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그려본 새내기 찬가

원평재 2004. 2. 27. 10:33


♣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 감상
클릭해 주세요 ♬ Akademische Festouverture op. 80

BRAHMS
Arturo Toscanini (conductor)
NBC Symphony Orchestra


금년에 어느 대학 인문계열에 합격한 작은 집 조카가  당숙인 나에게 인사를 왔다.나는 평생을 국책은행의 은행원으로 지내다가 이제는 명퇴를 하여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구민회관에서서민들의 경제학도 강의하고 주례도 서주며 나름대로의 자원 봉사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잇었다.당질 사이인 조카는 내일이면 신입생 환영 엠티를 간다고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팸플랫을 나에게 보여주었다.이녀석이 잔소리꾼인 집안 어른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계책으로나를 찾아오면서 내 주머니를 은근히 탐하는 것도 짐작이 갔으나가장 큰 원인은 내 아들 그러니까 이녀석의 6촌 형에게서 대학생활의 조언을 듣고 싶은 눈치가 역력하였다."환영사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작년에 같은 계열 들어간 6촌 형님은 어디 나가셨읍니까?""그래. 하지만 어른 앞에서는 6촌 형이라고 해서 6촌 형님이 어디 나가셨습니까--- 그런 표현은 쓰지 말거라. 그런데 이 환영사 작년에 네 형이 받은 팸플랫하고 내용이 같네. 괜찮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터라서 기억에 남는구나---""엥? 그럼 교수가 표절한 것이네요.""표절은 아니지. 표절은 남의 것을 베낀걸 말하는데, 이건 자기글을 다시 써먹었으니까 그 말은 맞지않고 글쎄 성의부족인가---. 하긴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같은 일의 반복이니까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같은 글로서 환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니.""그럼 펀글이나 두레박 같은 건가요? 아참, 당숙께서는 잘 모르시는 말이겠지만---""퍼온글이니, 빌린 글이니, 옮긴글이니, 수입품이니, 삽질이니 하는 것과도 다르다. 이 환영사는 자기가 쓴 글을 자기가 다시 이용한거니까!""우와! 당숙어른, 대단하시네요. 인터넷 언어를 다 아시고. 마음은 청춘이시군요.""임마, 몸도 청춘이다." 물론 이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다만 점잖치 못한 표현이어서 하지 않았지, 거짓말이어서 못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 말이 거짓말로 돌변할는지 누가 알랴.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는 작년에도 읽었던 똑같은 신입생 환영사를 정중하게 다시 읽어보았다.
<신입생 환영사>갓 입학한 새내기 인문학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십 수년 동안 초, 중등교육 기관의 좁은 울타리 속에서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여 이제 막 성년의 문지방을 넘어와서 마침내 최고학부라고 하는 광활한 학문의 신천지에 홀로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방금 들어선 대학교라고 하는 이 학문의 신천지는 다만 캠퍼스가 넓다던가, 건물의 규모가 높고 크다던가, 도서관이 웅장하고 스타디움이 장려하여 이제까지 다니던 학교와 다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 다른 점은 무엇이겠는지요? 첫째, 학교란 모두 공부를 하는 곳이지만 대학이라는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곳이 아니라 지식 추구의 연구 방법론을 터득하는 곳입니다. 초, 중등학교에서도 탐구학습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대학에서는 "탐구학습을 하는 방법론을 탐구"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방법론을 고민, 모색하는 바탕을 제시하는 학문이 바로 여러분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는 철학을 위시한 인문과학이라는 것입니다.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철학 서적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진정한 대학생이 되는 것이며 결국 컴퓨터나 경영학이나 현대 음악이나 산업 디자인의 바탕도 바로 이러한 인문학 영역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학시절은 개인의 생애에서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은 유일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의 기간입니다. 이것은 IMF 사태 때처럼 돈이 없어서 빚을 못 갚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은 대학생들에게 일정한 분량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여 스스로 실험할 기회를 줍니다. 이 실험은 성공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장래에 개인을 위해서나 그가 속한 커뮤니티, 나아가서 국가와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를 기대해서 세상은 젊은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황금같은 기회를 용기가 없어서, 혹은 게을러서 활용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는 물론 인류에게도 마침내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입니다.이 기간의 체험은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잣대가 되고 행동과 규범의 출발점이 됩니다. 대학시절이 바로 역사성을 갖는 이유입니다. 역사학이라고 하는 인문학에 젊은이가 심취하는, 또한 심취해야하는 이유와 당위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로 대학시절은 홀로 서기의 정신을 확립하여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홀로 서기의 범주에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인격의 도야, 가치관의 정립, 미래상의 구축, 그리고 구체적 측면에서는 경제적으로도 가급적 홀로 서기를 해야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이 합격을 확인한 순간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대체로 부모의 지갑에 의존하는 소비자의 처지가 되는 현상과는 달리 미국의 대학생들은 그 기간동안에 운이 좋으면 전문직 보조원에서, 그렇지 못하면 일용 노무직을 하면서까지 닥치는 데로 돈을 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모 밑에서 좋았던 시절은 이제 끝장이라는 현실을 그들은 직시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부류는, 나누는 범주에 따라서는 "대학생"이라는 통계도 보았습니다.입학 시즌, 미국 대학의 교정에서 여기저기 소규모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무리 지어 있는 가운데, 자녀들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떠나는 부모들이 대체로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좀체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쪽 문화에서, 더욱이 그 즐거운 날에 말입니다. 이제 그들은 완전히 홀로 서기를 한 자녀들과 마침내 이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대학은 이제까지의 여러분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거의 혁명적인 변화의 마당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이 속에서 무엇을 추구, 획득하는가의 성과 여부는 바로 이러한 차이점을진지하게 파악하는 의지와 인식력에 달려있습니다.다만 이러한 과정은 하루아침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여러분이 읽게되는 수많은 서적, 여러 교수님들과 선배, 친구들의 조언과 대화에 의하여 서서히 성숙된다는 사실도 느긋하게 가슴에 새겨 둘 일입니다. 한편 우리 대학의 곳곳에 산재한 인터넷 접속 장치와 디지털 자료들도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제 가슴 벅찬 인문학도로서 마침내 대학생활의 문을 열면서도 여러분들은 아직도 곤혹스런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즉 학부제로 들어온 여러분들이 앞으로 무슨 전공을 택해야하느냐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인 답을 하자면, 여러분들은 오늘날의 기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그 목표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시대는 너무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이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그 영향을 끼쳐서 누구도 미래의 어느 특정한 시점에 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불확실성(uncertainty)"이니 "혼돈 이론(chaos theory)"같은 어휘가 자주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훌륭한 민간 비행사에게 주는 "웰던 상( well-done award)"의 예를 들어볼까요. 해마다 수여하는 이 상의 선발 기준은 비상사태 때에 전례 없는 비행술을 발휘한 경우에 우선 순위가 돌아간다고 합니다.즉 비행학교에서 배운 고전적 기술이나 교과서적인 방법론이 아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변하는 이 시대에 미래는 그저 돌발사태에 다름 아니며 여기에는 과거의 공식이 아니라 유연하면서도 탄력적인 사고방식의 훈련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현재의 가치에 안주하지 맙시다.환영사의 첫 부분에서 철학을 강조하고 역사성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다전공 제도를 잘 활용하여 우리 인문대학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많은 도구학문, 즉 여러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또한 우리 인문대학에서는 여러분들의 다양한 인문학적 호기심과 탐구의지에 대처하고자 여러 가지 "연계 전공"의 학문 영역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유럽 문화학 전공"과 "언어 응용과학 전공"이 바로 그러합니다. 입학식을 앞두고 가슴 설레이는 330명의 인문대 신입생 여러분, 특히 이번 행사에 참가한 새내기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학교(university)의 중심은 인문대학(liberal arts college)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바로 캠퍼스의 심장(heart of varsity)에 있습니다. 자부심과 자신감 속에서 지성인의 길,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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