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퇴계 어른을 만나고 이천 쌀밥 집을 나선 때는 밤이 꽤 이슥했어요.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천정(天頂)을 올려다 보며 "시골이라 북두칠성이 보이네"하고 감탄했지요."정말 그렇군요---. 머리 꼭대기에 북두칠성이 있네요!"나는 속아주었어요. 천정 즉 제니쓰(Zenith)에 있는 여섯개의 별로된 국자 모양 비슷한 별자리는 어릴 때부터 우리를 북두칠성으로 곧잘 속여왔지요.일년중의 지금, 북두칠성은 북극성이 있는 북쪽에서 오른 쪽으로 팔을 벌린 쪽에 모여있는 일곱개의 별자리로서 그 왼쪽의 같은 위치에 있는 W자 모양의 카시오페아 좌와 함께 일년내내 보이는 별자리이지요. 아까 사람들이 혼동한 것은 오리온 좌였을겁니다---.최소 수십광년에 달하는 천체에 넋이 빠져 지상의 거리감은 달콤한 척도 속으로 잠시 잠겨들었으나,사실 연수원까지 갈길은 길고 긴 쓴맛이었어요. 음식점으로 나올 때는 연수원 차를 이용했으나 요즈음이 어느 세상인가요. 기사들도 이미 퇴근한 오밤중에는 그런 편의가 제공되지 않았지요.에쿠우스를 몰고 온 사설 콜택시 기사는 걸어서 40분, 차로는 10분도 안되는 거리를 25000원 내라고 우겼어요. 싸움 끝에 20000원으로 깍아서 사람들을 태워 보내고,나는 싸움 끝에 화가난양 걸어가기로 했답니다.어중간한 시골의 밤길은 가끔 헤드라이트가 비칠 뿐 호젓하고 귀끼가 서려 몸이 오싹했어요.아니나 다를까 이마에 피가 낭자한 중년의 여인이 길섶에서 갑자기 나타났어요."이 박사! 잘 만났다. 흐흐흐""어? 민희 아냐? 넌 호주에 이민가서 살잖아---""너 좀 만나려고 잠시 들렀다. 흐흐흐""흐흐흐 하고 웃지마라. 꼭 귀신 만난 것 같다""지난 20여년 동안 난 귀신처럼 살았어!""내가 너하고 결합되었더라면 내가 귀신처럼 살았을걸---. 나 죄진 것 없어! 너 만난 후부터 군대에서도 안하던 담배 피우고 술 배웠어!""그 때 내가 그렇게 널 좋아했는데 넌 왜 날 버렸어?""버리다니. 네가 먼저 시집갔잖아.""내가 네 맘 알아보고 선수쳤지. 그래도 네가 날 버린건 사실이야.""아이구, 그럼 이번엔 내가 흐흐흐다. 그런데 너 이마에 선혈은 왜 낭자해""네가 얼마전에 인터넷 카페에 첫 키스를 하다가 정수리가 깨졌다고 썼기에 그런 모습으로 왔다. 그런데 사실 첫 키스할 때는 정수리가 아니라 입술이 터졌어. 그 정도로 기억력이 사라진거냐, 관심이 사라진거냐?""둘 다야.""꾀는 여전하군. 근데 왜 날 버렸---""흐흐흐" 이건 얼른 내가 삽입한 소리였어요."그래 좋아, 흐흐흐 안할께. 근데 왜 떠나갔니?""우리가 음악 감상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때 넌 메디칼 닥터하고 막 헤어졌을 때였잖아. 또 그 앞에는 죽은 시인 J, 그리고 그 앞에는 사진 기자 K, 그 앞서 대학 다닐 때는 옆 학교의 학생회장과---. 그 녀석 지금은 미국의 곡물회사 카길에서 근무할껄, 아마. 내가 도망을 친 다음에도 널 먼발치에서 보니까 또다른 사진기자가 나타나더군. 버진이 아니어서 내가 도망쳤다는 것이 어쩌면 20여년전의 솔직한 고백이었을는지도 몰라.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 사실과 행위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너의 강변, 그것이 나를 더욱 미치게했어. 마침내는 역겨웠고---. 그나마 헤어질 때까지 넌 가장 심각한 남자 관계는 미궁에 빠뜨렸어. 그건 우리가 결혼하고 나면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니 그게 말이나 돼? 지금도 못 가르쳐주겠지?""정말 치사하네. 그게 그래 무슨 문제야. 널 사랑하면서 난 내 몸과 영혼을 다 주었는데!""지금부터 20여년도 더된 세상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난 자신이 없어. 거리에서 카페에서 거리낌 없이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난 아직도 근심, 걱정이 앞서는 사람이야." 민희는 성격대로 발끈했지요."흥! 그 옛날에도 벌써 서울에는 전혜린이 있었고, 독일에는 루이제 린저가 Mitte Des Lebens를 써 냈으며, 한강변에서는 정강자가 발가벗고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했어""하지만 민희야, 전혜린은 우이동에서 쓸어졌고 루이제 린저는 평양 갔다와서 정신차렸으며 정강자는 판을 일본과 외국으로 옮겼어. 요즈음은 다시 서울 활동이 있더라만---""아이구, 이 박사. 넌 구제 불능이구나, 예나 지금이나---. 그러면서도 진보주의자인체는 하지마.이 치사한 인간아!"순간 나는 우리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저 오랜 논쟁의 격랑을 옛날처럼 이제 겨우 빠져 나왔음을 간파했어요. 본질에 대한 토론이 마침내 내 성격에 대한 해묵은 질타로 넘어왔기 때문이었죠.그가 내 인격을 모욕하기 시작하면 이 끝없는 논쟁(endless debate)은차라리 결론없는 결론에 도달하기 시작하였지요.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도 주변부로 화제를 돌렸어요."남편이 포세이돈의 제물이 되었다는 소식은 참 안되었어.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니?"나는 차마 "너의 과거 때문은 아니었니"하고 직설적으로는 물어볼 수 없었어요. 하긴 거의 직설적 표현이 되어버렸지만---."아는체 하지마. 그리고 위로도 하지마. 호주에서는 남자들이 몇날 며칠씩 바다 낚시라도 나가지 않으면 미쳐버려. 특히 한국생활에 익숙했던 사람일수록---.""남자 아이는 예전 어릴 때, 말을 좀 더듬는다고 걱정했던 것 같은데---""용케 별걸 다 기억하네. 전화로 서울에서 그런 소릴 할때는 벌써 호주 이민 수속이 거의 다 끝나갈 때였어. 하여간 그 아이도 영어 배우며 한국말 더듬던거 다 버렸어.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 나와서 지금 시드니에서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마침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음성에도 생기가 돌았어요.. 아, 이 나이의 우리들에게는 항상 어두운 과거만 있고, 미래는 언제나 자식에게서만 시작하는 신천지인가---."호주는 언제 돌아가?" 내가 물었지요."조금 있다 갈거야.""어떻게?""저기 연수원 입구에 황금빛 수양버들 봤지? 그게 말하자면 중력 이동장치 같은거야. 그리로 몸을 풀며 들어가면 시드니 인근의 블루 마운틴에 많이 있는 유칼립터스 고목 나무로 몸이 빠져나와. 수양버들과 유칼립터스 나무는 매우 유사한 특성이 있어. 물론 생물학적인 분류에서 과는 틀리지만.""귀신 다 되었네, 그리고 지난번 호주 대화재 때에 그 나무들 다 타버리지 않았어?""그땐 정말 귀신 다될뻔 했지. 운이 좋아 내 집도 건재했고 내 중력 이동 장치인 유칼립터스도 살아남았어. 약 올라? 그걸로 나는 미국 LA에 있는 애인도 만나고 오거든---.""그래, UCLA에도 그 나무 청청하더군. 내가 그 대학 기숙사인 리이버 홀에 있을 때에도 우리나라 수양버들 생각나게해서 노스탤지어로 속 썩었지.지금 우리 청년 학생들이 부시 방한을 반대하고 야단인데, 부시가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일으킬까?""말머리 돌리는덴 역시 천재구만. 난 귀신이 아니라서 시간이동은 못해요. 하지만 우리 능력 정도로도 부시가 내일 성명서나 기자회견에서 더 쎄게 나가진 않을꺼야. 그러니까 네가 그대로 한국 살아도 괜찮아. 전쟁은 안 일어나.""여긴 서울에서 떨어진 시골이라 그런지 별들이 잘 보이네. 퍽 낭만적이야.""말머리를 자꾸 돌리지마. 난 이제 로맨티시스트 아니야. 남반구에서는 별자리 이름도 기독교에서 따 온 남십자성이거나, 실용적 용처로 따온 콤파스 좌 같은거야. 남십자성은 남극에서 보면 하늘의 정점, 즉 제니스에 있어. 호주에서는 남위 30도에서 남극 쪽으로 보이니까 보통 지평선에서 30도, 그러니까 눈을 조금 들어 보면 척 보이는 위치이지. 아까 밥집에서 나올 때 들어보니까 누가 북두칠성을 잘못 지적해도 넌 슬그머니 속아주대---. 그러는 너의 자세가 난 늘 못 마땅해.""북두칠성이야 북극성에서 오른 쪽으로 팔을 벌려 놓고 보면 금방 보이잖아. 국자의 왼쪽 벽에 해당하는 두 별 사이 거리의 다섯배가 북극성과의 거리가 되니까. 북반구의 별자리가 신화와 낭만적 상상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남반구는 실용과 기독교적인 표제로 되어 있다는건 정말 몰랐네. 민희가 기독교의 어떤 원리주의 교파에 심취해 있다는 것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별자리하고도 관련이 있는지---?""들을건 다 듣고 앉아있네. 청춘 시절에 내가 여원이라는 잡지사 다니며 문학과 낭만에 심취했던 때는 그게 내 영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인줄로만 알았지,이제는 진정, 이 박사도 진정, 영원한 영혼 구제에 나설 때도 되었잖아. 박사면 뭐하니, 곰곰히 생각 좀 해봐."우리는 어느듯 황금 수양버드나무가 있는 곳 까지 왔어요. 바로 그 옆의 수련원 건물에는 커다랗게 "Bush! You are just axis of war, terror and genocide! We don"t need F-15, We want peace!!"라는 거대한 플래카드가 하늘을 뒤덮을듯 걸려 있었어요. 그 밑에는 우리말로 "조지고 부시는 부시 방한 반대!!"등등의 조금 작은 플래카드가 밤바람에 너플거리고 있었지요."플래카드가 하늘을 덮었네. 중력 이동하는데는 지장 없겠어?"내가 농담쪼로 물었어요. 사실 농담이 좋지, 잘못하다간 또 그 옛날처럼 밤을 새워 격론을 벌이곤 결론없이 헤어질 판이었으니까요."다시 한번 영혼 구할 생각 깊이 새겨봐!"어느새 그녀는 황금가지 속으로 너울너울 사라져가며 진정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어요.내가 정신을 차려서 수련원의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남녀 청년들은 "평양에서 만나요"를 열창하면서, 무대에서 스텝을 밟는 통일 일꾼들을 목이 터져라 격려하고 있었어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