔숲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솔가지들은 축 늘어지거나 더러 찢겨져 있었다.
눈의 하중때문이겠지 설해를 입은 솔가지들
올려다보는 맘이 이리 짠할 줄이야.
고라니 발자국 끊어진 솔숲 길 끝에
고구마 무시래기 묵은 쌀 한 바가지 부어놓고
막 돌아서는데, 장끼 한 쌍이
난데없이 지척에서 화들짝 날아오른다.
나도 놀라 화들짝 날아오를 뻔했다.
미끄러운 하산 길, 몇 번 미끄러져 나뒹굴어도
미끄러운 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올 겨울 유난히 흰 물감을 많이 쏟아 부은,
아직 더 쏟아 부을 흰 물감이 남은 듯한 잿빛 하늘
을 쳐다보는 맘이 이리 순할 줄이야.
하지만 제 발자국에 포개진 사람 발자국 따라오지 않을 고라니들
그 사람 발자국 냄새 말끔히 지우려는 듯
흰 물감을 또 흩뿌리기 시작하는, 하늘 페인터!
- 1987년 < 세계의 문학 > 등단
바닥/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 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 2000년 < 중앙일보 > 신춘문예 등단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 않으리라는 키츠의 시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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