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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과기대 교환교수 때의 추억

원평재 2018. 12. 7. 23:27











연변 과기대 교환교수 때의 추억

                                                           

21세기 초에 연변에 있는 과학기술대학교의 교환교수로 한

학기 체류하였던 기간은 잊지 못할 추억이자 뜻 깊은 체험

이었다. 이후 가끔 그곳을 스쳐지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라운 발전에 놀라면서도 내 기억의 편린은 과거 교환교수

시절로 타임머신을 탄다.

그때의 편린을 몇가지로 추려서 기록해 보고 싶다.

 

1. 서사로서

연변 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조선족 문학인들과 교유하였던 한 학기는 매우

감동스러운 기간이었다. 연구 년 두 학기 중의 하나를 먼저

연변에서 보내게 된 데에는 재외동포, 특히 미국과 중국

동포들의 문학 활동을 비교 연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당시 연변과 미국은 근대사에서의 한민족 이민 이력이

똑같이 백여 년을 갓 넘었고, 동포의 숫자도 150만 명 내외로

엇 비슷, 독립운동사의 시원과 현재의 문학 열정도 모두

근사한 점이 있어서 무언가 상호비교의 영역이 존재하리라

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연구 년의 나머지 한 학기는 뉴욕 대학에서 보내기로

스케줄을 잡아놓았다.

특히 연변과기대에서는 겸임교수로 강의도 하였다.

출석을 부르면 "따오()!"하고 힘차게 답하던 눈매들이

그립다.

때로 5월까지 눈이 내리는 추운 연변에, 3월초 도착하자마자

월간 <연변문학>의 김삼 발행인, 연변 작가회의의 김학천

주석, 장정일 문인 등 여러분들, 장편 <혈연의 강들>의 저자

류연산 작가, 장춘에 있는 <길림 신문사> 남영전 총편,

<도라지>, <장백산> 등의 편집자들을 만나고 교유했던

일들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분들의 민족문학에 대한

열정에 존경심 가득한 박수를 다시 보낸다. <조선문 독서사>

에서 조선족 교사들을 상대로 몇 주간 연속 강연을 했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2. 연변의 윤동주 행사와 윤혜원 여사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윤 시인은 19171230

중국에서 탄생하여 1945216향년 27세로 순절한다.

내가 만나본 동생으로는 윤혜원(1924 ~ 2011)여사가 있다.

연변작가회의 사무실에 드나들던 내 연구 년 중의 6월초

이던가,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와 부군 오형범

선생을 소개 받게 된다. 부부는 그해까지 벌써 8년째 연변

에서 여름마다 열리는 윤동주 시인 축제에 호주로 부터

찾아와서 참석하고 시상을 감당하는 등, 윤 시인의 문학세계

선양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두 분은 6,7,8월 석 달 동안을 연변 시내 동 시장근방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지내며 윤시인의 자료 등을 행사

때 및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윤 시인과의 일화들을

조용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연변의 여름은 이른바 윤동주 행사로 분주하다. 나도 그해

여름 윤동주의 이름이 걸린 여러 문학 백일장의 심사위원

역할도 맡고 시상식에 참여한 일도 많았다. 윤동주 시인의

탄생일이나 사거한 날이 겨울임에도 여름철에 행사나

축제가 몰린 것은 그의 사후 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848)",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이 애송되는 "서시"

"별 헤는 밤"배경과 계절과 서정적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아울러 연변의 살을 에는 겨울 추위가 겨울

축제를 어렵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윤동주 축제는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백일장에 참여

하는 어린 학생들은 모두 민족의 얼을 함양하는 한마당

축제의 당당한 주인공 들이다. 연변 인민 출판사에서 발행

하는 <중학생> 잡지에서 주관하는 "윤동주다시 읽기"행사에

윤혜원-오형범 부처와 함께한 기억이 특히 새롭다. 윤혜원

여사는 항상 그렇듯이 잘 나서지 않고 오빠의 시세계에

대해서도 무어라 해제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자칫 오빠의 시를 언급하는 일이 숭고한 시세계에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자세이고 눈치였다. 그렇다고

윤혜원 여사의 역할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윤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가

연희전문에 다닐 때 육필로 발간하려고 했던 시 31편만을

담고 있지만 그 외의 많은 분량을 고국으로 갖고 내려온

크나큰 일은 오로지 윤혜원 여사의 공적이다.  

룽징(龍井)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윤혜원 여사는 1948

12, 중국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귀한 사진들을 가져온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 여사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윤 여사는 몇 년 전 작고하였지만 당시에도 부부는 노구에

몸의 여러 부분을 수술도 받았고 또 오형범 선생은 그 며칠

전 어둠 속에서 넘어져 다리도 편치 않은 몸으로 여러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이 안쓰럽게도 보였다. 윤 여사가 원고를 갖고

온 경로는 룽징, 청진, 원산,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로

이어졌으며 그 후에도 계속 보관해 온 정성이 놀랍다.

무슨 사명감과 신탁을 받은 마음가짐이 아니었던가싶기도

하였다.

물론 윤동주 시인의 시에는 이육사나 한용운 시인의 시에

나타난 바, 직접적인 투혼 같은 구절보다는 서정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일지는 모른다. 또한 가장 많이

읽힌다는 서시의 번역에서도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리"

라는 구절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리"로 일역되어

도시샤 대학에 시비로 서있다는 사실 등에서 보이는 종교적

해석 논란으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점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윤동주 시인은 당시 금지된

우리말로 하늘을 향하여 간절한 시어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감옥에서 순절했으니 이 보다 더한 독립에의 의지가

어디 있을까. 하여간 시인의 깊은 마음을 통찰하고 순정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던 누이와 매부의 모습이 맑은 하늘의

별을 헤는 마음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서 오빠와 재회하였을

윤 여사를 추모한다.

 

3. 명동 마을

한 학기 동안 연변 과기대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역사학을 강의하는 양대언 교수를 만나고 교유한 것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연변 조선족 재야 사학계와도 연이

닿아있는 양 교수는 웅혼한 향토 사학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이런 민족혼의 기개는 일제 강점기 북간도 지방 우리 동포들

에게도 고루 퍼져있던 분위기가 아닌가한다.

윤동주 시인의 성장기에도 물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장편 <혈연의 강들>을 쓴 류연산(1957-2011) 작가가 각지에

묻혀있는 조선족들의 구전 민담과 독립운동의 생생한 증언을

채집하여 묶어내던 이야기의 전말을 들으며 이것이 바로

윤동주 시인의 민족의식 함양과 구축의 토양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내가 연변과기대에 있던 때는 마침 윤동주 시인 서거 60

주기가 되던 해였다.

그때만 하여도 연변에서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용정의

변두리 명동 마을까지 가는 일은 교통편 등 모든 면에서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양 교수가 직접 모는 지프 형 RV

사륜구동차는 두만강을 끼고 달리며 용정으로 박차를

가하였다. 다만 그때 이미 연변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절정을 넘어서서 중국인들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두만강 변은 아직 조선족이 많다고 하였다. 특히

양 교수는 지붕의 모양만으로도 금방 조선족의 집을

알아내었는데 그때까지는 양쪽 대들보에 망건 모양을 얹은

우리 조선족의 집 모양새가 대부분이었다.

명동마을은 함경도 회령 땅에서 월경을 하면 금방 닿는

개산둔((開山屯, 카이산둔)에서 살짝 좌측으로 틀면 닿는

용정의 변두리 쪽에 있어서 우리 민족들이 드나들며 세운

마을이고 특히 윤동주 시인의 외할아버지 김약연 목사가

처음 터를 잡고 교회를 세우며 자리를 잡은 곳이다.

윤혜원 여사가 잠시 초등학교 교사를 한곳도 여기였다.

, 하나 더 명기할 것이 있다. 용정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북간도 돌비(石碑)”가 있는 곳을 들렀다. 뜻있는 분들이

우리말로 사이섬이라고 크게 음각하여 북간도 비를

세웠는데 중국 공안 쪽에서 박살을 내 놓은 현장이었다.

돌비는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그저 사진 몇 장을 찍어 온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사이섬은 두만강 사이의 섬으로

나중에 자연적인 수로 변경에 따라 중국 쪽에 붙었으니

하늘도 무심하다 할까.

하여간 새로 포장한 시멘트 길을 지프차는 잘도 달려서

왼쪽으로는 내내 두만강을 끼고 내려오다가 개산둔 바라

보는 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용정을 향했다.

용정 초입에서 우리는 전주비빔밥집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전주란 말은 조선족 자치주를 뜻하며

이를 석권한 비빕밥 집이란 뜻이라고 설명을 해 놓았다.

음식점 옥호에 특정지명을 쓰지 못하는 새 규정 탓에

그런 설명이 붙었다고 한다. 연길의 "홍콩(香港) 반점"

"흥두(興豆)반점"으로 바뀌었다.

식후 용정 시내를 짐짓 벗어나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明東村)향하여 달려갔다.

시내에서 명동촌은 다소 거리가 있었는데 논밭을 좌우로

하고 달리다보니 우람한 바위산이 앞에 보인다. 유명한

선바위로 원래는 세 봉우리였으나 최근에 길을

넓히면서 둘을 쪼개내고 하나만 남아서 전설의 내용도

비틀어지게 생겼단다.

명동 마을은 밝아오는 동이(東夷)마을이라는 뜻으로

선각자 김약연 의사께서 명동 교회와

함께 세운 터전으로 동주 시인의 생가 터와 바로 인접

하였다. 동네의 한가운데로는 육도하(六道河)”(해란강

원류)가 흐르고 있었고 천주교 성당도 아직 번듯

하였는데 중국 공민이 아닌 신분으로는 얼씬할 수도

없었다. 명동 교회도 역사의 유산으로 존재하였지

아직 공개된 예배당의 역할은 아닌 터였다.

선각한 김약연 목사의 공적비는 시인의 생가 입구에 새로

세운 비각 속에서 흰 대리석의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거친 시대를 거치면서 동네 개울의 다리로

쓰이다가 다시 돌아왔기에 모서리가 깨지고 새긴 글도

판독이 힘들었다.

윤동주의 생가도 사실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90년대에

우리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이 이곳 복원 사업을 할 때에

인근 삼합에서 똑 같은 것을 사다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류연산 작, 혈연의 강들”), 일설에는 북한에서 사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려나 복원된 생가의 외양과 속 모양은 당시의 집

모양이 모두 엇비슷하여서 같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라고 한다. (신길우 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굴뚝의

모양으로 보아서 복원 때 좌우 대칭이 바뀌었다고도

한다,)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는데 용정 시내의 용두레

우물처럼 용두레가 달린 샘물로서 마을 복원 때에도

이가 시린 그 물을 마신 기록들이 있는데 지금은 다시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하고 있어서 물을 마시지는

못하였다. 샘이 곧 무너져 내리려고 하여서 서둘러

보수하고 있었는데 우물 받침 등 유물들은 나중에 국내로

반입한 것을 자하문 밖 윤동주 박물관에서 본 바가 있다.

윤동주 시인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제 명동 마을에서

설화의 경지로 승화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데, 그가

누운 곳은 이곳 용정 땅의 동산 묘지이다. 그 가족 분들이

일찍이 묘 자리도 수습하고 건사를 잘하여놓았지만

오랫동안 국교의 단절에 따른 공백이 있었는데 여기

조선족 학자들과 손을 잡고 다시 그 음택을 찾아낸 이는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있던 교도 대학의 오무라

(大村益夫) 교수였다.

이를 두고 통탄해마지않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 이때

일행에는 연변대 조문과 권철 교수, 김호웅 교수, 이해산

강사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 등이 동행했으니 공적을

따지자면 한일공동 발견이 옳고 오무라 선생의 인품과

윤동주 연구의 자세를 보면 혹시 있을 협량은 무람할

뿐이다.

연변에서의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닿으면 더 많은 기억이 편린들을 쏟아내고 싶다.

세월의 무상을 함께 통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