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3회 중 첫번째)
비 오는날 저녁에 세 친구가 만났다.
공무원을 오래하다 나온 나와 언론계에 오래 종사하다 나온 P는 청년시절에 "청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서 활동하다 알게된 사이이고
건축과를 나와서 빌딩 건설하는 건축가로 평생을 지낸 K는 청맥에서 활동하며 시를 기차게 잘쓰던
강미 누나의 동생으로 나와 나이가 같았다.
강미 누나와 P는 우리보다 한살 많은 동갑내기로 초등학교 동기였다.
고등학교 시절,나이 한살 많은 친구 누나에게는 무언가 사람을 사로잡는 매혹감이 있어서
그걸 전율로 받아들이면서 꼭 죄를 짓는 느낌때문에 얼굴을 붉히곤 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오늘 이야기는 강미 누나 관련이 아니고 프리티 우먼과 혼불이야기이다.
셋이 만난 곳은 인사동 중에서도 조계사 쪽에 가까운 허룸한 한옥 식당이었다.
"인사동에 이런 곳이 백군데는 되는 것 같애"
이곳은 언론계의 P가 노는 물이었지만 나도 이 동네는 좀 안다는 투로 유머를 섞었더니,
"말 마라, 이런 집이 천군데는 된다"라고 대뜸 걸직한 답이 P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천군데나 되는 듯한 전통 한옥이 즐비한 이곳에서 하루에 굽히는 굴비는 몇 만마리나 될까.
"만복정"이라는 평범한 옥호의 식당에는 할머니가 주방을 맡고 있었고 연변 아줌마가 심부름을,
주인 마담인듯한 곱상한 여자는 우리보다 먼저와서 큰 나무뿌리를 깎아만든 원탁에 둘러앉아 이미 주흥이 도도한
어떤 패들과 술기운이 한참 올라 있었다.
우리는 풀뿌리에 앉았던가?아니 우리가 무슨 섯뿌른 풀뿌리 민주운동 패인가.
우리도 어김없이 큰 나무 뿌리를 큰 기계 톱으로 자르고 큰 대패로 밀어부친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아서
굴전과 파전과 황태구이를 안주 삼아서 50세주, 그러니까 소주에 백세주를 칵테일한 국산 리큐르를
홀작거리기 시작했다.
50세주가 몇순배 돌아서 도루 100세주가 되었을 즈음,
이곳 터주대감인 P가 큰 소리로 장내 정리를 했다.
"마담, 거긴 그만 되었고 이리로 와~~~(요)"
글쎄 "요" 소리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마담이 뽀르르 자리를 옮겼다.
70세주쯤 마신 나는 조금 걱정되었다.
오늘 여기서 저쪽 패들과 서부활극, 아니 광화문 활극 벌이는건 아닌가 하고---.
그러나 마담의 아름다운 눈웃음에 이 모든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프리티 우먼"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귀여운 여인, 앙증맞은 여인이
고옥 주점에서 살짝 곱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
그림은 "Leda and Swan"제우스 신이 백조로 변신하여 아름다운 부인 레다를 유혹하였다.
입으로만 황진이 찾고 실제로는 미아리 텍사스, 천호동 텍사스 등, 텍사스 문화만 산재한 이 나라도
이제는 인사동 한 누옥에 이토록아름다운 여인을 메주 띄우듯 곱게 띄우고 있으니 맛있는 간장,
아니 아름다운 전통이니 멋이니 하는 것쯤은 찾을 자격을 갖추어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뭐 프리티 우먼의 저 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도 몸 파는 여자아니었던가---.
그래, 우리도 조금만 참으면 황진이가 다시 술상차려 나오는 나라의수준은 곧 될거야---.
"저눔들 뭐야?" P가 또 소릴 질렀다.
우리 앞이라서 고함이 좀 센가.
"아이, 국장님패들처럼 글쟁이죠, 뭐. 조용히 하세요."
"우리가 언제 글 썼어?"
"그럼 뭘 먹고 사세요?"
"이 양반은 무식한 민초들 사기쳐 먹고 살았고 저 사람은 부실 빌딩 올려서 먹고 살고
나는 정치하는 놈들 싸움붙여 등쳐먹고 산다, 왜?"
등쳐먹는다는 말에 내 등이 좀 화끈거렸다.
술병이라도 날라올라---.그러나 나는 곧 이 아름답고 귀여운 여인의 절묘한 눈웃음이 방안에있는
대여섯개 원탁 위의 공간을 가로지르고 넘나드는한, 그런 불상사는 기우리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건 적어도 만리장성이나 마지노 선 보다는 더 견고한 방어선이리라.
아름답게 나이든 여인의 절묘한 눈웃음, 그리고 꾀꼬리 같이 귀여운 음성까지라니---,
이 여인에게 남편이 있다면, 그는 백조로 변신하여 아름다운 레다를 차고앉은 제우스에 다름아니리라.
그런데 이 프리티 우먼에게 남편이 있을까---?
리처드 기어같은 녀석이야 단연코 기웃거리겠지만.
(계속 / 모레 수요일 새벽에 또---)
저 아래에 인사동 약도가 있습니다.참고 하시기 바랍니다.오랫만에 듣는 노래가 콧날을 시큰거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