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미국 TV 연속극 에서도 사라진 이동육군 병원(MASH)이 나오는 이야기이니, 참으로 오래된 이야기 이지요.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강원도 화천 인근에 부임을 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동전만한 하늘과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였어요. 화천 댐을 막아서 호수가 만들어지면서 산과 산의 허리를 감고 구절양강이 된 기이한 물굽이는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함께 신임 소위를 그의 고향이나 그가 살아온 터전과 단호하게 격리시키는 바리케이드에 다름 아니었지요. 운이 좀 좋아서 통역장교가 되었고 그래서 미군들에게 1주에 한번 위수지역에 대한 영어 브리핑, 정말 운이 좋을 때는 화천 시내 "은하 식당" (아, 기억이 나네요)에서 불고기 파티. 군사우편을 통해서 오는 위문편지는 오래걸렸고 나에게는 그리 너그럽지 못한 美大生이 아깝다는듯이 부쳐주는 학보. 월간이 아니라 주간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 스러웠는지요.(군대 갔다왔다면 다들 기억이 있죠?) 민간인들의 옷조차 당시에는 어느 일부나마 군용에서 전용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군용 패션의 시대였으므로, "우리는 젊은 사관, 피끓는 장교다. 저하늘 푸른 창공에 나르는 솔개---" 그렇게 소리지르며 입었던 군복인데도 그 속박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하루아침에 거짓말 장이가 된 참담한 심정은 일기장에나마 간첩죄라도 짓는듯이 내밀하게 끄적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신체검사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무슨 한미 기동훈련 준비 협조사항 때문이었던가요---. 그간 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걸로 보았던 호수변의 "MASH" 즉 이동육군병원 영내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어요. 붉은 십자가의 병원 표시가 요란한 퀀싯 건물의 입구에서 신임 소위가 어색하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중위 계급장의 간호장교가 나타났어요. "멸공!" 배운데로 부치는 경례를 받지도 않고 이 아름다운(!) 육군 중위는 미소지으며 닥아오더니 아주 사소한 몸짓으로 김소위를 툭 치며. "무슨 일이시죠" 다정하게 물었어요. 그때 반짝이는 노란 중위 계급장 보다도 더 노란 머릿타래가 여군의 군모 사이로 굵게 삐져 나온 것이 보였죠. 요즈음이라면 "브리지 머리"라고나 했을까. 그때야 염색 머리조차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인데---. 영문과를 나온 김소위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캐더린 바아클리", 그 실존 인물이던 "아그네스 폰 그로우스키"가 환생을 한 것인가---, 바보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아, 그리고 "루테난트 블론드 헤어"라는 생각도---. 두 사람은 그 후에 몇차례 식사도 했었던 것 같아요. 다른 ROTC 장교들처럼---. 그러나 깊은 관심과 호기심도 군무의 일상적 엇갈림과 질서의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는 없었지요. 한 여름에 부임해 간 그곳에서 물안개가 많이 피어 오르는 가을이 찾아왔을 때 쯤, "ROKA!"라고 악을 써야 들리는 유선 통신으로 "루테난트 블론드 헤어"가 김소위를 찾았어요. 그날 저녁 물안개 핀 호수변에서 저녁을 먹었던가요. "나 내일이면 원주로 가요" 내가 왜 그 2급 비밀을 들어야만 했을까. 너무나 의아하여 나는 그저 "중위님! 머리칼 색갈이 왜 그렇습니까?"라고 마침내 더듬거렸을 뿐이었죠. 그리고 중위가 몹시 당황해 하자, "정말로 아름다워서 물었을 뿐입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덧붙였지요. "왜 앞머리만 노랑머리인지는 나도 몰라요. 로스케 피가 섞였는지---. 절대로 그런 내력은 없는데---" 답변은 어느듯 단호했고 낭만적 분위기는 파장이었어요. 지금은 자랑일는지, 하다못해 표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노랑머리는 사회의 주류에서 이탈될 수 밖에 없는 天刑같았죠. 혼혈은 원래 군복무의 의무도 혹은 권리도 없었는데---. 루테난트 블론드 헤어가 떠나간 자리에는 스캔들과 루머 (혹은 진실일는지도)가 난무햇어요. 본인이 없을 때 무수히 생성되는 그런 뒷말---, 그리고 나도 이제는 그곳에서 그런 뒷말 쯤은 들을만한 위치가 되어있었죠---. 포병 연대장의 이름이 나왔고 군납업자의 이름도 나오더니 급기야 병졸의 이름과 ROTC 선배의 이름까지---. 후송환자들을 태운 앰뷸런스의 앞 자리에 쓸쓸히 타고 떠나던 루테난트 블론드 헤어의 쓸쓸한 옆 얼굴이 물안개의 잘디잔 포말 속에 한동안 오늘날로 치면 레이저 홀로그램처럼 어른 거리며 김소위의 시야를 흐렸어요. 화천 시내 그녀가 거처하던 방의 이웃들이 퍼뜨리는 악의에 찬 역겨운 소리도 들려왔고---. 사실은 그들도 하다못해 설파제 한통쯤의 은전은 받았을텐데도---. 수 세대를 몰래 숨죽여 오다가 그녀에게서 불쑥 튀어나온 "블론드 DNA"는 무슨 숙명적 메시지를 그녀에게 밤마다 소근댔으며, 그녀는 이 악마적인 소근거림을 이 변방의 물안개 옆 이동육군병원 안팍과 화천 읍내에다 증폭기를 달아 스피커에 실었을까---. 지난 여름 나는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갔다왔죠. 푸른 빛이 도는 무시무시한 사마르칸트의 불타오르는 회오리는 그 속의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로 더욱 소름이 끼쳤습니다. 아, 이곳을 지나야 서방정토가 나타나는가---. 그러나 대부분은 그 무섭고 끔직한 소리 앞에서 무릅 꿇거나 더욱 애잔한 것은 그 소리에 함께 하거나---. 루테난트 블론드 헤어가 마침내 순진무구한 신임 소위에게 마지막으로하려다가 기겁을 하고 움추려버린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