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간 걸리는 동네 산길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짐작컨데 이 좋은 계절에 다들 더욱 좋은 곳으로 나들이 가지 않았을까---.그래도 우리 일행은 다섯이나 되었으니 고독이나 우수에도 대적할만 하여서 다행이었다.세시간 산행이 끝나고 보리밥 집에서 밥을 기다리는데 동기 한 사람이 다른 동기에게 웃으며 말했다."지난번 자네가 자네 부인 동기회 수첩에서 빼내와 가르쳐준 부산 주소지로 전화를 했더니 젊고 카랑카랑한 남자 목소리가 나와서 전화를 끊었지. 처음에는 이사를 갔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차츰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니 혹시 그 여자가 결혼 생활이 원만치 못하여서 연하의 남자와 재혼하여 사는건 아닐까하는 좀 섬뜩하고서글픈 생각이 들있어---."이런! 연하의 남자와 사는 행복 지수!우리 또래의 판단 지수로는 불행 지수이겠지, 알서.넘어가자.이 친구가 고등학교 다닐때 아주 순수한 연애 감정으로 동갑의 어떤 여학생을 만나다가 대학 들어가며 자신은 서울로 가고 여학생은 지방의 여자대학에 남으면서 헤어지게된,어떤 여학생을 한세대만에 문득 만나고 싶어졌다는 것이다.지금 만나봐야 영감과 할마이의 모양새로,아름답고 순수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영상을 버릴 우려를 감수하고서라도, 꼭 한번 만나고 싶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 그 여학생의 동기생과 결혼한 우리 친구 하나가 자기부인의 여고 주소록을 슬쩍하여서 연락 방도를 제공했던 모양이었다. 부인에게는 이 "싱거운 짓"을 물론 비밀에 붙였지만실제로 오랜 서울생활을 한 내 친구 부인도 부산에 사는 동기와는 내왕이 끊어진 상태였으리라---.고등학교 때 만나서 음악감상실도 가고 국화빵집도 가고---, 조숙하게도 프렌치 키스도 했다는데 그건 모를 일이었다. (내 친구는 설왕설래라고 표현하였다).그러던 중 이웃학교의 미남 하나가 라이벌로 나타나서둘은 한 밤중에 주먹다짐도 했고 내 친구가 이겼는데 희안하게도 그때부터 러브 스토리는 끝이 나더란다. 열정의 퇴조---,이런 무책임할데가 있나---."감정 해태에 따른 과태료"이런 국법이 없는걸 보면 국가도 기강 해태인가---.하여간 때 맞추어 그는 서울로, 그녀는 그대로 지방에.라이벌이었던 그 미남은 연전에 죽었다. 한 동네 사람이어서 그 소식은 우리 모두가 안다.어쨌든 이제 와서 청춘 시절의 해태를 반성하는지, 반추하고 싶어하는지,내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흔하고 당연한 논리로 이 친구의 생각을 말렸다."지금 만나면 서로 실망이 크지 않을까?! 만나지 말게---.""아니야,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걸 걱정할 단계는 이미 지났고 정말 늙은 사람으로 지난 인생을 반추해 보고 싶어서 그러네. 이런 문제라면 내가 감정상의 홍역을 이미 치룬 경험도 있어서 이젠 괜찮을거야. 그 이야기도 해줄터이니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심정을 한번 짐작하고 이해 해봐."그가 풀어놓은 또다른 이야기는 이러했다. 지금부터 한 10여년 전 쯤, 옛날 대학 다닐때 사귀던 여자로 부터 전화가 왔단다. 유명인사였던 내 친구의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부음 난"에 집안에 대해 조금 상세하게 보도가 되었고 연락처도 소개되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전화를 해 온 그녀와 연결이 되었는데 사는 곳도 강남의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내 친구도 버젓한 곳에 다닐때였고 여인의 남편도 듣고보니알만한데에 다니는 처지였다. 하여간 두 남녀는 무척 반가웠다. 고등학교 때 프렌치 키스한 내 친구의 실력이니까대학 때의 이 여인과는 진도가 모두 나갔었단다."우리 옛날처럼 정기적으로 만나면 어떨까?"진도가 다나가서 책걸이 까지 했던 그녀의 복습 제안이었다. 내 친구가 당장에 "노"라고 하였단다. 제안을 듣고 얼른 그런말이 나오더란다. 사실은 얼떨결이었다고 한다.분노한 여자가 아르마니 핸드 백으로 뺨을 후려치고 사라졌다.(아르마니였던지 구찌였던지 가짜였던지는 순전히내 맘이다. 싱겁게 나레이터가 왜 나왔냐고? 이게 포스트 모던식 내러티브 아닌가!).자아, 이런 딱한 경험을 이미 했음에도 고등학교 때의 그녀와는 만나고 싶다는 내 친구의 열정이 아무래도 만년의 순수, 순수는 무슨!고집인가---."이 참에 정기적으로 만나자던 여인의 제안을 물리친 것이 후회---, 그래, 아쉽다는 생각이 들때는 없었어?" 누가 물었다."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 그녀가 무얼 어쩌자는 생각이 아닐 수도 있었겠는데---."이 친구가 혼자 설악산 대청봉 산장에 올라가서 칼잠을 청하는데부인이 또 따로 눈보라를 뒤에 지고 들어오시더라는 것 아닌가.그래, 오만했던 죄, 그런가 하면 또 방만했던 죄, 우리가 산다는게 그저 죄값을 치루는건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바야흐로 이야기가 무르익자 얼마전에 고위공직을 그만둔 친구가 말했다."내가 학교 다닐 때 명륜동에서 가정교사를 했는데---"그집의 질녀가 근처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으로 같은 집에 기식을 하고 있었다. 예쁘고 명랑한 처녀였는데에도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1년여를 한 집에서 같이 지냈는데도 말한마디 걸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계절이 바뀔때마다 얼핏설핏 그녀의 영상이 뇌리를 스치는 대상이었다.그가 고위 공직 발령을 받고나서 얼마 되지않아 연락이 왔다. 전화로 그녀가 자기 설명을 다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금방 과외하던 집 질녀의 목소리를 알아보았고,과천으로 찾아온 그녀와 밖에서 저녁을 하며 서로살아온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남편이 사업을 하는데, 좋은 아이템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실패를 하여 이제는 남편은 사업운이 안따르는 사람으로 알고,업체를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데 역시 형편이 좋지않아서 집에서 내려오던 秋史의 글과 그림 두폭 짜리를 처분코자 하니 주선을 부탁 하더라는 것이다."얼마를 호가하던가?" 내가 물었다."한 1억을 받았으면 하는데 내가 살 형편은 전혀 아니고 어디 알선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인연은 그걸로 끝났으나 아직도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아니, 아니 추사의 그림을 감정하여 진본임이 증명되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그래, 그럴때 정말 돈이라도 많으면 직접 사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젊은 날의 샤롯데가 찾아왔는데---.한세대 전이라면 누군들 아름다운 추억이 없겠는가. 그때라면 바로 폴 앵커와 니일 세다카의 노래가 우리의 귓전을 때리고 폴 모리아 악단이 우리의 폐부를 후비던 때가 아닌가."사랑의 기쁨"의 첫 소절을 프랑스어로 한번 뽑아서 "쁠래지다무르 네두레 굼 모망---"하던 청춘 시절이 아닌가."나도---" 나도 한마디 거들려다가 그만두었다. 둘러보니 다른 친구들도 모두 "나도---"할려는 기세였는데 보리밥은 이미 다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