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조의 여행 꿀 팁(2)
웨일스 지방 바로 알기
영국의 한 지역으로만 알고 있는 웨일스 지방은 왜 유러피안 축구대회와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격돌할까.
브리튼 섬의 옛 민족은 갈색 인종이었다고 추정된다. 태양 거석기시대인들을 말함이다.
이후 켈트 족들이 대륙에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선주민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자신들이
원주민이라고 여긴다, 로마자로는 Celt라고 쓰지만 발음은 켈트라고 하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셀트라는 발음이 더 흔하게 되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Kelt라고 쓰는 일도 흔하다.
이들은 다시 앵글로 색슨 족들에게 쫓겨서 지금의 웨일스와 북쪽 산악지대 스코틀랜드, 그리고
바다를 건너 아일랜드로 건너간다. 켈트족의 저항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가 깊다.
이제 웨일스의 역사를 챙겨본다. 4세기 말부터 앵글로색슨인들에게 쫓긴 켈트인들은 와이(Wye)
강을 건너 정착하면서 웨일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때는 로마 군단이 웨일스 지방으로 들어와서
공존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게르만 대 이동”에 따라 본토가 위험한 로마 군단은 떠난다.
웨일스는 4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끊임없이 앵글로색슨인과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6세기에는 아서 왕의 신화가 만들어져 웨일스 역사에서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9세기가 되면
웨일스 인들은 자신들 나라를 "켈트인들의 나라(Cymru)"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직은 웨일스 인이라는 분리된 의식보다는 같은 켈트족인 스코틀랜드인들과 동질감을
더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침략하여 병합한 후(1282년), 이 곳에서 잉글랜드의 법을
실시하고 식민정책을 펴서 이민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웨일스의 언어와 고유문화는 방해받지
않았다. 영국의 왕태자를 Prince of Wales라고 하는 것은 에드워드 1세의 둘째 아들이 이 전승
때에 태어나고 이곳에서 왕위 계승권을 갖기에 붙은 이름이다. “웨일스의 왕자”라는 오역이 잦은
이유이다.
튜더 왕가의 시조인 헨리 튜더가 부분적으로 웨일스 혈통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은 1485년 이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헨리 8세의 유능한 행정가 토머스 크롬웰이
잉글랜드 식 보통법 체제를 웨일스에 도입하였고, 국교회를 확립하였으며, 웨일스 대표를
웨스트민스터의 잉글랜드 의회에 받아들임으로써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졌다(1536년).
결국 웨일스는 저항의 역사 속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켈트 인들로 부터는 배신자,
혹은 유화자라는 비난도 받는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의지가 강한 이유도 이와 유사하게
피어린 역사적 맥락이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적 콘텐츠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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