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바쁘세요? 타시죠."앞쪽 윈도우를 내리고 그녀가 조금 높은 억양, 빠른 어조로 승차를 권유하였다."감사합니다만. 바빠서 곤란하겠는데요."나는 정말 바빠서 그녀의 난데없는 호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물론 내 거절의 말에는 논리상의 오류가 있었다."아, 바쁘시니까 타시라는 말씀입니다."그녀가 내 말의 잘못을 얼른 지적하였다.꼼짝 못하고 내가 조수석 문에 손을 댔는데, 열리지 않았다."뒷쪽 상석으로 모실겁니다. 옆 문은 보통 잠궈놓고 있거든요. 치한 방지책이죠, 호호호."나는 뒷자석 오른 쪽, 그러니까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지하철이 더 빨라서 제 차를 거절하셨다는 설명은 안하셔도 됩니다."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내 변명의 말을 재빨리 대신하였는데, 하여간 그때부터 나는 VIP급 여기사를 요긴하게 부리는 처지가 되었다.아니 요긴할 때 뿐만이 아니라 간혹 시간을 내어서 북한강변의 카페 촌을 함께 찾을 때에도 그녀는 역시 기사 신분이었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나는 시시각각 뼈빠지게 돈을 벌어서 미국에 보내야하는데 미즈 손은 무얼로 시간을 보내나요?""헬쓰도 다니고---, 아 참 최근에는 컴퓨터 학원에도 등록을 했어요."중학생 두 아이의 이 어머니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아이들을 위해서 만사에 손을 대고 있었다."재미 있어요?""아이구, 힘들어요. 한메 타자 치는 법부터 시작이니까요---."한강변을 드라이브하고 카페를 다녀 온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는 괜히 가까워진 느낌을 공유하게 되었다.강변 카페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어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어느날 그녀가 과감한 제안을 했다."우리 딱 반년만 부부처럼 살아볼까요? 몸매도 좋고 인물도이만하면, 호호호. 아, 그리고 지적 감수성이랄까, 그것도 수준급은 되고---. 살림은 잘 못살지만 그게 문제 될건 없겠죠.""아이구 맙소사. 미즈 손! 아까 점심 때 와인이 좀 과했군요.농담 수준은 와인 수준과 함수관계입니까? 아니, 아니, 이거 내가 평소에 가정사를 공연히 까발렸어요. 기러기 부부된 사연을---. 하여간 유부녀가 못하시는 말씀이 없네요. 지난번 강의에서 영문으로 읽은 하이 터치 문화라는 아티클 이후에 손여사의 진도가 너무 나가셨나 봐요."내가 펄쩍 뛰는데 입에서 침이 튀었다.나의 다변에는 미즈 손의 말에 농담 이상의 분위기가 있다는 직감이 작용했는데, 나로서는 그녀만한 마음의 여유랄까 틈새가 없었다.내가 조금 전에 말한 "하이 터치 문화"란 컴퓨터로 사군자를 치는 식의 21세기 테크놀로지 퓨전 문화를 말하였다.최고급 하이텍 오디오와 CD로 교향곡을 들으며 동양란을 기르는 독신자들이 불특정의 독신자들과 자유로운 교제를 하는 생활 방식도 하이 터치 문화이고,김영임의 창(唱)을 대형 PDP화면으로 자기집 지하의 바에서재현하며 남녀간에 격조있는 문화 관계를 유지하여도 하이 터치 문화라는 식이다.일본 사람들이 즐겨쓰는 하이텍으로 포장된 문화 방식이고 미국의 문화비평학자이자 "메가트렌드"의 저자 네이스비트(Naisbitt)인가 하는 칼럼니스트가 애용하는 다소 애매한 컨셉이기도 하였다.하지만 그때만해도 우리 문화의 척도로는 한참 낯선 범주였고 더우기 이 땅에 정착될 성질일는지는 아직 검증이 어려웠다.하여간 나는 시사문화의 시간 중에 영문으로 읽었던 내용을 주절주절 복습 식으로 다시 지껄였다.그 때 이래로 세상은 많이 변해서 이제는 서울에서도 서른이 넘어 중년에 이르는 수많은 독신 남녀들이 주말이면 인터넷으로 만나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며 꼬리 연처럼 앞 사람의 엉덩이를 붙들고 수십명이 질주하는 문화,그리고 저녁이면 결혼을 멀리한 혼기 지난 남녀들이 스윙 춤에 빠져서 스킨쉽을 추구하는 세태가 되었다니, 이게 모두 하이 터치에 가까운 문화가 아닐까---.아무튼 당시 그녀의 파격적 제안을 받는 순간에 내가 지껄인"하이 터치 문화" 운운의 복습 강의는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현상으로부터의 줄행랑, 도망을 위한---.그러나 손여사는 집요했다.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제안이 아니었다."이유는 묻지 마시고 반년만 그렇게 살아봐요. 제가 세탁이나 승용차 기사 역할도 다 해드릴께요. 물론 침대를 함께 쓰는건 아니고 출퇴근하면서---. 시한부로 참한 부인 한번 얻어보세요.""실례지만 부군은 지금 무얼하세요?""전자 관련 부품을 생산에서 납품, 판매 일체를 다 해요. 그 이상은 묻지 마세요.""지금은 외국 출장 중이신가요?""너무 묻지는 마시라니까요. 하여간 외국 출장은 아니에요.""그럼?""지방 공단에 새로 공장을 짓고 있어서 오래 내려가 있어요.""아니 그렇다면 함께 내려가 계시던지, 적어도 일주일에 반이라도---.""아이들 건사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매일 과외도 보내야하고---.""내가 부인을 나무라거나 매도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내 처지를 이용하시자는건 아니겠지요?""이렇게 진지하게 따지시는 분이어서 저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그냥 쉽게 수용하셨더라면 저는 아마 얼른 후회하고 후퇴해버렸을 겁니다."우리들의 기이한 관계는 대체로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오래 방치되어 자연친화적 늪이 된 부드러운 물길 속으로내 장대 노가 물살을 가르기 직전까지도 몇가지가 더 확인되기는 했다."이유는 묻지 마시고, 우리 부부는 이혼 재판정에도 서 보았어요.""싸웠나요?""그런 사건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요.""조정 기간이라는게 있잖았어요?""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이혼이 너무나 간단해요. 합의 이혼의 경우, 가정 법원에 가서 그냥 네라고 대답만 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일주일 내에 구청에 가서 신고만 하면 확정이 되죠. 다만 제 경우에는 그 신고 기간을 차일피일 놓쳤달까요---, 지금 하려면 새로 수속을 해야되죠.하지만 이번에는 남편이 도장을 안 찍어줄 것 같아요.""시댁에서는---?""아무것도 모르시죠. 제 친정은 어려웠는데 시댁분들은 대단한 부자랍니다. 아이들 어릴때엔 일하는 사람 여럿 두고 다 키워주셨지요. 그걸 생각하면 죄스러워요, 그 분들께는---"우리들의 이상한 관계는 꾸역꾸역 진행되었으나 그녀에 관한 내 지식은 거기에서 끝이었다.모든걸 다 아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일 투성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