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현깃증을 느낀 것은 벌써 이태 전이었다.회장 비서실에서 결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듯 싶었다.아니, 우리나라에도 지진이 가끔 난다더니 이게 그건가---.벽에 걸어놓은 복사본 그림 에드워드 드가의 "무희"가 "토 슈즈"의 끈을 매다가 비틀거리는듯 하였다. 그리고 그림 전체가 흔들리며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세상은 말짱하였고 어느새 나는 미스 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쓸어지는 나를 미스 조가 받쳐 준 것이었다. 몇초 단위로 생각했던 땅이 움직인 느낌은 몇십초에 이른 모양이었다. 그것이 몇분으로 연장되었더라면 끔찍한 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또한 미스 조가 없어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부터 부딪치며 쓸어졌더라면---, 앗질한 상상이 이어지기도 하였다.처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신생을 확보하는 순간에 나는 "세라 뒨느"라는 크리스창 디오르에서 나오는 향수 냄새를 알게 되었다.미스 조의 그 독특한 향수 냄새는---, 알고 보니 회장이 해외 출장 때마다 사다준 선물이었다.비서실 안쪽의 작은 휴게실이랄가, 탈의실을 겸한 공간에 잠시 누워 머리를 식히며 나는 그 내부 곳곳에 베인 뒨느의 넘실대는 파도를 느꼈다.내가 잠시 쓸어졌다는 것은 완전 비밀이었다. 이 소문이 돌면 나는 당장 모가지였다.이런 호의와 인연으로 나와 미스 조는 마침내 몸까지 섞게 되었다."현깃증은 술로 다스리셔야죠"서른을 갓넘긴 미스 조의 제안에 그날 퇴근 후 우리는 대학가로 가서 청춘가수들이 라이브 통기타 쇼를 하는데에서 생맥주를 젊은이들처럼 마셧다. 아니 미스 조는 물론 젊은이였지. "왜 나한테 호의와 관심인가, 미스 조?""인영이라고 이름으로 부르세요, 상무님"붉은 맥주를 꿀걱꿀걱 마신 후 미스 조는 말을 이었다."상무님도 모가지 1호잖아요. 저도 미스 윤이 비서실에 들어오고부터 찬밥이 되었어요.동병상련이랄까요. 기분나쁘시죠?""천만에!"라고 말하려는 시늉을 그녀는 왼손으로 제지하며 말을 계속했다."미스 윤이 오늘 생리 휴가 아니었으면 상무님 쓰러지신 소문이 금방 났을거예요. 그 아이도 불쌍해요. 김회장에게 또 이용당하고 헛물만 켤텐데---."여상을 나온 미스 조가 이 회사에 온지도 벌서 10년이 넘었다. 경리과에 있다가 비서실로 옮긴 것은 순전히 미모에다가 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40대의 김회장과 주로 돈 문제로 그렇게 그렇게 되었단다.여상 나온 처녀의 가정이 어떨지는 불문가지였다."처음에는 돈이 원수라고 생각했어요. 병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원망스럽지 않았죠. 효녀 심청이라도 되는 기분이었으니까요---.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희집 가계도 어느정도 회복되고 난 20대 중반이 정말 처절했어요. 미칠 것만 같았어요. 특히 친구들이 시집을 가기 시작하니까 저는 거의 히스테리 속에서 살았죠.""관계를 청산하지 그랬어?""부인이 병약했잖아요. 그걸로 나를 계속 유혹했고 저도 타성에 빠졌죠. 타성이란 곧 타락이었죠. 또 이혼해 돌아오는 친구들이 위로가 되었구요. 이제 이럭저럭 즐기며 사는데에 이력이 붙으니까 이놈이 마침내 배신을 하는군요. 미스 윤, 고 젊은 아이를 꼬셔서 이미 몸과 마음이 다 건너갔어요---."서른을 갓 넘긴 여자의 얼굴은 어디에서 부터 나이가 묻어들어 올까.아, 눈가의 잔 주름 그리고 웃을 때 입 주위에 살그머니 들어서는 실낱 같은 협곡---. 작은 다이어먼드 반지를 검지에 낀 손가락과 손등은 아직 바람든 무우 같지는 않고 쓸만하였다.아내가 미국 보낸 아이들 뒷바라지하러 그곳에 장기체류하고 있어서 나는 그날 밤 술취한 미스 조를 내 아파트로 끌어드렸다. 자정이면 LA에 있는 아내로 부터 꼭 확인 전화가 왔다. 아이들 차 태워서 등교 시키고 마켓에 들렀다가 오는 시간이라지만 나는 한밤 중의 안식을 날려버리는 시간이었다.잠자리에서 미스 조는 능란하였고 나는 굶고 이빠진 호랑이였다. 자정에 어김없이 아내의 전화가 왔으나 미스 조는 잠깨지 않았다. 혹은 그런 시늉인지 미동도 않았다."우리 석달 열흘만 이렇게 살아봐요""하필이면 석달 열흘은, 왜?""나중에 알거예요."나는 그 때가 바로 나와 미스 조가 회사를 떠나야될 때이리라고 막연하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다.미스 조를 매일 끌고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하여간 우리는 신혼의 단꿈 같은 흉내를 낼수 있었고 "세라 뒨느" 향수 냄새는 아파트의 침실은 물론 부억과 화장실까지 마침내 점령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