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의 시절 (칠월: 내 마음의 편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7월은 그러한 달이다.
수입 청포도를 마트에서 사다먹는 고향 상실자에게도 마음의 고향에서는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있다.
아니, 아니, 이제는 FTA로 싸게 들어온 칠레산 청포도가 시장에 지천이라면서 무슨
“이 마을의 전설”이란 말인가.
그래도 7월은 진정한 청포도의 시절이다.
우리의 산야에서 가꾸어진 순 국산 청포도가 마침내 7월이면 출하된다고 하니
6월까지는 수입 산만 먹었어도 이제는 우리의 황토 흙에서 나오는 청포도가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는 시절이 왔다.
나이 겨우 서른아홉에 북경의 일본 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죽어간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이 청포도를 읊은 곳은 호미 곶 근방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 자리인가 한다.
옥고에서 얻은 지병을 요양하던 시인은 바다와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
동네 사람들도 시인을 그리워하여 2013년 1월 2일, 호미 곶에 육사시비를 세웠다.
하필이면 추운 겨울날이랴,
육사가 옥사, 순국한 때가 바로 매섭게 추운 겨울날(1월 16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일에 맞춘 셈이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륙 안동 출신인 시인이 푸른 바다를 꺼낸 것에 처음은 시적 은유만인가
싶기도 했지만 실제 상황이 그런 이미저리를 불러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17회에 걸친 투옥 등으로 폐결핵이 악화되었을 때 그가 요양한 곳이
포도원과 바닷가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온다”고 한 그 다음 구절은 바로 나라의
독립을 뜻한 의인화였는데 청포를 입은 그분은 안타깝게도 시인이 순절한
다음해에야 찾아왔다.
시인의 본명은 원록(源祿)이고 뒤에 활(活)로도 썼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 변에 안장되었고 일찍이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되었다.
이후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 추모사업회에
위탁되어 운영이 된다.
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는 최유근 회장이 맡고 있다.
최 회장은 지역에서 오래 병원을 운영해 온 고매한 시인으로 필자와는 중고등학교
동기이자 문단의 동지이기도 하다.
“육사 문학제”는 안동에서 7월이 오면 개최되어 왔는데 최근 소식으로는 중국의
옌벤에서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이 문학제는 경북도와 안동시가 주최하고 이육사문학관과 중국 옌볜작가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작년에 이미 3회째나 개최되었다.
금년은 4회째가 되겠고 날짜는 그 사이 7월이 아니라 9월로 바뀌었다니 올해에는
아직 열리지 않았겠다.
적조했던 최유근 학우에게 그간의 소식을 물어보고 참여의 길도 열었으면 싶다.
한편 육사 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문학관 내 육우당에 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는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도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한다는 흐뭇한 소식이다.
청포도는 백포도주를 만드는 원료이다.
영어로는 청포도를 white grapes라고 하니 백포도라고 번역되는 경우도 있을 법
하다.
하긴 White Wine을 백포도주로 번역하니 그 원료가 백포도라고 하여도 달리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백포도주의 빛깔에 연한 청포도의 빛이 은은하니 상감비색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물론 백포도주는 적포도의 껍질을 벗겨서도 만든다. 하지만 특히 청포도로 만든
백포도주는 프랑스어로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백포도로 만든 백포도주)"
이라고 하여서 껍질 벗긴 적포도로 만든 백포도주, ”블랑 드 놔르(blanc de noir)“
보다 더 치기도 한다.
안성의 성당 근방 포도원에서 나오는 국산 포도주(머독)가 미사 주로 벌써부터
쓰인다든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마실 때의 식단이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다.
우리가 서기, 즉 서력기원(AD)을 쓰다 보니 7월의 서양이름 기원도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름을 기려서 July가 되었다.
카이사르 황제 이전까지 로마력은 일 년을 십진법에 따라 열 달로 나누었는데
계절이나 절기에도 의미가 없고 전쟁을 하는 데에도 차질이 생겼다.
카이사르, 곧 시저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을 불러 모아서 태양의 황도를 잘
나누어 열두 달 짜리 달력을 새로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율리우스 달력이다.
카이사르 생전에 로마에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달인
퀸틸리스를 '율리에'로 개명했다.
July라는 달 이름의 탄생이다.
J 발음이 본토 발음인 “o“에서 “ㅈ“으로 바뀐 것은 그때만 하여도 영국이 문화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나 학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간단히 생각하면 편하고 옳다.
카이사르가 시저로 무식하게 발음된 것도 근본은 그런 맥락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지의 케사르(Cesar), 독일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의 차르(Czar)
등도 같은 이름이다.
율리우스력은 후일 그레고리 교황 때에 윤년 계산을 다시 정확히 하느라고 열흘
가량의 날짜 차이가 생긴다.
그레고리안력의 탄생이다
그런데 그때는 영국을 포함, 서유럽은 이미 개명스러웠는데 러시아를 포함 동방 정교를
믿는 동유럽 나라들은 아직도 변방이었다.
이런 나라들의 종교행사에는 여전히 율리우스력이 쓰이고도 있다.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최근 크리스마스 행사를 서유럽과 다른 날짜에 치렀다는
뉴스는 그런 탓이다.
전통 중시 때문인지 러시아의 콧대 때문인지는 사실 누가 알랴.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를 우리가 흠모하는 것은 그의 굴절되지 않은 양심과
영혼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마지막에 대부분의 문인들은 변절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감내하였다.
거기 속하지 않은 분이라면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정도가 아닐까.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였을까.
그런 자성이 있어서 청포도는 달지만 시기도하고 그 청아한 자태는 외경스럽다.
정말 만감 속에서 7월의 첫날 오늘은 하이얀 모시 수건 깔아놓고 청포도 깨물며
백포도주를 마시고 싶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모바일 시대에 맞추어 현대판 세시기(歲時記)로 사족을 붙이자면 미국에서는
7월 한 달을 “휴대폰 예절의 달(cell phone courtesy month)”로 삼는다.
“2억 5000만이 쓰는 휴대폰~, 예의범절을 갖춥시다“라는 정신이다.
아울러 7월 4일 "독립기념일(4th of July)"에는 불꽃놀이가 장관이다.
바비큐 굽는 냄새는 침샘을 돋운다.
꼭 같은 풍경이 7월 1일 ”카나다 데이“에서도 벌어진다.
카나다의 독자적 국가 형성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7월 16일은 ”바스티유 데이“,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다. 1789년 7월 16일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며 일어난 혁명의 정신은 1776년 미국의 독립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실 프랑스 왕정은 영국 왕정에 대립각을 세워서 미국의 독립전쟁에 물심양면
큰 원조를 하였는데 이것이 그만 왕실 재정을 파탄내고 만다.
마침 혹한과 가뭄, 이어서 흉년에 시달리던 민심은 왕비가 사치를 일삼아서
나라꼴이 그렇게 되었다고 왕과 왕비의 목을 친다.
영국에서는 1798년에 윌리엄 워즈워드와 콜리지가 ”서정시집“을 내며
낭만주의를 선포한다.
프랑스 혁명에 심취한 워즈워드는 도버를 건너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지만
이어지는 공포정치에 혼 줄이 빠져서 프랑스의 연인과 일점혈육까지 내팽개치고
섬나라 영국으로 줄행랑을 친다.
이 일련의 일들은 모두 서유럽 낭만주의 시대, 자유로운 영혼들이 이루어낸
흔적들이다.
혁명정신은 낭만정신이다.
<끝>
|
|
'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티지 카 레이스의 현장에서 (0) | 2014.07.22 |
---|---|
미셀 오바마 의자와 켈리의 떡볶이 집 (0) | 2014.07.18 |
허드슨 강변에서 울릉도를 추상하며 (0) | 2014.07.12 |
전람회 초대 (0) | 2014.07.08 |
해군 상륙함(LST) 타고 독도 탐방 (0) | 201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