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군인 남편은 자주 오렸다?"
내 친구 P가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 무얼 꾸미는듯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또 말은 이렇게 막 놓아도 되나. 어쨌던 유부녀인데---.
아니 유부녀가 아닐지라도 나이가 마흔이 넘었거니와 어쨌던 인간관계의 차원에서라도---.
하긴 인간관계라는 말에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무슨 사연이라도?"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럼요. 매 주말 마다 오잖아요."
P의 눈을 건너다 보며 그녀는 답을 하는 건지 말을 맞추는건지---.
"남편이 군속이요?"
내가 바보처럼 끼어들어 물었다.
"아냐, 현역이야!"
내 친구는 단호했고 프리티 우먼도 낄낄 동조했다.
"이 장사 몇년했소?"
내가 화를 내며 물었다.
"23년했죠. 그쵸?"
그녀가 내 친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로이타 홍콩 특파원하다 들어왔을 때 부터 시작했으니 그 정도는 되었네. 맞아,
그런데 너 이 년 그때---, 하하하."
그러자 "이 년" 소리도 즐거운듯 둘은 배를 잡고 또 웃었다.
"너 그때 몸 팔았구나."
건설 회사에 평생을 바친 건축가가 술이 150세쯤 되어서 소리 질렀다.
나도 이미 120세쯤 되어서 호기심의 경지를 넘어 화기(火氣))가 등등했다.
"그래, 너 그때 부억떼기 했지, P국장 잘 다닌 그 식당에서!"
아, 이게 무슨 망발인가.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술이 취해 인간을 등급 메기고 귀천을 가름하여 무시하고 욕하고---.
시내 버스 차장을 하던 아가씨들이나 모래내 천변에서 밀주를 따루던 아가씨들의 자녀들도
지금은 벤처 기업에서 국제 특허를 갖고 내일을 위해 쏘거나,
회전 초밥 장사로 시작햐여 빌딩을 하나쯤 소유하는 시대가 아닌가.
황순원의 장편 "日月"이 소 白丁의 숙명을 한뜸 한뜸 수놓은 작품이라면,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실도 허구도 아닌 팩션이 시공을 넘나드는 시대가 아닌가---.
시대는 혁명적으로 바뀌었어.
그녀는 조금 울었다.
나는 그녀가 식모살이라는 말 때문에 울었다고 생각해서 가슴이 아팠고,건축가는 갈보 소리 때문에,
그리고 P국장은 1년이나 되도록오랫동안 이 만복정에 들르지 않은 탓이라고 자책하는듯 했다.
이제 모두들 프리티 우먼이 흘린 눈물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정답을 스스로 밝혀 주기를 기다렸는데,
눈물을 얼른 닦은 그녀는 예쁜 얼굴에 결코 정답 같은건 담지 않기로 작정한듯 싶었고,
결국 우리 셋도 모두 빚진 기분이 들어서,결론 같은건 캐묻지 말고 다음 부터 열심히 이 곳에 오리라는
각오만을 다졌다.
"집 지어서 전셋방 면한다더니 어디야? 비원 어디라고 했잖아?"
P가 눈물 닦은 얼굴에다 대고 또 물었다.
"그럼요. 비원이 저희 안마당인걸요." 프리티 우먼.
"까불지 말고 제대로 대봐!" 다시 글쟁이 P.
"프리티 우먼이 식당에서 식모살이 할 때부터 밥사먹으러 다녔다고 너무 그렇게 막말 하지마.
마담도 백년지객이라고 너무 호락호락 하지 마쇼, 가슴 아프네." 점수 딸려는 나.
"야, 비원이 옛날 종삼이나 종묘 뒷골목이야. 비원이 안마당이라면,또 무슨 수작 붙이는
비즈니스를 한단 말인고---?"
의미가 통하는듯 하면서도 말도 아닌 소리를 꽤꽥 내지른 것은
200세가 넘은 건축가가 마침내 토한 막가는 말.
프리티 우먼이 배시시 웃었다.
"국장님, 요즘도 옛날 신문사에 새벽마다 나오셔서 구내 식당의 죽을 드시고 비원 둘레로
조깅을 하신댔죠. 거기 달리시다가 보면비원을 내려다 보는 빌라가 몇채 있을걸요?"
"아, 네댓채던가 있던대! 그거 도시 미관과 전통을 다 으깬 악마의 성이야, 안그래?"
"그 중의 하나가 제 빌라죠. 4층 집이죠. 4층은 제가 살고 밑에 층은 모두 분양했어요.
50평씩 방 넷, 화장실 둘!"
"허걱!"
이건 내 친구가 장난친 감탄사였고 놀라움은 이보다 더 컸다.
"비원이 다 내려다 보이는 그 빌라가 정말 마담꺼야?"
"비원이 제 안마당이라고 했잖아요."
"아, 당뇨 때문에 아침마다 지금도 일찍 나와서 조깅하며 이놈의 집이 어떤 놈 집이냐고 욕한
그집들 중의 하나가 마담꺼구나.!"
우리는 비원을 내려다보는 빌라를 위하여, 아니 프리티 우먼을 위하여 건배하였다.
"마담 같은 사람이 왕궁을 내려다 보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 군사정권 때라면 장군의 집이었을테지만---."
건축가가 건배 제의를 하였다.
"맞다, 맞어, 왕궁의 불꽃 놀이를 위하여 브라보!"
내가 소리 질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축재를 위하여!" 글쟁이 P의 건배 제의였다.
"그 땅을 어떻게 샀소?"
내가 물었다.
세상에 왕궁의 옆자락, 도심의 산록에 무슨 터가 있었을까.
"혼불을 보던 날 샀어요."
묻는 말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하여간 기대보다 나은 답이 나왔다.
J 회장이 이승을 하직하던날 프리티 우먼과 아들과 딸, 그리고 친정 부모 등 다섯명은
어디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하남시 근처를 통과하게 되었단다.
애들 아버지는 어디가고---.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궁금증을 꾹 눌렀다.
그런데 굵은 불비 같은 것이 하남시 언저리에서 죽죽 내리더란다.
친정 아버지가 처음 목도하고 "아, 어떤 위대한 어른이 세상을 하직하시는구나"하고 탄식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회장의 유택이 있는 곳이었다.
친정 아버지가 다시 말을 잇기를, 가늘고 긴 불비가 휘돌아 감돌아 다니면 훌륭한 사대부의 여자가 죽어서
그 불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이다.
저녁에 식당을 열려고 서둘러 돌아오는길에 보니 바로 그분이 오너인 국가적 대기업의 계동 본사에
상등(喪燈)이 달리고 왕회장께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매체를 장식하더란다.
그 때도 만복정은 인사동에 있었다.
계동 사람들도 단골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계속 / 마지막회는 내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