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A Painful Case/가슴 아픈 사건

원평재 2004. 2. 16. 06:58
제임스 조이스가 쓴 "더블린 사람들"은 단편 모음집이지만 각 단편의 배경이 모두 더블린이라는 동일 지역이고, 각각의 주인공들도 모두 더들린 사람들이며 그들의 활발치 못한 사고와 비틀린 생각, 마비된 행동 양식들이 동일한 주제로 작용하기 때문에,전체 단편들을 묶어서 하나의 장편으로 보는 것이다. 이건 유통업을 하는 내가 무얼 알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등학교 3학년때 영어 선생님(편의상 P선생님이라고 부른다)이 "더블린 사람들"을 입시 특강의 독해 자료로 쓰시면서 알려준 지식과 기억의 파편일 뿐이다.내가 특히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가슴 아픈 사건", 영어로는 "A Painful Case"였다. 그 단편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당시 아직 머리에서 피도 안마른 녀석이 무얼 알았으랴만은, 주인공의 사는 모습이 P선생님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P선생님이 1년 열두달 김치 깍두기의 도시락을 싸오시는 것은 이미 선배들에게서 익히들은 전설이었고,집안의 가구가 모두 철재로 되어 있어서 족히 몇십년은 버텨온 것이라는 것도 알만한 학생들은 모두 알았다.왜냐하면 그 분은 명절날이면 평소 괜찮게 본 학생들을 몇몇 불러서 솔직히 말하자면 고명이 없어서 건건하고 별로 맛이 없는 떡국을 끓여서 먹인 다음, 자기의 청교도적인 근검 절약성을 일장 훈화로 들려주시고는 마침내 자기가 대한민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라는 자랑을 하시기 때문이었다.과연 철재 책상과 서가에는 동서양의 양서가 그득하였다.그분이 한국에서 가장 책을 많이 보신 것은 검증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모든책을 저자의 모국어로 읽었다는 자랑은 수긍이 되었다.저 강철같은 아니 강철로 된 서가에서 빛나는 원서를 보라,청소년기의 내 가슴은 존경으로 뛰었다.댁에는 좀 팍삭 늙으신 사모님이 항상 모든 일의 수발을 하였고 자녀들은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런 분은 자녀가 없으신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단편 "가슴 아픈 사건(A Painful Case)"의 내용은 이렇다.우리 선생님 처럼 모든 가구를 튼튼한 철물로 장만한 더블린의 어떤 공무원이음악회를 갔다가 중년의 부인을 알게된다.부인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젊은 딸을 대동하였는데 공무원 노총각과 정작 말이 통한 것은 부인이었다.두 사람은 문학과 음악 이야기로 공유하는 공간을 급속히 구축하였는데실제적인 대화의 공간은 부인의 집에 마련하였다.딸은 이 노총각에게 관심이 없었고 남편은 외항선의 선장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끔 조우하는 경우라도 혹시 딸의 혼사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관대하게 보았다.아니 무슨 관계랄 것도 없었다.두사람의 이야기와 사색의 스펙트럼은 광역대였고 현란하였으나니체와 또스도에프스키가 두 남녀의 몸을 달구지는 못하였다.아니 부인의 시선은 갈망이었으나 철제 가구 속에 사는 이 노총각의 마음은항상 이성과 논리 속에 차갑게 침잠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날 저녁, 황혼이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방을 어둑어둑하게 만들었을 때부인은 정념을 이기지 못하여 남자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그러나 남자는 질겁하였다.어떻게 이 엄숙한 사색과 관념의 시간에 망녕된 욕망을 나타내느냐는 엄한질타의 목소리가 나왔다.그리고 둘의 관계는 파장이었다.빌려간 책을 돌려주느라 둘은 단 한번 다시 만났으나 남자의 차가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도 철제 가구 사나이의 일상은 변할 줄 몰랐다.어느날 저녁,그날도 그 사나이는 홀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석간 신문을 보다가 소스라쳐놀랐다.사회면 신문의 제목은, A Painful Case---글쎄,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까, "끔직한 사고"가 더 정확할는지 몰랐지만 나는 "가슴 아픈 사건"으로 항상 주장하고 싶었다.어떤 중년의 부인이 지상철의 횡단 지점에서 부딛쳐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부인은 아마 어쩌면 술이 좀 취해있는듯 했다.A Painful Case---.이게 기사의 내용이었다. 영국의 신문이 얼마나 교활한가. 직설법은 피했으나술취한 부인의 단정치 못한 행동을 꾸짖는 뉴앙스가 기사에는 그득하였다.철제 가구의 사나이도 밥을 다 먹지 못하고 기분 나쁜듯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그의 속마음을 조이스는 표현하지 않았으나 이 피식은 사나이는 이미쓸모없는 인간,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철제 가구 사나이의 태도를 고3 때의 내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낄낄거렸다."그 놈 고자인가봐"마침내 키 크고 조숙한 녀석이 쉬는 시간에 부르짖었고 교실은 웃음바다가되었다.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어쩌면 그는 우리 영어선생님과 같지 않을까---.우선 철제 가구가 그랬고 도시락이 나타내는 검소한 생활, 조로하신 사모님과의 냉랭한 생활---.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P선생님의 토라진 마음의행로는 이 철재 사나이의 행보를 자기나름으로 해석하여 답습할만 하였으리라.아니나 다를까 P선생님은 단편을 읽으면서 그 부인을 정숙지 못한 여자라고 준열하게 매도하였으며 청소년기의 낭만정신이 평생을 망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다.하지만 경험 없는 우리의 눈에도 이 작품의 진면목은 그런 것이 아닌듯 하였는데---.P선생님께서는 작품 해설과 훈시(?)가 끝난 다음 아일랜드가 가난하여서 남자들이 백인치고는 키가 형편없이 작고 힘도 약하다는 야릇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쉬는 시간에 키큰 친구가 또 외쳤다."야 임마들아 힘이란 그거야, 그거!"사실 P 선생님도 키는 유난히 작으셨다.

졸업후에 내가 P선생님을 다시 뵌 것은 세월이 흘러서 그분의 회갑연에 초대를받아서 였다. 아니 초대 받았다기보다 그분과 인연이 많았던 우리 동기회에서 연회를 마련하였기 때문이었다.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소공동 조선 호텔의  볼 룸에잔치를 차렸는데 P 선생님께서 우리 준비 위원들에게 자기 부인의 고전 무용 시간을 꼭 넣어달라는 것이었다."네?"예전에 이미 할머니 같은 풍모를 가지셨던 분이었는데 아무리 고전 무용이라지만 춤을---."죄송하지만 혹시 재혼을 그 사이에?"누가 조심스레 물었다."에끼 이사람아.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예쁘고 정력이 좋은데 내가 재혼을하겠어. 요즈음도 밤마다 덤벼들어서---. 그래서 우리 춤을 배우라고 한거야.힘 좀 빼라고---"선생님은 웃지도 않으셨다. 우스셔도 이건 좀 오버하신거다. 아무리 제자들이 성장하였다고 해도---.하긴 이분이 예전부터 좀 이상하신데는 있었다.어릴 때 본인이 노비 문서를 모두 태우고 노비 해방을 시켰기 때문에 집안이매우 가난하게 되었다던가.노비라면 고려시대, 아니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의 어느 때까지가 아니던가.

BMW를 움직이신다는 사모님께서는 러쉬 아워 탓인지 한시간 반을 넘겨서 식장으로들어오셨고 늙은 제자들 중의 일부는 벌써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세상이 참 좋아졌다. 마침내 들어오신 사모님은 늙으신 할머니가 아니라 헬스로 단련된 중년의백여우, 아니 늘씬한 부인이셨다.이걸 무어라고 하더라, 아- 쭉쭉빵빵, 죄송스러워라.쭉쭉빵빵 사모님의 고전 무용은 그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였고 잘 차려입은한복 밑으로 외씨 보선이 나왔다 들어갔다 들락날락, 날락들락하자 혼미하신 선생님이 먼저 "얼쑤, 죽인다"라고 추임새를 넣었으며 이윽고 만당한 제자들도 사제동행이었다."저 여자가 정말 사람 죽인다니까"나는 그날 헤드 테이블에 앉았기 때문에 한 때 청교도적으로 근업하신 철제 가구의 선생님께서 뜨거운 여자의 손목을 만지고나서 감전사고가 난 전말을 소상하게 보고 들었는데, 말석 테이블에 죽치고 앉아서 술이나 퍼마실걸 하는 후회뿐이었다.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나는 해외 출장 일정이 잡혀있었고, 내심 그런 피치못할 스케줄이 다행스러웠다.선생님을 비난하는 뜻의 소리가 아니라 안쓰러웠달까, 걱정이 앞서는 장면에나타나고 싶지 않았달까---.축의금만 보냈을 따름이었다.축의금은 괜히 보냈던가 보다.선생님께서는 정년 퇴임이 끝난 얼마 후, 이런저런 호의를 보내준 제자들을초대하였다.장소는 서초동 서울고등학교 앞에 마련한 오피스 텔이었다.철제로 된 서가에는 영어로 된 원서는 물론이거니와 라틴어와 러시아의기릴 문자로 된 책들, 한문 전적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대한 민국 최고의 독서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독서 수행"의 도량이우면산 자락에 펼쳐진 셈이었다.백여우가 부채춤을 추는 사진이 크게 한쪽에 붙어있었고 누드의 수준은 아니지만 반신이 너그럽게 옷 밖으로 나와있는 조금 작은 사진이 액자에 들어가서 책상 모서리 쪽으로 "나 잡아 봐라"하면서 서 있었다.선생님도 웃통을 벗고 아령 체조를 하는 모습으로 벽에 붙어 있었다.무거운 아령을 들고 벽에 붙어 있으려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장난이 아니게 머릿 속에서 문득 멤돌았다."선생님 이거 얼마에 전세 드셨어요?" 내가 얼른 물었다."이 사람아, 전세라니, 1억 이상 주고 샀어.""사모님 이름으로 등기하셨지요?""아, 그럼. 저 사람---."선생님이 부채춤을 가리켰다."아, 할머니 사모님으로 하셔야지요."이건 내 속에서만 멤돈 말이었다.

며칠전에는 남산 국립극장 주차장에서 한판 벌이고 있는 마당놀이. "이춘풍 전"을 여섯 커플이 구경갔다.아, 그런데 이춘풍 역을 우리 선생님이 하시고 계시지 않은가.하지만 프로테고니스트랄까, 프리마 돈나로 김성녀 씨가 등장하자 우리 선생님은 문득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배우 윤문식이 이중인화로 나타났다.앤태고니스트 격인 백여우는 어디로 도망가버리고 이중인화 없이 평양 기생 추월이는 처음부터 내 눈에 들어왔다."철제 가구들만 나뒹굴더군"선생님이 날린 오피스 텔에 갔다온 동기생들이 전한 말이었다.오피스 텔은 경매에 넘어갔고 그외에도 그 여인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얻은 빚이 예사롭지 않은듯 했다고---.특히 카드 빚을 깔아놓아서 합치면 몇억은 된다더군---.동기회장이 딱하다며 전한 말이었다.지금 이춘풍이 마당에서 곤장을 맞고 있었다.텐트 사이로 숨어들어온 겨울 바람이 매서웠다.

국립극장 옆자락에 벌여놓은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이춘풍 전"을구경하고 끝 장면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