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산업계의 스타들이 모이는 자리에 끼일 기회가 있었다.
C호텔 34층에 있는 멤버들만의 클럽이었는데 이름이 "실크 로드"
이던가 하는 곳이었다.
밀폐된 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툭 터진 공간에서 꼬냑도 음미하고
위스키도 마시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룸을 하나 차지하였는데 다른데와는 달리 그게 되레 조금
촌스러웠다.
돈께나 있는 멤버들이 왜 방으로 밀려들었을까?
내가 생각해보니 그놈의 나이 때문이었다.
젊고 돈 많은 부모를 둔 젊은 녀석들은 벌써 허우대와 신장이 달랐고
사지의 움직임 부터 다른듯 했다.
어릴적엔 보리밥이나 먹고 크다가 마침내 나이들어서야 큰 돈 좀 번
늙은이들이 방으로 기어들어가야지---.
세상 달라졌구나.
룸 예약이 권위와 특권의 기표이자 기의인줄 알았더니---.
그래도 늙은이들을 봐주는 건가.
접대하는 아가씨들은 아예 문을 반쯤 열어놓고 스커트가 툭 터져서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필리핀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와 특히
그녀의 잘 생긴 다리를 방안에서나마 가까스로 감상케 해주었다.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 보려고 앉은 나의 초저녁 명당 자리는
이제 젊은 가수의 노래와 밤 시간이 깊어가면서 이코노미 석이 되었고
먹물이라고 나에게 자리를 내 준 어떤 회장의 자리는
신 명당, 혹은 프레스티지 클래스로 격상되고야 말았다.
남성들의 "시선"이라는 문제를 페미니스트들이 새로운 화두로
채택한 연고를 알만했다.
낮은 스테이지에서 노랑물을 들인 머리칼 때문인지 서양여자
되다만듯한 여가수는 When I Dream을 구성지게 불러서
캐롤 키드를 무색케 하면서 이제는
피아노를 껴안고 신음하는 교태까지 부렸다.
이윽고 그녀가 애드 립으로 나나무스끄리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녀의 몸과 피아노의 건반이 같은 차원에서 병렬되면서 속살이
거의 다 드러났다.
누가 룸으로 들어오랴---.
프랑스 요리를 전문으로하는 집이어서 들어올 때부터 음식 고를
때는 또 한바탕 난리를 치룰거라고 각오는 이미 했지만
이 집의 카르테는 번호도 매겨져 있지 않아서 어려운 프랑스
발음을 해야될 판이었다.
"그러지 말고 실버벨이라고, 이 집 디너 스페셜 코스 요리가
있는데 그 식단에다가 식성대로 빼거나 바꾸거나 하지"
이날의 스폰서가 경륜에서 나온 제안을 기분 상하지 않게 내놨다.
돈쓰고 욕먹는 바보도 있지만---.
나는 웨이터의 권유대로 스프 메뉴만 치즈 토핑을 한 것으로
바꾸었다.
"차이가 얼마요?"
얻어먹지만 값은 알아야 고마움의 척도를 정할 것 아닌가---.
"추가 되는건 8000원 밖에 안됩니다."
갈비탕 두그릇 값이구나---.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와인 리스트에서였다.
요즘은 캘리포니아 산, 특히 나파 벨리의 와인이 고급으로 취급
받는 줄은 들어알지만 하여간 시키는 것을 겻눈질 했더니
25만원 짜리였다.
와인 이름을 적으려다가 너무 촌티 부리는 것 같아서 그건
그만 두었다.
"이제 터놓고 말합시다. 당신있던 D그룹의 K회장이 왜 망했다고
보시오?"
글쎄 자기는 별로 터놓지 않을 것같이 보이는 다부지고 고집센
인상의 어떤 사장이, D 그룹에서 사장까지 지낸 사람에게 물었다.
캐롤 키드가 호소하는듯한 달콤한 분위기에서 그의 말은 협박같았다.
물론 자리가 그런 모임은 결코 아니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복잡하고 복합적이겠지만 한 두가지만
열거해 보자면---"
D그룹의 사장이었던 사람이 망한 회사의 1급 비밀을 터뜨려서
살신성인, 분위기를 살리려는가---.
그건 아닐 것이고 신문에난 정도로 범주를 정했겠지.
하여간 내가 촌탁할 성질이나 분야는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IMF 때에 우선 미국으로 부터 큰걸로 하나는
쓸어뜨려야 된다는 강한 주문이 들어왔는데 여기에 그 회사가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우리 자체 경제연구소가 유명하잖소. 그곳에서 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여 1500억 달러를 우리 경제가 긴축하여 감내하면
IMF는 문제 없다고 국가 최고위층에 진언을 햇어요.
그러자 당시의 경제팀들, 예컨데 G,B,J등이 노여움을 표한거죠.
국책은행의 융자가 없으면 피가 돌지않고 멈추는데 그들의
노여움을 탄 그룹이 견뎌낼 재간이 있나요.
폴랜드 자동차 회사를 1억 5000만 달러에 거져 줏다시피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자동차 공장을 다
만들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었지요."
폴랜드 쪽은 물론 인수 직후에 10억달러를 유럽은행에서 기채하여
추가 투자를 하긴했지만 아무튼 연산 150만대까지 내다 보는
대단한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저들이 공급과잉에 시달리는데 K회장이
너무 나이브하게 남의 돈으로 밀어부친건 아닐까---.
누가 이의를 달았다.
나는 우즈베끼스탄이란 말이 나오니가 조금 미소지었다.
나의 표정관리에 다소 에러가 생긴 셈이었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어느 정보통신 회사의 사장이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의 기막힌 사진 들을 구경했는데 출처가 바로 이 친구라는
것이다.
이 친구가 나에게는 그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업가들 끼리는 몰라도 나에게는 출입금지구역으로 설정해 놓은
모양이다.
그 우즈베끼스탄이 마침내 식탁위로 올라온 것이다.
나는 모른체 하였다.
다만 내 미소는 들킨 셈인데 눈치빠른 그가 일단은 입력하는 수준에서
넘어가는듯 하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지나친 온정주의 때문도 있을겁니다."
S그룹이 피도 눈물도 없는 실적주의라면 여기는 2000만 달러를 축낸
현지 사장도 건재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냉혹한 승패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겠다.
"구정권의 정치자금 배달 사고와도 관련이 있다던데요?"
누가 또 물었다.
그는 절래절래 손을 흔들었다.
자기가 아는한 그럴리는 없단다.
누가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우면 소화에도 지장이 있을렸다.
" 그런 사고가 있고 없고간에 그건 그 정도로 하고 하여간 업계의
내막도 많이 알고 하시니 자서전이나 소설책 같은걸 하나 내시죠."
이 사람 밥값을 제대로 하는구나, 내가 생각했다.
"아 이양반 시조시인 협회에도 가입한 문사입니다."
내가 말을 덧붙이며 밥값을 조금 보탰다.
그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않으면서 바깥을 내다 보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남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기다리는 눈은 오지않고 겨울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다.
아, 와인 맛이 빠졌다.
무딘 입맛에도 참 기가 막혔다.
비싼건 좋은 것인가.
사는 동네가 비슷하여 나는 돌아오는 길에 기사가 있는
그의 차를 얻어탔다.
"아까 왜 웃었어?"
역시 그였다.
"우즈베끼스탄으로 찔리는 것 없어?" 나의 답변인지 물음인지.
"에이, 그런거야 자본주의 사회의 뒷모습 아닌가---"
그가 발설자를 채근하여 묻지 않는 것으로 봐서 여러군데 욹어먹은
냄새가 났다.
우리는 그 문제를 더 다루지 않았다.
"아까 박사장도 책을 하나 쓰라고 하더라만 내가 사업계를 훑고
다녔더니 아는건 사실 무척 많은데 이걸 직접 쓰긴 그렇고---.
나도 시조께나 읊고 다니면서 보니 대필업자도 엄청 많다고들하대---."
"서양 근대 소설의 원조라고 하는 헨리 필딩도 원래 연애편지
대필업자라고 하더군. 자네의 소재라면 훌륭한 소설 열편은 나오겠다---."
내가 고급 와인의 에스프리가 부추기는 바람에 조금 과장은 했으나
정말 대단히 탐나는 작품의 소재를 이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틀림없는 사실이어서 그의 의욕을 북돋우었다.
"사실만 갖고는 소설이 안되잖아."
그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그래서 소설이 영어로 픽션 아닌가. 그런데 요즈음은
픽션 보다 더한 현실이 너무나 많이 전개되어서 픽션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없지. 그래서 사실 즉 fact와 허구
즉 fiction을 얽어멘 팩션이라는 장르가 생겨나고 있어.
자네같은 사람이 시도해 볼만한 절묘한 마당이 생긴거지---"
우정과 밥값의 상승작용으로 내가 설명을 진지하게 해주면서도,
마치 기업 비밀을 팔아먹는듯한 아픔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자도 등장해야 하잖아"
"여자 없는 소설이 어디있나. 인류의 반 이상이 여자야. 자넨 또
여복도 많았잖아. 능력 탓이겠지만, 하하하"
"그래, 마누라가 다른건 다 믿어도 여자 문제 만큼은 못믿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건 과장이고 마누라가 아는척 하는 부분은
피해의식과 합성된거야."
그러면서 그는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휴학하였을 때 이웃 동네의
연상의 처녀와 사건이 있었다고 하였다. 사건 이후 처녀는 손 아래
총각을 찾아다녔고 총각이라기 보다 이 조숙한 고등학생은 현실이
무섭고 또한 장래를 생각하여 도망다니기 바빴고---.
눈치를 채신 어머니께서 어느날 고이 간직했던 비단에 쓴 글자를
보여주셨다고 한다.
고명하신 스님이 이 친구의 사주를 보고 장래 대성을 예언하면서
다만 평생에 여섯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더란다.
그런 내용이 구체적인 때를 명시하면서 적시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대체로 내용이 맞다는 것이다.
"여섯 여자나 건드리면서 용케 성공하였네."
내가 조금 신랄하게 비꼬았지만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잃지않는 그를 내가 잘 알기 때문에 여자 문제도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창 때에 또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돈 주고 산 여자를 포함하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범주로 따지면 내가 어이 여섯 여자와
관계가 있었겠냐. 한 다섯 손가락은 채울지 몰라도---.
그래서 이번에 소설인지 대필인지를 하나 쓴다면 가공의 여자를 하나
만들어 넣어야겠는데 생각해 보니 그여자가 바로 여섯번째 여자가
되겠어. 그런데 이걸 마누라가 믿어줄까?
가장 찐하게 가장 치열하게 사랑을 나누는 여자로 만들어야겠는데
이 때문에 마누라한테 묵사발 되는것 아닌지. 아니 마누라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정말 여섯여자를 조심하라는 그 고승의 예언이 꼭 맞긴 맞는것 같단
말이야---"
나는 "문학 동네"라는 카페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가 그 동네에서 팩션을 올리고 있네.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어.
사실인척하려다 보니 주인공이 1인칭이 되고 그러다 보니 모든게
자기고백적인 혐의를 쓰게 되니 결국 진하게 못그리고 수채화가
되고 말더군. 자넨 유화를 그리게"
"여섯번째 여자"는 그의 장편소설 제목이 될 것이지만 내가
여기에서 단편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리라고
굳게 믿네,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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