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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서시(序詩)는 무제였다.

원평재 2005. 6. 22. 01:04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무제였다---?


                        (세가지의 자료에 모두 시 제목은 없었다.)


 

 

윤혜원 여사(83세)는 윤동주 시인의 4남매 중 유일한 여동생으로 해마다 이맘때면

연길과 용정과 명동 마을에 와서 오빠와 가족들의 묘소도 찾고 특히 윤동주 문학상을

시상한다.

그런 세월도 벌써 금년으로 일곱 해를 꼽는다.

 


 

윤 여사의 부군은 오형범(吳瀅範)옹(82세)으로서 윤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에는

이 분을 따를 재사, 능가할 문사가 없다시피 한다.

해마다 연례행사로 예외 없이 연길을 찾아오시는 이 분들을 어제 저녁(6월 19일)에

내가  모셨는데,

이쪽에서는 나와 항시 뜻이 통하는 역사학자 이자 대학 주요행정을 맡고 있는 분과

또 한분의 한국어 과 교수님이 동반하였다.

우리는 조선족 식의 푸짐한 식사를 들고 두 분이 잠시 지내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두 노인들께서는 호주의 시드니로 장남을 따라 이민을 가서 만년을 지내는데,

여름이면 이 곳에 아파트를 얻어놓고 석 달 정도 머물면서, 여기 연길에서 개최되는

“윤동주 시인 추모 행사”에 깊이 참여하는 것으로 마지막 사회봉사를 하고 있었다.

박두진 시인의 맏 자제와 내가 세교가 좀 있는데, 명가의 후예들이 잘나지 않으면

선대를 욕보일 수밖에 없다는 술회가 문득 생각났다.

 



오 옹과 윤 여사는  모두 정정하였는데, 우리의 담소는 일로 “윤동주 시인 주제”로

달려가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이야기의 서막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얽힌 이야기로부터 풀려 나갔다.

“서시(序詩)”라는 제목의 시는 과연 있었던 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윤 시인은 원래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그 때까지 쓴 시 19편을 다시 육필로 3부

정리하여 시집으로 펴낼 준비를 하였으나 부모님의 만류로 일단 보류하고 집과

학교와 우인인 정병욱의 집에 나누어 놓고 떠났는데 정병욱의 손에 있었던 한권만이

가까스로 남아서 나중에 12편을 더 보태어 31편이 1948년 1월 3일자로 초판이

발간된다.

서문은 당시 경향신문사에 있던 시인, “정지용”이 썼다.

 


 

처음 육필 시집 준비 때에나 초판 시집 때에도 지금 “서시”라고 통칭하는 이 시는

항상 목차의  맨 앞에 위치하였는데, 시를 쓴 년대로 따지자면 이 서시가 맨

나중이었다.

그러나 처음 윤 시인이 이 시를 육필 시집의 맨 앞에 놓았던 뜻을 받들어 나중에도

순서를 그렇게 하면서 제목이 없던 이 시의 이름을 시집의 맨 앞에 놓았다고 해서

서시(序詩)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좀 거들었다.

“윌렴 워즈워드”와 “코울리지”가 1798년에 낸 “서정 시집(Lyrical Ballad)"의 맨

앞에도 서시, 즉 ”Prelude“가 나오는데 아마도 그런 데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오형범 옹은 별로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꼿꼿한 기개에 가득하여 지사의 면모까지 보이는 이 분에게는 윤 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그 청청한 기백을 다소라도 훼절할 가능성이 있는

점이라면, 잎 새에 이는 바람이나 구름 한 점도 용납지 못하겠다는 기상이 넘치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유택을 발견한 전말에 대해서도 이런 고집은 또 보였다.

교도 대학의 오오무라  선생이 묘소 발견에 큰 공헌은 했으나 언필칭 “발견”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원래 비를 세우고 그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문화혁명기의 아수라장을 거치고 그 후에도 한중간(韓中間)의 수교 문제 등으로

연결이 힘들었다가 오오무라 선생이 오기 전해에 이미 묘소 찾기는 시작되어서

터를 닦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비를 세운 후의 사진 등은 윤 시인의 가문에서 보존해 오고 있어서 묘소

발견에 절대적인 길잡이가 되었고---.

 


 

내가 또 좀 끼어들어서 그래도 연변 대학의 김 아무개 선생과 함께 오오무라 선생이

발견한 셈이 아니냐고 하였더니 “그렇게 따지자면 함께 간 권철 선생이 그 팀에서

맨 먼저 찾았지요---”, 라고 선후를 가린다.

그렇다고 이 분이 앞뒤가 막혔거나 작은 일에 매달리는 성품이나 자세는 전혀 아니었다.

 

아무튼 생가를 복원하고 나서 문을 열던 날, 굴뚝의 위치가 반대인 듯 하다는

윤혜원 여사의 사실 토로 때문에 또 한번 복원의 주최 측과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일도 유족 측의 주장  펴기라기보다는 주위에 그런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확대되어 왜곡 전달되었고 이후에 해소할 기회는 현재까지 실종된 상태라고 안타까워

하는 자세였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단언이었다.


그 동안 아름다운 시집은 여러 군데에서 나왔고 비공식 통계로는 윤동주의 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숫자만도 40편을 넘으니 유족으로서는 더없이 영광이며 또한

옷깃을 여미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일본인들의 윤동주 시 사랑과 추모의 정으로 번져갔다.

일본인들은 정말 지독한 데가 있는 사람들로서 이 사람들이 윤 시인을 사랑하는 정과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과 연구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여러 서클에서 그들이 보내는 “윤동주 시 감상 활동 기록”과 “감상문 문집”등의

자료를 보니 정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입이 벌어 질 지경이었다.

 



비유가 좀 적절치 못할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욘사마 열풍”에도 이들의 민족성이

내 비치듯이 그런 열정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좋은 것은 철저히 좋아하며 왜 좋은지를 캐묻고 전수하는 이들 섬사람들의 민족정신이

마침내 윤동주의 시에서 대하를 이루고 출렁이며 큰 흐름의 물고를 맞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는 명동 마을과 육도하와 명동 교회, 명동 소학교, 서전 서숙,

가톨릭 교회, 지신 마을 등등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함께 간 역사학자의 고증과

반증이 있어서 우리의 담소는 장강의 물결처럼 이어져 나아갔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윤동주의 시는 총 31편으로 알려져 있고 사실상 맞다.

그러나 한 수의 시가 일실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분들로부터 나왔다.

윤동주가 누구에게 편지의 형식으로 보낸 시가 있었는데 그 수신인이 나중에 북한 땅

“아오지 고교”의 교사로 가서 그분으로부터 그 편지를 필사하여 보내겠다고 했던

어떤 주위의 사람이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결국은 사라지고 말았으니 지금도 일말의

기대 가운데 아쉬움만 남는다는 탄식도 담소 중에는 있었다.

 


 

윤동주에게는 여성의 영역이 빠져있다.

일찍 옥사, 순국한 정갈한 청년 시인의 주위에 아직 여성니 나타날 년치는

아니었겠지만 동경에서 음악을 하는 여학생의 오빠와 윤시인이 친구여서 그

여학생에 대한 관심을 방학 중에 누이인 윤혜원 여사에게 한 말도 기억이 나는데

그 여성의 이름은 박춘혜였고 그때 이미 정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윤여사는 서전 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 생활도 하다가 결국 용정을 빠져나와 북으로

귀국하였다가 분단 직후, 남으로 내려왔고 마침내 노년은 호주의 시드니에서 보내게

된 파란만장이 또한 있었다.

 

거목의 주위 먼발치에 잡초가 왜 없겠는가.

가끔 윤 시인을 빙자하여 이해를 추구하는 무리들도 있어서 순수한 추모운동과

구별이 어려울 때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금을 긋고 가족들의 자비와 일부

독지가의 깨끗한 비용으로 지금껏 윤동주 문학 지킴이의 행사를 치루어 오고 있는데

이제는 어느 항구적인 기관이 이 사업을 맡아서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끝으로 토로하였다.

 


 

과기대 쪽에서는 총장님의 후의로 7월 16일의 시상 행사장을 무료로 내 드리고

행사장 참석자와 수상자들에게 오찬을 베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다.

항구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시간을 갖고 연구할 제목이 될 것이나 지나가는 객원

교수가 가늠할 바는 아니었다.

 

이 보다 앞서 유동주 시인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홍장학 박사가 또한

과기대에서 강연회를 하기로 되어있어서 나에게는 여러모로 경사가 겹치는

기분이었다.

 

연길의 늦은 밤에 밤비가 또 적당히 내려주어서 일본의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서 순국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적셔주는 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