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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에 품는 겨울의 꿈

원평재 2005. 3. 21. 22:12
 

스콧 핏제랄드가 "겨울의 꿈"(Winter Dream)을 "메트로 폴리탄매거진"에

발표한 때는 1922년이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네소타의 겨울이면 아마도 여기 "만주 지방"의 추위와

세찬 바람에 맞먹을 것이다.

 

 

그곳에서 여름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골프장의 캐디 노릇을 하는

가난한 미테소타 주립대학생인 "덱스터 그린(Dester Green)"은

마침 골프장에 들린 그 동네 부호의 딸, 주디 조운즈(Judy Jones)와

인연을 맺게된다.

 

겨울이 추우면 여름은 더 뜨거운가.

두 남녀는 수영장에서 또 들판에서 청춘을 불태우는데 주디는 과연

대단했다.

 

핏제랄드가 여인을 묘사할 때 나오는 그 강렬한 터취, 보통의 사람이라면

직접 경험하기는 커녕 상상의 세계에서도 그려보기 힘든 그 황홀한 느낌을

풀어내는 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아마도 그의 아내, 색정광적인 요소까지 살짝 간직한 그의 아내 젤다에

대한 그의 탐미적 집착과 체험 때문이 아닐까?

그들 부부는 공개적으로 자유 연애에 탐익하지만 결과는 비극이었다.

 

아무튼 덱스터 그린은 주디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명성과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주디의 위상이 곧 아메리컨 드림을 성취하는 표상이라고 여긴다.

 

돈 많은 중서부의 미국인 가정이 그러하듯, 주디는 동부의 명문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여름 방학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캠퍼스로 돌아간다.

지방 주립대학에 그대로 남아있는 덱스터는 그 긴 미네소타의 겨울을

보내면서 닥아올 여름의 환희와 열락과 성취에 대한 기대로

"겨울의 꿈"을 간직하며 엄동설한을 보내지만,

다음해의 여름이 왔을 때 주디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내에게로 향한

다음이었다.

 

이후에 덱스터가 생애를 걸고 분투 노력하는 과정은 핏제랄드가 쓴 장편

"위대한 게츠비"에 나오는 주인공, 게츠비의 일대기와 비슷하다.

 

덱스터는 마침내 뉴욕 월가의 증권회사 맨 위층, 펜트 하우스를 점령하게

된다.

투자금융회사의 CEO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디가 나타나서 그가 획득한 아메리컨 드림을 확인해 줄

때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지 않고 항상 두리번

거린다.

 

핏제랄드의 감상주의가 여기에도 녹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 모든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감상, 사람사는 재미가 그러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진정한 승자는 이런 감상적 감성의 소유자여서는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산업계의 거물들이 예술 애호가, 딜레탄트의 면모를 공공연히 보이는

것은 사실이 그렇다기 보다 빅 쇼우일 개연성이 크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그 빅 쇼우에 속아 주는체 즐겨주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짜로 입을 벌리고 경탄의 모습을 보였을 때 이미 우리는

적절한 비용을 지불한 것이니까.

 

어느날 덱스터는 큰 돈을 맡기러 온 미네소타 고향 사람에게서 우연히

주디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덱스터는 고객의 앞에서 눈물을 짓는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증권회사의 CEO가 고객의 앞에서 눈물을 짓는 센치멘탈리스임을

드러냈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에 다름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해져야할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눈물을

보이다니.

 

"위대한 게츠비"에서도 주인공 게츠비는 젊은 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놓친 첫사랑의 여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은 성공한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핏제랄드가 그린 인생들은 모두 최고의 경지에서 추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바로 핏제랄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핏제랄드는 헤밍웨이와 비슷한 연대를 살면서 헤밍웨이 보다는

한발짝 앞서서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오랜동안 헤밍웨이를 돕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낭비와 방탕한 생활은 그를 결국 일찍 쓸어지게 한다.

 

이곳 중국의 동북 지방, 연길에 와서 어느날 갑자기 "겨울의 꿈"을

생각해낸 것은 춘분 날에 문득 바라본 황야의 모습 때문이었다.

 

 

여기 처음 와서는 광야의 시인 육사를 생각했고, 가까운 용정이

떠오르면서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했다.

 

문명의 첫 삽을 뜨고 있는 척박한 이 곳 캠퍼스에는 미국의 20년대,

재즈 시대(Jazz Age)를 살아갔던 독특한 감성의 작가, 핏제랄드와

같은 정서는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세계도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시야를

넓혀 깨우쳐야겠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은 이 미래의 대지에서는 깊이 갈아엎는 쟁기질

속에서 이런 감상의 형질은 상기 조탁되어 마모되어야 하리라.

 

 

이제 이 바람 찬 광야에도 분명 희망과 약속의 봄이 성큼성큼 

닥아 오고 있다.

 

이 부산한 춘분의 모습을 느끼고 지켜보게 되면서 갑자기

"겨울의 꿈"이라는 문학 작품이 생각났고,

그래서 캠퍼스 둘레에 넓게 전개되고 있는 이 황야의 마지막 겨울

모습을 렌즈를 통하여 포착해 둘 생각이 들었다.

 

이 황무지 같은 땅에도 분명 봄이 오면 이윽고 저 위대한 여름이

뒤를 이을 것이고,

그 때가 오면 지금 겨울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이 연변의

청년들에게

분명 알찬 열매가 무르익을 것이고 마침내 가을의 수확이 있을

것임을 나는 단정한다.

 

그래서 이 황량한 황야의 모습을 나는 오늘 렌즈를 통하여 붙들어

보았다.

이 거친 황야를 저 여름의 빛나는 잎새들과 머지않아 이중인화할 

기회를 기대하고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