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팩션) 폐궁 시크리 잔해에서 찾은 DNA (두번째)

원평재 2007. 11. 2. 07:37

 

 

"이 사람아, 회장님께 너무 인도 욕을 하지 말어. 그럼 인도 투자가 한정없이 늦어지고

자네 일자리도 날라갈거야---."

투자를 추진했던 기획실 간부가 그에게 조용히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

"아닙니다. 투자를 하실려면 신중하게 하셔야죠. 회장님이 다 아셔야합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항변을 하여서 기획실 간부가 쩔쩔매게 만들었다.

이 친구가 인도보다 한국으로 나가서 정착하고 싶은 생각에 올인을 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퍼뜩 떠올랐다.

 

"인도 여자들 예쁘고도 불쌍하지만 재미 없어요."

밤 시간의 환락을 조금 주선하려는 기획실 사람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인도에 카즈라호의 카마수트라 사원이 있어서 오해가 많지만 인도는 매우 도덕적

분위기가 사회에 꽉찬 나라입니다.

강남의 룸 살롱 같은건 생각지도 못하지요. 물론 부자들은 외국에 나가서 재미를 다

보지만요---.

남녀간의 데이트도 참 힘들어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놀아요.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무슬림들이 침략하면서 힌두 남자들이 여자들을 보호

하다보니 그렇게 생활 전통이 되고 율볍이 강화되었어요.

결혼도 반드시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해야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지참금을 갖고 가지요.

그런데 학교 다니는 젊은 남녀가 밖에서 어찌 교제가 없겠어요.

사랑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해야 합니다.

아니면 가문에서 쫓겨납니다.

결국 인도 대학생들 모두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요---."

 

"씽, 당신도 그렇게 결혼했고 가슴에 상처가 있어요?"

누가 짓궂게 물었다.

우리 청년 가이드의 성은 씽이라고 하였다.

카스트의 두번째 계급, 무사 계급의 성이라고 그는 자랑스레 이야기 하였다.

"제 문제는 프라이버시니까 말씀 드릴 수 없구요. 하여간 인도 젊은이들

상처가 많아요."

그의 눈에 우수가 끼는듯하였다.

하지만 비서실 사람의 이야기는 달랐다.

"저 친구 성이 씽이 아니더라구요. 평민 계급 같은데 자가발전을 해서

풍선을 띄우는거 같아요."

비서실 사람이 내게 낮게 말한적이 있다.

 

"회장님이 저 녀석을 워낙 좋아하시니 잘못하면 음해한다 하실까봐 말씀도

못드리겠고---. 교수님이 대신 좀 말씀해 주세요."

"나도 그런 점을 느껴요. 좀 자기 피알이 세고 과장이 있지요---."

나도 동의했지만 어쩔수는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의 눈에 가끔씩 묻어나는 우수와 슬픔,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 감성에 나도 동정심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슴에 멍 든 인도 청년이 많다고 했을 때에---.

 

그를 의심하는 것이 근거없는 발상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혐의점이 그의 말과 행동에 있었다.

카즈라호에서 였다.

그는 성애의 장면을 과장하지 않고 또 센세이셔널하면서 민망한 장면에서는

그 해석을 도덕적,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는 이성적 자세를 보였다.

예컨데 스와핑이나 쓰리섬, 포섬 등의 집단 성교 장면 같은 것은 정염을 함께

발산해야 그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는 당시의 철학과 믿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참으로 좋았다.

카마수트라의 경전 자체가 그런 식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런 윤리를

강조하며 진지한 목소리를 낼 때에는 모두가 감동을 하였다.

뉘라서 저 조각상에 나타난 질펀한 섹스의 장면에 관하여 그렇게 차분하고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가 있으랴.

흥분과 과장이 따르지 않는 정도라도 다행일텐데 그는 그렇게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지성, 진정성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카마수트라 사원 앞에는 가짜 골동품에서 부터 기념품까지, 그리고 특히

수많은 성애 사진첩들이 팔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소개한 책의 한국어 번역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책에는 물론 번역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책 표지에서 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표현이 전혀 통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결국 그가 진정 그 사진첩의 번역자라면 그의 한국어 실력 내지 전반적인

능력에 대하여 크나큰 실망과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말은 잘 하는듯 하지만 책을 번역한 내용을 볼때, 기초적인 상식이나 사고 자체가 

매우 부족한듯 보였다.

성애의 장면을 모두 수록한 화집의 제목은 "카즈라호의 상이다"였다.

무언가 뜻이 있는듯 하면서도 오역이고 오리무중의 제목이었다.

 

그 다음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이곳 폐궁, 시크리 성으로 오면서 일어났다.

   

 

 

  

당시 무굴 왕조의 수도인 아그라에서 이 폐궁까지는 37킬로 미터 가량이었다.

우리 이수로 따지면 100리 길이었다.

그는 누누히 이 점을 강조하였다.

지금도 이렇게 멀고 또 험한 길인데 몇백년 전에는 정말 그 고통이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힘든 길이라는 설명에는 악바르의 첫번째 부인, 힌두 출신의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었다.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그 당시, 무굴제국의 수도가 아그라였는데 아직 왕자를 보지 못하였다. 어느날 기도를 하기 위하여 맨발로
아즈메르라는 이슬람 성지로 갔는데 그의 시종이 "여기에서 가까운 시크리에 사는 슬림지스키라는 성자에게
물어 보면 언제쯤 왕자를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여 그에게 찾아가 물으니 "1년 안에 큰 부인에게서
아들을 볼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1년 후, 왕비 조다바이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자한길이라고 지었다.
악바르 황제는 시크리의 성자 슬림지스키를 지극히 신뢰하게 되고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시크리를 번성하게
해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악바르 황제는 아그라에서 37km 떨아진 시크리로 수도를 이전 하였다. 이것이 시크리성이 생긴 이유이다.

 

이런 설명 중에 그는 특별히 왕비가 이 곳의 성자와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악바르 왕은 징기스칸과도 혈통이 닿는 터키계로서 이 곳 인도에는 이방인으로

쳐들어온 셈이었다.

그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것은 오랜 전란으로 전장을 전전하면서 육체적인 문제가

발생하였거나 여러 이방의 여자들과의 관계에 따른 성적인 부작용, 그러니까 성병

까지도 포함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안내인은 강조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힌두 왕비가 낳은 왕자는 악바르 왕의 혈통이 아니고 그 수행 성자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이 청년 안내인의 암시적인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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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왕은 몽골계였다.

 

내 친구 회장은 이런 설명을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뿐만아니라 "우리나라도 옛날에 말이야---" 하는 식으로 어떤 종교에서 들으면

큰 일이 날 민간 전래 설화를 재미있게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그래, 그래, 그 백리길을 걸어와서 다시 기도하느라고 여자는 정신이 없고 몸도

얼마나 피곤했겠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별별일인들 안 일어났겠어, 흠흠흠.

회장님의 이야기는 "야담과 실화" 같은 이야기나 전설의 고향 같은 데에서  흔히 들었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참모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통 사회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아무리 권력이 대단했더라도 어쨌든 텃세에

휘말리고 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인도인들은 보시다시피 피부나 머리칼 색갈이 모두 아주 검습니다.

에보니 느와르라고 아주 흑단 색갈입니다.

그곳에 몽골 계통의 왕이 군사 몇만명을 데리고 쳐들어와서 눌러앉게 되니 아무래도

주위에 휘둘릴 수 밖에요---.

저도 사실은 좀 그래요. 왠일인지 저 머리칼은 철회색이에요. 아이언 그레이라고

하지요.

사람들이 놀려요. 제 피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머리 염색약을 쓰는데 화학 염료가 아니고 순 식물성, 허브로 만든 약제

입니다.

제가 한통씩은 선물로 드릴께요---."

그렇게 해서 그는 또 출처가 불명인 머리 염색약을 이제 흰머리가 성한 회장님께

잔뜩 팔기도 했다.

그의 머리칼 색갈은 물론 흑단이었다. 그런데 염색을 잘해서 그렇다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장사 행위는 또 그러려니 한다치더라도 일단 시크리 성을 들어갈 때의 일이

아무래도 또 석연치 않았다.

물론 사나흘 만에 인도의 대표적 관광지를 묶어서 본다는 계획에도 무리가

있었겠지만 그는 아그라에서 37킬로 밖에 되지 않는 이 곳을 탐방하는 것이 자신의

특별한 배려인 것 처럼 말을 하였다.

그런데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그 곳 시크리의 현지 가이드를 자칭하는

사람들과 힌두어로 많이 싸웠다.

 

  

내용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가끔 그들의 말싸움에 등장하는영어로 추리해 보면

동쪽 문인지, 서쪽 문인지로 들어가겠다는 우리 가이드의 주장과 이 지역 가이드

사이에 서로 자기네가 안내를 하겠다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 안내인이 이겨서 우리는 그를 따라 차를 타고 들어갔지만 떠나는 우리를

보고 현지 지역 가이드라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듯 욕을 하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무래도 시크리 성 안의 한 두 곳, 주요한 부분을 빼먹은 것 같았다.

물론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처지도 있고 하여서 우리 안내인 씽을 무조건 탓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절 설명이 없었고 마치 자기의 공으로 이 곳을 다 구경한다고 생색을

잔뜩 내는 것이었다.

 

  

 

 

 

 

 

 

 

 

 

 

 

 

 

 

 

 

 

 

 

 

 

 

 

 

 

조각과 문양의 기본 이미지는 코끼리의 코에서 따왔는데 마침내 용과 같은 가상의 이미지로

진화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