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가족” 이야기(디트로이트를 떠나며)
저녁에 조카사위, 데이브와 조카 딸 세럴이 동생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모두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의 “메디컬 스쿨”을 다니고 있다. 아, 평소 내 동생이 덕을 많이 쌓더니 첫 눈에 보아도 참으로 좋은 청년을 사위로 얻었구나. 세상에! 미국 바닥에서 교민 3세에 해당하는 청년이 이렇게 예의 바르고 여유롭고도 은근할 줄은 몰랐다.
키도 크고 신체도 좋고 인물도 좋고 특히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무슨 팔 푼 같은 자랑이냐고 누가 욕할는지 몰라도 이런 청년을 내 자식 중에서 하나도 두지 못했음을 한탄할 정도였다. 가족 관계도 좋아서, 앞글에서 말했듯이 데이브의 조부는 시카고 최초의 한인 교회를 세운 분이었고 사돈은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돈은 그렇게 많은 분들이 아닌가 보다고 하였다. 그것도 또 좋은 점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의과대학에 다니지만, 졸업한 학부는 달랐다. 내년에 의대 졸업을 하면 또 혹독한 수련의 생활이 기다릴 텐데도 데이브가 미리 청혼을 하였고 내년 9월 2일에 디트로이트에서 결혼식을 하도록 모든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예비 신랑은 가만히 보니 처가의 부엌에서도 큰 일군이었으나 호들갑스럽지는 않았다. 우리말을 못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교민 3세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 내 조카와 조카딸도 우리말을 못하는 형편이 아닌 가---.
저녁 식탁에서 우리 집 아들과 며느리, 동생네의 예비 신랑과 신부는 스포츠를 주제로 열심히 의견 교환을 하였고, 듣고 있던 내 동생은 마침내 의학 분야의 여러 가지 재미있고 유익한 경험담을 쏟아 내었다. 의료 분쟁으로 재판까지 갔던 이야기는 내가 세 번, 우리 집에서는 두 번째 듣는 익숙한 레파토리였다. 2년을 끌던 그 재판에서 동생은 승리를 했는데 지금 같았으면 변호사들이 권했던 중재안에 사인을 했었을 위험한 도박을, 뭘 몰라서 했다는 것이다.
식탁 화제가 무르익는 보기 좋은 그 장면이 꼭 어디에서 본 것만 같아서 내가 흥을 돋구었다. "It reminds me of a film scene in which father in law tests and tastes his son in law---." 와인도 몇 잔씩 하고 샴페인도 터뜨렸다. 완치된 환자의 오래전 선물이라고 하였다.
저녁을 먹고는 지하층에 있는 탁구장으로 가서 단식, 복식을 편을 갈라서 쳤다. 심판은 내가 맡아서했다. 과거에 내가 탁구를 좀 했다고 뻥을 친 효과였다. 탁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올라와 집안에 설치된 “무허가 가라오케 방”으로 들어와서 가요를 열창하였다.
내가 중간 간주곡 시간에 한국에서 배운 대로, 일어나서 청중에게 인사를 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따라 하였다. 젊은이들은 무슨 가사인지, 무슨 곡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불렀고, 우리는 케케묵은 노래를 현대의 고전이라고 우기면서 불렀다.
내 동생이 항상 스코어가 좋아서 젊은이들은 “무허가 노래방 주인” 아저씨가 무언가 장치를 해 놓았다고 공격하였다. “번지 없는 주막”과 “하숙생”을 부르며 우리는 암울했던 청년 시절을 회고했는데, 젊은 녀석들은 기회를 포착한 듯 회고담을 틈타, 이 집에 있는 8개의 방으로 뿔뿔이 철수하였다.
시간이 지나 내가 돌아다녀 보았더니 모두들 할일들을 갖고 와서 밤늦게까지 불 밝혀 처리하고 또 공부하며 눈을 부비고 있었다. 예비 신랑에게도 방 한 칸이 주어진 것은 두 번째라고 하였다. 저녁에 마신 포도주가 빌미였다. 음주 운전은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예비 신랑 신부는 한 시간 조금 더 거리의 “앤아버”로 떠났고 우리도 뉴저지로 갈 짐을 쌌다. 이날이 주일이어서 우리는 우선 이 부부가 다니는 한인 교회로 갔다. 출석 교인 1000명 이상인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 장로 교회”는 사우스 필드 숲 속에 넓은 터와 큰 교회당 건물을 갖고 있었다.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은 전통 깊은 이 교회에 지역사회와의 연대라는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아무래도 새로운 인종집단의 거주자들이 밀려오고 그렇게 해서 생성된 새로운 지역사회와 “단절이냐 적극적 교류냐” 하는 문제가 교민 교회의 새로운 과제이자 도전으로 닥아 온 모양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은 공지사항 시간에 우리를 회중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수많은 신도들이 나오면서 내 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만히 보니 자네도 장로 직분을 맡아야 할 것 같네.” 내가 말했다. “벌써 몇 년 되었지요. 정말로 간곡하게 사양하다가---. 다른 것 보다 제가 정말로 시간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지요.”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였지만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으러 큰 한식당으로 갔다.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여기저기 많이 찾아 온 듯 했다. 제수씨가 조금 늦게 들어오는데 건너편 테이블의 중년 부인들이 인사를 보내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시숙이 서울에서 오셨다면서요---?” “네.” “이를 어쩌나, 참 힘드시겠어요.” 제수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죽여 절대로 아니라고 하였으나 분위기는 이미 흔히 하는 단정으로 거의 도달해 있었다.
“우리가 가라오케까지 하는 가족들인 줄을 모르나 보네.” 제수씨가 자리에 앉자 동생이 말하여서 모두 웃었다. 동생은 말을 이었다.
“가족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생각나네요. 제가 한국 신문도 안보고 한국 방송이나 TV도 안보며 미국식으로 살고 있지만 한 가지, ‘샘터’라는 잡지가 와서 거기 나오는 최인호 작가의 ‘가족’이라는 글은 꼭 보거든요. 그 작가가 내 또래라서 생각이나 조건이 비슷한가 하면 또 많이 다르기도 하여서 재미가 있어요---.”
“그래, 맞어. 그 이야기가 아직도 연재된다고 어느 신문에 나온 걸 나도 읽은 적이 있네.” 나는 이야기에 나오는 딸, ‘다혜’의 이름이 생각나서 그녀의 안부를 동생에게 웃으며 물었다. “아, 다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잘 있습디다. 하하하”
아마 그녀도 지금 잘 커서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다짐하듯 생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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