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배동에서 와병하는 K의원을 문병하기 위해서 우리는 팔래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대구에서 이런저런 분들이 올라왔고 서울에서도 몇사람이 함께했다.장 비서관이 길을 안내하러왔다.커피숍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던 어떤 기관의 기조실장과도 우연히 조우하였다.K의원은 이 사람과 같은 빌라 동네에 살았는데 지금은 조금 위쪽으로 옮긴 모양이었다.비서관이 안내를 나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빌라는 왜 값이 오르지 않을까---.내가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세기에 빛나는" 일행은 모두 모였고 황혼이 자욱하게 넘실대는 그 분의 안식처를 찾았다.장중한 대 저택형 빌라라서 그런가,장중한 비극미랄까 비감한 느낌을 일행에게 던지는듯 하였다.시간이 잠시 무겁게 정지된듯한 느낌을 받으며 일행은 온갖 표창의 상징물들이 산재한 거실을 지나서 그 분이 누워있는 방으로 안내 되었다.잠시 방안에는 초점이 흐린 그 분과,그래서 나를 몰라보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한 무리라는 두가지 존재물만 존재하는듯 하였다.나는 마음을 편히 갖고,비켜 서 있는 사람으로 처신코자 하였다.그 분은 애써 사람을 알아보려하지 않는듯 하였다.과연 虛舟, 빈배 어른이구나, 감동 같은 것이 속에서 저려나왔다.황혼이 자욱한 거대한 빌라의 2층에서 나는 조셉 콘래드의"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에 나오는 죽은 주인공의 숙모들이 살고 있는 브륏셀의 회색 저택을 문득 떠올렸다.나는 매체뿐만 아니라 직접 대면도 자주 있었던 이 노 정치인의 뼈만 남은 모습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비서관이 리모콘을 누르니 침대 머리가 조금 올라왔다.가장 가까웠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인사를 하자 3대에 걸친 킹 메이커,이 세기의 정치가는 아는듯, 혹은 분간을 못하는듯 공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그 다음으로 자신감이 있는 분이 인사를 하였으나 환자는 아예 모르는체 하였다.잦은 내방객들이 성가신듯 "빈배"께서는 일행을 안중에 두지않고 입술을 움직였다.아무도 그 말, 아니 우물거리는 음정을 알아채지 못하였다.하지만 나는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누워서 본다면 왼 쪽 벽면에 큰 전자 시계가 있었는데도 그 분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몇시고?"라고 하였다.네번이나 그 분은 같은 질문을 하였으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고 나도 아는체 할 용기가 나지않았다.비서관이 침대에 올라가서 겨우 그 말을 알아차렸는데"네시 24분입니다."라고 소리친건 내가 맨 먼져였다.알고 있던 답이 적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이제 떠나야할 시간이 왔다.일어서면서 몇 사람이 "오래 사시라"고, "몸 보전 하시라"고 문병과 덕담을 하였다.환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몸 조리 잘 하십시요, 선배님"선배님이란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 지금 기억이 없다.아, 그런데, 그 순간 이분이 뼈만 앙상한 양볼을 움직여서 나를 보며 방끗 웃으시는게 아닌가.이 극적인 순간은 거기에 서 있었던 모든이들이 증인이 되었다. 나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혹시 이분이 가당치도 않은 나의 덕담에 혹시 시니칼한 반응을 보이신건 아닌가,그러나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며 전율한 내 자신이 순간 초라해짐을 느꼈다.일행은 나에 대한 이분의 반응을 최고의 것으로 평가하였다.순진무구하게 빵끗하며 보여준 이 분의 마지막 웃음!한편 "몇시고?"하며 왼쪽 벽면의 시계를 보면서도 시간을 물은 이 분의 거대한 시간 담론은 윌리엄 포크너가 그의 장편 소설 "음향과 분노"에서, 시계를 "시간의 대 영묘"라고 묘사하며 시간과의 처절한 투쟁을 내세웠던 명제를 떠올리게 했다."지금 몇시고---?"밖으로 나와서 깊은 숨을 내쉬며 시계를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우리는 동광단지 뒤편의 중국집, "함지박"으로 갔다."제가 서울 사는 텃세로 한 턱 쏘겠습니다."대구에서 올라온 몇분들, 특히 H 선배에게 내가 부르짖었다.술이 좀 돌자, "석자는 잘 있지요?'내가 H 선배에게 불쑥 물었다."석자"는 H 선배의 친 여동생으로 H 대학의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 첫해에 연합 독서 서클에서 만나 몇차례 데이트를 한 사이였다.동갑나기끼리 서로가 공연히 가슴 태우던 그런 대상이었다.지금은 의사의 부인이기도 하다.선배가 놀라는 모습을 보였으나 힘들어 하지는 않는 모습으로 보아서 결혼 생활은 듣던대로 평탄한가 보았다."무슨 관계였어?""도인" 내지 "신선"같다던 노 군이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물었다."관계는 무슨---.""그런데 어이 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하노?""아이구 알았다. 애끓는 관계였다. 이제 속이 시원해?"쇤 이스트 디 유겐트, 아름다워라 청춘이여---.Harvest Moon/Tim Jan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