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해혼식/ 解婚式 (3회 중 첫번째)

원평재 2004. 3. 5. 05:32
충청남도 금산(錦山)에 있는 초등학교 동기의 초대로 "금오(金烏) 농원"을 찾은 것은 지난 식목일 연휴였다. 청명 한식에 先山을 찾아야되었지만 금오농원의 초대를 반년이나 미루어 온 탓에 우선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체면치례를 먼저 하기로 했다. 하긴 대전권으로 수도가 이전한다고 법석인데 이 친구의 농원 옆으로 싼값의 포도원이 나와있다는 귀띰도 속물인 나의 관심을 끈 원인 중의 하나였다. 청계천에서 원래 화공약품상을 하던 나는 컴퓨터 칩에 특수 인쇄를 하는 약품과 기술을 일본에서 조금 일찍 들여온 탓에 지난 수년간 좀 뜨는 장사를 해 온 셈이었는데 요즈음은 청계천 고가를 뜯고 그 아래 기계 공구상, 화공상, 나같은 특수 인쇄상 등등을 모두 철거한다는 바람에 솔직히 사업에는 마음이 떴고 어디 시골로 가서 농사나 짓다가 땅값이나 오르면 팔자나 고쳐볼까---,그런 한심한 생각뿐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새로운 아이템이 하나 나타나기도 했다. 세상이 이제는 일반 현금 출납 카드가 아니라 스마트 카드라고 하여서 IC(집적 회로) 칩을 박은 카드로 옮겨 가는데 이 칩을 플라스틱 판에 넣고 황금빛으로 프린트해 넣는 기술과 화공 약품은 나 아니면 코스트 다운이 어려운 시장 상황이었다. 이런 유리한 시장 전개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고가도로의 철거와 함께 사라지는 이곳 시장 바닥을 보니,나이 50에 모든 것을 버릴까하는 생각이 늙은 철학자처럼 울컥 치올라오는 어제 오늘이기도 하였다. 이런 심란한 상태에 도달한 데에는 오래토록 마누라와 떨어져 살아온 환경이 이제 한계점에 도달한 탓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여러해 전 남매가 중학교 들어갈 때부터 자녀의 위대한 선진교육을 위하여 두아이를 모두 데리고 미국에 가 있는 마누라는 상기 돌아올 생각도 없고 또 체류 기간과 목적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제 한국에 나오면 다시 미국 들어갈 수가 없다는 핑계등으로 귀국할 날짜는 까맣게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가면 무슨 핑계를 또 댈까? 아, 투자 이민이나 소자본 창업 이민으로 50만불 안팎을 보내라고 성화가 대단하지. 청계고가도로를 헐면 시에서 보상금으로 돈이 꽤 나올 것을 어찌 LA에서 나보다 먼저 냄새를 맡았나---.   하여간 주말 휴업기간이 시작되자말자 나는 특수 인쇄, 특수 화공 도장 등의 문구가 빛나는 자랑스러운 기술의 본산, "청계 케미칼 프린팅"의 셔터를 힘차게 내리고 금산을 향하여 BMW를 몰았다. BMW 이야기를 좀 해보자. 군자동 중고차 매매소에 있는 친구의 특별 알선으로 BMW 이 녀석이 뒷 트렁크를 찌그린 모양으로 내 손에 들어온건 거의 공짜 수준이었다. 압구정동의 졸부의 아들이 이 외체 차를 산지 며칠 안되어서 여자를 싣고 가다가 큰 사고를 낸 후 언론에 소문이 날까봐서 지급으로 팔아치우려는 순간이 포착된 셈이었다. 물론 전액 현금 일시불이라는 조건이었다. 이걸 카 인테리어 허가만 받은 곳에서 手功으로 펴내고 특수 도료로 코팅을 하니 새 차 보다도 더 새 것이 되었다. 청계고가 도로에서 군자동 중고차 매매소까지의 특징과 장끼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너희가 청계천을 아니?" 청계 고가도로 입구에 드높이 휘날리는 현수막의 예고처럼 7월 1일에 이 유서 깊은 생활의 터전이 깨부시어진다면 나는 상판 위에 올라가서 웃통을 벗어져치고 그렇게 소리소리 지를 것이다. 그리고 끌려내려오면 용금옥이나 곰보집에 가서 펄펄 끓는 국물과 수육 한사발 놓고 쐬주 한병 걸친 후에 청계교각을 부여안고 대성 통곡할 것이다. 아마 맨 먼저 쫒아오는 놈들은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우리 화공 약품상 조합의 이사들일 것이고 다음은 군자동 무학성 캬바레의 늙은 댄서 박양일 것이고 그 다음은 글쎄, "포토 21세기"의 카메라 우먼 박기자일까 아니면 광고회사 "날뫼"의 카피라이터, 여류 작가 선생 P일까---.   나르는 양탄자라고 어느 광고에서 멘트가 나왔던 BMW는 고속도로에 나오니 제 실력이 나왔다. 이 녀석은 착 가라앉아서 목촌을 지나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이라는 도로 표지를 보니 유관순 누나가 아니라 이제는 유관순 할머니가 더 옳지않으냐는 어떤 주장이 생각났고, 문득 마누라의 성씨도 같은 유씨이고 고향이 저 산너머 배방면이라는 생각도 들었 다. 그 동네도 임시행정 수도 이전설의 덕을 좀 보는 모양인데 이로 인한 처가의 유산 싸움이 눈에 보이는듯 하였다. 아내와 떨어져 살며 알게된 늙은 댄서 박양은 무조건 복종형인데 날 때부터 그랬을까,아니면 세파에 시달리고 마침내 닳고 닳아서 그리되었는가, 카메라 우먼 예쁜 박 기자는 포커 페이스로 유명하다. 약간 슬픈 얼굴에 표정이 없지만 촌철살인하는 기지로 사람을 순식간에 정신 못차리도록 웃긴다. 그녀가 찍어대는 사진도 내용상의 명암이 독특하고 짧게 달아놓는 제목이나 설명을 담은 캡션은 더 일품이다.남자관계로 크게 상처 받은 일이 있고부터 결혼과는 담을 쌓고 사는 여자이며 나같은 얼치기 중소 상공인들이 그녀의 밥이었다.  한편 카피라이터 작가선생은 항상 에피큐리앙, 쾌락주의자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차가운 뱀 한마리가 있음을 나는 안다. 차는 마침내 대전을 지나 통영쪽으로 나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대전 인근에서 갓 만드는 통영으로 가는 로드 맵을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연목구어가 이런건가, 실없는 생각이 입을 움직여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 작가선생이나 태우고 올걸---. 내 친구와의 약속에 너무 집착했나, 소문을 경계했던가? 왜 그런 재미나는 생각을 못했을까---. 치밀하지 못했던 일정을 자책하는데 금산 IC가 나타났다. 금산도 이제는 중국 인삼에 눌려서 맥을 못춘다는 신문 기사 생각이 났지만 지방의 중소도시 치고는 부티가 나는 동네처럼 보였다. 친구의 농원은 이 곳에서도 다시 험한 길을 거쳐 20분을 달려가서야 나타났다. 아니 시커먼 얼굴에 밀집 모자을 쓴 내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서 다시 한 5분쯤 차의 밑바닥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농로를 안내하고서야 "금오 농원"이라는 팻말을 보여주었다. 멀리 금산 지구국이 보였다. 아니 지국국은 산 꼭대기나 중턱에 있는줄 알았더니 동네 바닥에 있네?" 내가 엉뚱하게 힐난하였다. "모르면 가만있어. 여기는 전 지역이 해발 300미터 이상이야. 내가 노상 자랑하는 것이 반딧불이 아닌가. 7-8월이면 반딧불이가 하늘을 덮어. 얼마나 청정지역인가 말이야!" 그는 내무부의 국장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정부에서 일하며 도시 생활을 향유했던 사람이다. 배도 나올만큼 나왔었고 얼굴에도 살이 많이 붙어있었다. 그러던 그가 체중은 10킬로 이상 빠졌고 온 몸이 근육질로 날씬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밀집모자를 쓴 얼굴 밑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잔주름이 수도 없이 많았고 악수를 하며 쥔 손도 거칠다는 표현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말하자면 완전히 시골 농투서니가 되어있었다. "금오 농원이라니 고향 생각 했구먼?" 내가 물었다. "그래, 고향의 금오산에서 따왔지. 그래도 난 고향에는 등돌렸다." "왜? 국회의원 공천을 못따서?" 내무부의 경력이 그런 지위를 탐하게끔 했을 터였다. "아니야, 예전에 선친의 농토가 꽤 넓었는데 공단이 들어서며 모두 수용되었잖아. 당시 시가로는 논밭 값을 다 주었는데 그 돈 받아서 대토를 하자니 주변 땅값은 이미 엄청 오른거야. 땅도 잃고 조금 받은 돈은 경험없이 이것저것 해보다 다날렸지. 그래서 이 골짜기에 들어와서 이 모양으로 살지. 이제 고향 근처에도 가기 싫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앞쪽 밭과 야산 사이로 시골 똥개 정도의 동물이 날렵하게 뛰었다. "노루다!" 내가 조금 자신없는 소리를 질렀다. "아, 고라니구나. 저런 동물이 여긴 지천이야." 내 나라에도 야생 동물이 있구나. 금산 지구국이 있을만한 곳이구나---. 그가 사는 모양은 나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아파트에 사는 나와 컨테이너 박스 두개를 붙여놓고 사는 그의 생활터전은 외견상 전혀 닮은 꼴이 없었는데도 무언가 근사점이 있었다. "부인께서는 자주 오시지 않는가?" 내가 물었다. "어, 한주에 한번은 오지. 밑반찬을 만들어서---. 자고 가지는 않지만---" 그의 어정쩡한 대답으로 미루어 한주에 한번이라는 빈도수는 믿을만한 수치가 아닌듯하였고 자고가지는 않는다는 쪽은 믿음이 갔다. 그래, 홀애비 냄새---, 이게 그와 나의 닮은 점이었구나. 그의 농원은 한 만평가량 되었는데 포도원이 천평, 약간의 논, 그리고 나머지는 밭과 야산이었다. 비닐 하우스도 하나 지어놓고 채소를 기르고 있었다. "수입이 좋아?" "말 말어. 농촌에서 돈 나올 일이 어디있나. 연금 받아서 이런데 넣으면 마누라 굶겨. 난 현직 때 비자금 조금 있던거 마누라 몰래 조금씩 집어넣고 모든 일은 손수하지. 저 비닐 하우스 모양보라구, 순 엉터리 수준이지. 나무들은 예전에 알던 사람들한테서 묘목을 얻어다 심거나 죽는다고 내다버린 것들을 여기 심은 거야. 희안하게도 다 죽어가던 나무들도 여기 오면 힘차게 살아나지. 나는 이런 나무들하고 연애하며 살아, 하하하." 그가 시원하게 웃었고 나도 그저 농담이거니 하며 따라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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