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두 바이얼린 협주곡(2회 연재중 마지막)

원평재 2004. 2. 19. 08:37

 

"멘델스존: 바이얼린 협주곡 마단조 3악장"입니다. 

제3악장(Allegro molto vivace)에서는 1악장처럼 우아하게
시작하다가 다시 분위기를 바꾸어
관현악의 반주 위에서 바이올린이 강렬하고도 화려하게
약동을 하면서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제3악장야상카페 만만세!!감상하기

시몬 다실은 젊은 딜레탄트 장교들의 성원으로 이제 춘천의 중심부로 진출하면서 이름을 "린덴바움"으로 바꾸었다.개업 떡을 얻어먹으며 소위들도 고참이 되어갔고 마침내 나도 제대 날짜를 꼽게 되었다.제대가 겨우 한달이나 남았을까.디스크 자키 L양이 저녁 초대를 하여서 조금 고급 음식점에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난다. 우리는 해동이 되고있는 춘천의 초봄 저녁을 즐기며 무작정 의암 댐 쪽을 걸었다.군용 추럭이 가끔 전조등을 올리며 옆으로 질주해갔다. 가끔 추럭 속, 군복으로부터의 야유도 있었다.얼마를 걸었을까---.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내가 돌아가자고 했고 아쉬운 듯 디스크 자키는 말을 따랐다.독신장교 숙소로 돌아가자면 늦은 시간이라 위병소 통과 등,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그녀의 집이 있는 서부시장까지 숙녀를 모시는 신사도를 나는 지켰다.거의 그녀의 집에 다달았을까,갑자기 카츄샤 복장의 사병이 그 집의 대문에서 튀어나오더니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디스크자키를 끌다시피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수런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리고,무언가 말리는 소리 속에 가족들이 분명 있다는 낌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내가 있을 분위기나 당위성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나는 곧 자리를 떴다.이튿날 데미안이 연락을 주었다.당시 그는 이미 월남 파병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그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그녀와 카츄샤 병사는 어릴 때부터 친했는데 한동안 서로 죽고 못살더니 요즈음은 거리감이 생긴 것 같더라. 지난 여름에는 소양강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 찍는다고 난리를 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한적도 있을 만큼 서로 가깝더니---,나는 화난듯한 데미안의 얼굴을 보면서 조금 생각이 정리되었다.맞다!데미안은 그녀를 놓친 것이 분하였다기 보다 그 동안 보아왔던 그녀의 그런 모습이 분한 듯 했다.아니 그게 그건가---.나와 그녀가 밤중에 가던 의암 댐 인근에는 그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거기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카츄샤가 그녀를 때렸다고 했다."때린건 말이 안되지만 열받을 일은 했네!"단호한 나의 대답은 당시에는 자랑스러웠을 것이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두 철이 덜든 시절의 택도없는 자기본위, 가련함을 모르던 오만시절의 반응이었을 것이다.단호한 나의 태도에 데미안이 어쩔수 없다는듯이 피식 웃었다."눈치 하나는 빨라서---. 하지만 가련한 여자 하나를 구제하라는건 아니야. 될일도 아니고---.""그만두게. 그녀가 날 속이거나 이용할려던 것은 절대 아니었을거야."그랬다.최근에 이런저런 남자 관계가 복잡하게 생겼고 아마도 디스크 자키의 성품으로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관계의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디스크 자키의 꿈꾸는 듯한 눈매를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때 한참 유행한 노래, 잡히지 않는 것을 꿈꾸는 내용의 "스페니쉬 아이즈"에 꼭 맞는 그런 눈매를 그녀는 소유하고 있었다. 앵글로 색슨 계통의 "아름다운 브라운 아이즈"라는 노래에 나오는 그 영리한 눈매와는 거리가 한참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어쨌든, 내가 그런 그녀의 눈매를 좋아한 것이 사실이자 진심이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예서 머물수 없는 상태였다.멋진 신세계가 분수에 맞지않는다면 하다못해 아라비아 열사의 신기루라도 잡아야할 형편이었다.당시로는 그녀와 관련된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다.안타깝게도 나는 기회를 갖지 못한 존재이거나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앞으로 언젠가 그런 기회가 온다손 치더라도우리는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으리라. 인연이란 어찌 이리도 까다롭단 말이냐.제대용 폴더 백의 목울 조이며 나는 "린덴바움"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와 최후의 만찬을 갖자는 제의였다.반대를 못하는 수줍은 목소리가 무척 반기며 제안을 수락하였다.만날 장소는 우선 "린덴바움"으로 하였다.음악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이 무겁고도 안타깝게 흘러나왔다.이것은 공식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음악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나는 차이코프스키를 좋아는 하지만 그의 암울했던 일생과 더불어 그의 어두운 음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나는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은 감당하지 않는다는 룰을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었다.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느라 항상 꿈꾸는 눈매를 탕진하고 있었다.이윽고 차이코프스키가 끝나고 멘델스존의 화려한 바이얼린 협주곡이 흘러나오면서 그녀가 디스크 자키 룸에서 나왔다.내가 찻집으로 들어오면 항상 그런 순서였다.짙게 화장을 했으나 탁자 건너편에 앉은 그녀의 왼쪽 눈 아래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그놈도 틀린 놈이군---, 그냥 후려치는 시늉만 했어야지---, 둘 사이는 끝장이 나는 것이 좋을성 싶었다."좋아하시는 차이코프스키를 다 들으셨으니 이제 나가시죠" 그녀가 말했다."난 차이코프스키가 좋다고 지난 2년간 한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사실은 멘델스존이 나에겐 더 어울려요---"속일 줄 모르는 그녀의 눈매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그래서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었지요. 왜 꼭 차이코프스키 다음에멘델스존을 틀어주었는지를---? 어쨌거나 사실 멘델스존 좋아하는 내 맘을 꿰는 줄 알고 항상 고마워는 했지만요---."내가 약간 채근하듯이 물어보았다.그녀는 다소 더듬으며 답변하기 시작하였다."처음 심혼에 들어오셨을 때 차이코프스키를 틀고 있었는데, 미소 지으며 손과 머리로 연주를 따라하시길래 참 좋아하시는 줄로 알았죠. 우울한 그 분위기는 제 운명 같아서 제가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 뒷면이 멘델스존이잖아요. 그래서 앞면이 끝나면 습관적으로 그냥 뒷면을 걸었었지요---".습관적---아, 그리고앞면과 뒷면의 차이라---.무슨 거창한 의미를 찾을 힘도 여유도 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고단한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작은 습관과 오해, 오독과환청으로 인하여 생각지도 않은 파국으로 달릴 수도 있겠구나.강산이 두번 변한 후에 나는 그녀를 다시 몇번 볼 기회가 있었다.그녀의 온 몸에는 피곤이 서려 있었다.지지않으려는 가식이 겁많던 때보다 더욱 안쓰러웠다.하지만 나의 겸손 속에 숨어서 준동하는 꾀많은 오만을 지긋이 누르는 그녀 최후의 무기는 시간의 풍상을 겪고도 풍화되지 않고엄존하였다.스페니쉬 아이즈!꿈을 먹고 나른하게 만상을 좌시하는 스페인 풍의 눈매,그 눈매가 나를 압도하며 조용히 타이르고 있었다."꿈을 먹은 눈매를 이길 수 있어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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