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비 섞어치던 날에 덕수궁 미술관을 옛 친구들과 찾았다.
체코, 프라하 화가들의 근-현대 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을 오래 전에 여행한 개인적 체험으로는
체코가 슬라브 민족과 게르만 민족간의 오랜 교류로 형성된 혈통이자
그런 문화의 계승자라는 주장을 갖고 있으나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로마 보다는 프라하를 한번 더 방문하고 싶다는 고집도 갖고 있다.
체코는 천년 이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여 왔고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 적도 있었으나
근대 국가로의 체제를 확보한 것은 지난 세기 초반이었다.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이 나라는 높은 민족적 기량과 기술력으로
금방 산업화 되지만
이에 따른 환경파괴, 사회적 불안은 문화 전반에 큰 각성을 일으킨다.
카프카의 존재가 문학 쪽의 반영이었다면 지금 덕수궁 국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라하 국립 미술관 소장전과 같은 내용은 회화 쪽의 반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제와 내용이 큐비즘과 초현실주의로 가득 채워져 있음도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큐비즘 즉 입체파는 공업화에 따른 삼라만상의 해체와 재해석을 반영하며
쉬레알리즘 즉 초현실주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쇠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 사회주의의 대두 등 정치 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던 체코에서
비극과 혼란을 감지했던 예술가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투영된 작품들이다.
"3인의 여인"을 회화로 형상화한 것은 신화시대 이래의 "3미신"의 전통이지만
이들이 캔바스에 올린 형상들은 고전적 균제를 모두 깨뜨리고 불안, 불온하다.
이번 전시에선 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1905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한
주요화가 28명의 회화 작품 107점이 엄선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프란티셰크 쿠프카는 비구상에서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선 '쿠프카 부부의 초상'을 비롯해 11점을 만날 수 있었다.
로보트라는 이름을 최초로 명명한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 그의 형 요세프가 그린
추상화도 근대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민족 정체성을 노래한 스메타나의 몰다우 강을 배경 음악으로 깔면서
'신세계로부터'를 쓴 안톤 드보르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명성을 얻은 밀란 쿤데라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아울러 일층에서 프라하 화풍을 만끽하고나서 이층으로 올라갔더니
한국 근대 미술전이 상설로 열리고 있었다.
며칠 전 블로그에 올렸던 김환기의 작품도 다시 볼 수 있어서 감회가 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볼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전시 작품을 실내에서는 찍을 수 없기에 문밖에서 훔치다시피 몇 컷 포착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논란이 많은 서울 시청 건물이 덕수궁 기와 대궐 뒤로
그 자태를 나타낸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나는 이 콘트라스트를 상찬하고 즐긴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 유리로 된 피라밋 건물이 부조화의 조화로 미적 자태를 뽐내는
형상을 보고 느꼈듯이.
오늘은 친구 만날 약속이 눈비 속에서 바삐 이루어져서
스마트 폰으로 몇 컷하다 보니 사진이 좀 흐리지만
덕분에 게으름 피우던 촬영술도 연마할 기회가 되었다.
또한 오디오 해설 헤드 세트를 빌리지 않고 스마트 폰으로 대신하는 방법도
현장에 나와있는 도우미들로 부터 배웠다.
네명의 옛 사람들이 모이니 최첨단으로 스마트 폰을 운용하는 친구도 있고
아직도 구식 휴대폰을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나는 그 중간 쯤에 좌표를 찍고 있는가 싶다.
도우미와 도슨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담 한마디.
우리나라 전람회에도 외국인을 위하여 영어 해설을 하루 한번 정도 하는 모양인데
우리 중고등 학생들이 그 그룹에 끼어서 유창하게 질문을 하는건
애교로 치더라도,
간혹 일반인들도 시시콜콜 영어 능력을 과시하고
급기야 영어가 틀렸다는 시비까지 붙는다던가---.
또하나, 도우슨트와 도우미는 간호사가 병실에서는 향수를 뿌리지 못하듯이
그림 보호상 마찬가지 규정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팩션을 위하여.
덕수궁 입구에 걸린 포스터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감각이 다르다.
이 골목 안쪽에서 막걸리와 보쌈으로 저녁을 먹고 눈비를 맞으며 헤어졌는데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다.
요즈음은 매일 눈이 내린다.
하늘에 고맙다.
서울 근교로 휙 나가서 여기저기 눈 풍경을 찍었다.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은 프라하국립미술관의 소장품 중 1905년부터 1943년에 이르기까지의 체코 화가 28명의 회화 작품 107점을 엄선하여 선보입니다. 체코 근대 미술이 최초로 한국에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정치 사회적 격변 속에서 구축된 체코 근대 미술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데요.
체코는 슬라브, 보헤미아 등의 고유한 민족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빈, 파리 등지의 서유럽 문화와 교류하면서 뛰어난 문화적 역량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미술과 더불어 음악, 문학 등에서 거둔 성과는 그 수준이 매우 높아 유럽 지역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았고, 이러한 체코 문화의 영향력은 체코와 유럽 지역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21세기 오늘날 한국에까지 다다르고 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체코에서는 제국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민족주의의 급부상, 제1차 세계대전 발발, 국가의 탄생, 사회주의의 대두, 서구 근대 시스템의 도입 등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체코의 미술가들은 혼란의 시기에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택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문하고 그것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더라도 작품 활동을 통해 그것을 외면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공감과 공명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되며 외부의 자극과 충격에 노출되기 시작했던 한국 근대 미술가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번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은 다양하고 풍부한 체코 근대 미술의 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므로 체코 근대 미술을 단순한 수준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다양한 층위에서 인식하고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프라하국립미술관은 1796년 2월 5일 보헤미아의 애국심 높은 귀족들과 계몽운동에 힘입은 중산층 지식인들이 결성한 예술애국친구협회에 의해 대중들의 취향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미술아카데미’와 ‘예술애국친구협회 미술관’이라는 두 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 중 미술관은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오늘날 프라하국립미술관의 전신입니다.
미술관은 1902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Ⅰ) 황제의 개인적인 용도로 설립된 보헤미아 왕립 근대미술갤러리를 흡수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20세기 미술 작품을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애국친구협회 미술관은 1918년에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국립미술품콜렉션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19년에 빈첸츠 크라마르(Vincenc Kramar, 1877~1960)가 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되어 전문적으로 운영하면서 잠시 동안 미술관을 근대적으로 변화시켰고 1942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관될 위기에 처했으나 1949년에 미술 작품을 통해 국가 정신을 고양하려는 목적으로 프라하국립미술관이 프라하에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프라하국립미술관은 국내외의 회화, 조각과 그래픽아트, 뉴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을 수집, 기록, 보존하고, 대중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프라하국립미술관은 고대와 중세 미술을 위한 성 아그네스 수녀원, 슈테른베르크 궁전과 슈와르츠젠베르크 궁전, 19세기 보헤미아 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한 성 게오르그 수도원, 근현대 미술 중에서도 체코 큐비즘을 위한 검은 성모의 집, 20세기와 21세기 미술을 다루는 벨레트르츠니 궁전, 아시아 및 고대 지중해 미술을 위한 킨스키 궁전 등 7곳의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뒤지다 보니 지난 여름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이 외롭게 끼어있었다.
|
'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날은 설핏 지나가고 (0) | 2013.02.15 |
---|---|
눈길에 쓴 묵은 해의 기록들 (0) | 2013.02.10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김광섭, 김환기) (0) | 2013.02.04 |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와 누드 시 몇 편 (0) | 2013.02.01 |
여름과 겨울, 그리고 누드 시와 누드 첼리스트 (두번째) (0) | 2013.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