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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 문인혐회, 강화도 문학 기행기

원평재 2009. 6. 4. 09:13

서초구청 공식 단체인 "서초 문인협회"의

"2009년도 오월 문학기행"이 며칠전에 있었다.

일행은 모두 38명이었다.

서초동으로 돌아온 나에게도 이사 감투를 씌워서 기꺼이 합류하였다.

언필칭 등단문인이 가장 많다는 동네의 문협이라서 쟁쟁한 문우들이 많았다.

 

 

아침 출발 때는 "또 강화도인가?"라는 심사가 없지도 않았지만

하루를 마치면서는 강화도 인식의 천지개벽이랄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아는만큼 보인다던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임원이 해설을 맡은 문학기행 여정은

이제껏 우리가 다닌 강화도 답사를 헛걸음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하였다.

하여간 천년 여정이 깊은 의미를 각인시켜주었다.

 

 

 

 

강화 여정은 한강변으로 부터---. 

 

 

 

 

문수산성의 정문이 한양으로 향한 까닭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장소라서 한강을 등지고 섰다.

 

 

강화도는 벌써 가게의 옥호부터 달랐다.

그 사연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고려산과 송악이 있는 내력도---.

항몽 39년의 흔적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강화도령 철종의 우거는 정말 한뼘이나 될만한 거처였다.

그렇게 살았기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숨만 쉬다가 임금이 되었다.

 

 

 

 철종 잠저라는 비석이 의미롭다.

물론 후대에 세운 것이다.

 

 

  

 

이제 이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 교회당, 성공회 천주성전에 들렀다.

숨은 사연과 의미가 너무많아서 시방 여기에 되살려내기가 역부족이다.

 

 

 

 

보리수가 성당에 서있는 심오한 뜻도 읽었다. 아니, 들었다.

서양문물이 동양에 발을 딛는 전략이기도 하였다.

경내를 추스리느라 돌로 축대를 쌓은것은 사찰축조식이고

경내의 전체 모양은 배, 그러니까 방주 형태였다.

  

 

  

 

태극문양이 십자가에 닿는 이치도 이제야 깨닫고---.

  

  

 

  

 

  

 

 

소설가 손장순 교수도 보리수 아래를 거닌다---.

  

 

서양종과 범종의 차이는 치는 곳이 안이냐 밖이냐이다.

성당의 종이 동양의 범종처럼 겉을 만들었으나 십자가 문양이 선연하다.

동서양의 퓨전을 보고 있다.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올 때의 생존 전략을 볼 수 있다.

 

 

사천왕사처럼 보이는 구조물도 성당 경내에 들어와있다.

 

 

 

허윤정 시인께서 당간지주 유적의 의미를 해석하고 상고해본다.

 

 

심도 직물은 직물 사업을 하는 친구 때문에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곳 성당 아래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다니---.

 

 

성공회 성당 바로 아래에 김상용 선생 순절비가 있었다.

이곳 좁은 바닥의 풍정이 복잡미묘하여서 역사의 아이러니까지 연출을 하고 있지만

범인인 나로서는 그저 재미있다는 표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병자호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병란 속에서 김상용 선생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을 하고 마는 상황을 보고 자신은 화약을 터뜨려 결국 순절했는데,

일부 야사에는 답뱃불을 잘못 부치다가 대형 사고가 났다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난 이후에 청나라에 빌붙은 세력 쪽에서 만든

자해의 소리일 듯 싶다.

 

 

  

  

 흔히 말하는 척화비는 대원군 당시 나라의 여러 곳에 세웠다고 하는데

내가 직접 본 것은

고창읍성에서였다.

병인양요,

척화의 땅인 강화도에 척화비가 없을리 없다.

우리의 해설사께서도 이 근방을 뒤진적이 있는데 결국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이의 말,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 보여서 아이러니를 느꼈다.

 

한편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방방곡곡을 누비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강화 닭 한마리 집"이 잘 될리가 없으렷다.

 

 

 

 

한때 강화의 대표기업이던 심도직물은 사라졌지만 기념비와 함께 이런 이름은 남아있구나 싶다---.

 

 

빨갱이로 몰려 돌아가신 조봉암 선생과 이 초등학교가 어떤 관계인지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승평문은 개성에 있는 황실의 문 다음에 이곳에 있는 문으로 연결이 된다는 뜻이었다.

개경을 몽고에 내주고 강화도로 피난을 온 고려 황실의 비원이 담긴 이름 짓기였다고 한다.

 

    

 

 

 

 

고려 고종의 홍릉을 찾아가는 길에 잠시 스친 연무대.

일제가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서 조선의 항복을 받을 때 사용한 당시 조선 해군 사관학교

같은 곳이었다.

강화 조약의 첫 문구는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말이었다. 

 

 

 고려시대의 장례법은 네모진 장지의 가운데에 둥근 무덤을 세우고

좌우로는 작은 봉우리를 올려서 마치 의자의 팔걸이 처럼 돋운다고 한다.

  

 

고려궁지를 떠나오며 카메라에 낙조대와 적석사를 가까스로 잡았다.

낙조대는 강화팔경의 첫번째이고 적석사 인근에서는 최근에 큰 고인돌도 발견되었다.

해안이나 냇가가 아닌 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일이라고 한다.

적석사까지는 승용차가 올라간다고하니 언제 한번 가볼 일이다.

 

 

 고려산과 송악이 강화도에 있는 까닭을 터득하고나니

"고려 쉼터"라는 옥호도 이제 낯설지 않다.

 

세상에서 제일 고집 센, 주체의 고향이 어디멘가.

이름하여 강화군 "내가리"라고 한다.

하여간 내가천을 거쳐서 외포리에 있는 점심 식당으로 찾아들었다.

 "내가천"에는 물고기도 고집에 쎄다.

 

   

 

 

 허윤정 시인, 손장순 소설가와 함께 카메라맨도 모처럼 포즈를 취하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별군으로 된 삼별초 유허비에 진도와 제주의 표상이

함께하는 것은 슬픔이다.

이곳 강화가 함락되고 그들은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다가 궤멸된다.

그들이 고려의 군사가 아니라 무신들의 사병인 점도 아쉬울 따름이다.

 

 

 

   

 

보통의 강화도 기행에서 하곡 정제두의 묘소를 찾는 일이란 드물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해설가를 모신 덕분에 귀한 발걸음을 하고야 말았다.

강화학파에 대한 설명이 또한 대단하였으나 이곳에서는 변죽만 울린다.

 

강화학파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강화도의 하곡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1709년 8월의 일이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숙종 때로, 그는 정권유지를 위해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정치상황과 경직된 학문 풍토를 비판하며 선산(先山)이 있는 강화도 들어와 20년을

살았다.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버리고, 우리의 시각에서

현실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열린 학문자세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대학자였다.

  

 

강화도가 옥토로 변한것은 300년쯤 전에 이곳에 둑을 쌓고 간척사업을 벌인

덕택이었다.

다만 이렇게 한 결과 병인양요 때처럼 양이철선들이 쉽게 접안을 하여

외규장각의 사료들과 은괴등을 탈취 당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레종 데트르의 양면성,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홍선생 비석은 확인불명인데, 다만 근대의 것으로 보인다---^^.

 

 1차로 간척이 된 이 곳은 그래서 과연 "막음골"이라고 불린다.

 

 전등사에 발걸음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

하지만 이 곳 전부가  전등사의 사찰경내로만 알았지

위에서 설명하는 이런 유래의 성터이자, 역사성이 있는 곳으로 개안을 한 것

역시

이번 역사적 문학탐방의 결과렷다---. 

 

  

 

 

   

 

 조선시대의 실록을 보관한 다섯군데 중의 하나가 이곳 전등사 윗편에 있다.

지금은 보수공사중이다.

 

 

 

 

 

 멀쩡한 대들보도 150년 정도가 되면 이렇게 되어서 갈아주어야 한다고---.

이보다 더한 많은 설명이 있었으나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중국 종이어서 음관이 없다---.

   

 

 대웅전의 귀퉁이를 장식한 누드 여인상---.

설화가 전래되지만 사실은 남방 계통에서 원숭이를 세우는 풍습이

전래한 모양이라고---.

그렇다, 원숭이가 옷입은 것 보지 못했거늘---.

 

 

가히 육감적인가---. 

사념이 부질없다.

  

 

   

 

  

 

 

 

 

  

 

 

 

 

 

  

  

 다락방에서 내가 머리를 받았다.

나중에 보니 머리 조심 표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