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에서
"스노우 칸추리~~, 가와베다 야스나리, 호호호"
타운 하우스의 관리사무소 입구 쪽에서 검은 머리에 허리선이 무척 긴 동양 여자의 뒷모습이
왠지 그를 흠칫 놀라게 하였다.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뚫고 그 동양 여자의 보이지 않는 입에서
까랑까랑하게 나오더니 천지로 퍼지고 있었다.
함께 따라 나온 입김도 목소리를 좇아 퍼져나갔다. 아무래도 호흡이 긴 여자 같았다.
그 옆에서 함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는 인도계 여인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응답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 속에서 "베다"니 "우파니샤드" 같은 어휘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을 주제로 하다가 "가와바다"라는 원음 대신에 은근슬쩍
"가와베다"로 바꾼 변형 발음이 힌두교의 경전에 관한 화제를 인도계 여인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 같았다.
물론 가와바다에서의 "바"는 "베"로 모음을 바꾸어보았자 "밥"이라고 할 때처럼 양순음이고
"베다"의 "베"는 "V"자 발음의 순치음이지만, 허리가 긴 그 여자는 가와베다에서의 "베"도
V자, 순치음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발음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말의 천재인가---.
아침 여덟시 반이면 타운 하우스 단지의 관리 사무실 앞에서는 자녀들을 스쿨버스에
태우려고 나오는 학부형들로 잠시 북적거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가 외손녀를
태워주려고 나온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보통은 병원으로 출근하기 직전의 사위가 그 역할을 맡았고 딸은 이미 차를 몰고
연구소로 달려 나간 이후의 시간이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이 날은 사위가 어디로 출장을 가고 없어서 딸네 집에 잠시 와있던
그가 대리로 나온 셈인데 간 날이 장날인가 아이를 버스에 태우러 학부형으로 나온
허리가 긴 여자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허리가 긴 여자도 이제는 그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되어있을
터였다.
그녀도 말의 천재였다.
어떤 사실, 사유, 사물도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가면 모두 환골탈태가 되었다.
심지어 생체까지도---.
그녀에 비하면 언어학을 전공한 그의 세치 혀끝은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혹시 다른 역할,
예컨대 키스와 같은 데에서도 별로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10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큰 소리를 쳤다. 조선말, 옌볜 말,
서울말, 영어, 로씨아 말, 광둥어, 만다린 북경관화, 일본어, 참말, 거짓말, 도합 10개
국어였다.
반대로 언어학을 한다는 그는 외국어에도 서툴렀지만 참말도 또렷하게 하지 못했고
우물쭈물만 해도 되는 거짓말은 더더욱 못했다.
홍콩 대학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필연으로 만든 것은 그녀,
김홍련이었다.
그가 서울 근교의 고향 땅이 신도시로 바뀌면서 갑자기 졸부가 된 집안의 장남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산학을 전공하는 그녀는 고향 옌볜에서 주강 삼각지로 운 좋게 내려왔다가 영국계
홍콩 대학에 풀 스칼라쉽으로 들어온 재원이었다.
주거 이전의 자유가 힘들었던 그 시절에 말이다.
물론 이 말도 그녀의 입에서 나왔으니 다소의 가감은 있어야겠지만 놀라운 그녀의
외국어 재주를 감안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하였다.
홍콩 대학의 주요언어인 영어와 광둥어는 물론이거니와 말하자면 우리말에도 서툰
그가 무사히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친 데에는 첫째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가 선택한 전공이 중국 고전 훈고학이어서 구어체 말이 별로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태백이나 소동파와는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고 필담이라면 간자체에 익숙한 중국
학생보다도 정자체에 달통한 그가 항상 한 수 위였다.
이윽고 그때만 해도 외국 학위가 금값인 국내 대학, 중어중문학과에 그는 초빙을
받다시피 들어왔고 그가 귀국을 서두를 때에 그녀는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설득하여도 그녀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대학교수 부인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전산학 전공을 살려서 자신은 홍콩에 미래를 걸겠다고
요지부동이었다.
융통성이 별로 없는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금의환향으로 홍콩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몸 사랑을 열심히도 하였다.
그 육체적인 관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진정한 사랑의 방정식이었는지는 불가해의
것이었다고 쳐도 이제는 그 답을 써야할 차례가 아닌가.
설혹 그들의 관계가 맹목적 육체관계에서 빚어진 젊은 시절의 한갓 놀음이었다고
치더라도 이제는 마침내 정식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통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단계에 오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이 그의 기본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사랑 방정식은 근대 산업사회와 함께
도래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부르주와 낭만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녀도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나 동성끼리의 우애는 같은 성격이어서 우선 사람간의 신의,
믿음과 같은 훌륭한 덕목은 실존적 인간이라면 지켜내야 할 과제이긴 하여도 남녀 간의
경우, 평생을 살갗 부비면서 서로를 속박하고 또 서로에게 속박되는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이었다.
친구 간에도 활동공간이 달라지면 헤어지듯이 사랑하는 남녀 간에도 생존공간이
달라지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홍콩 변두리에 있는, 그래도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싼 그의
단칸 스튜디오에서 서로의 학교 스케줄을 조정하면서 치열하게 몸 사랑을 하였다.
그는 동거를 원했지만 그녀는 풀 스칼라쉽으로 학교의 기숙사에서 지내야하는
입장이라 불가능하다는 그녀의 설명이 있었다.
그녀는 키가 컸지만 다리가 길지는 않았다.
다리 부분을 긴 허리로 대치한 키 큰 몸매로 그녀는 그를 침대위에서 사정없이 공격
하였고 그도 수세에 놓여있기는 하였지만 젊음이라는 방패로 그 힘찬 공격을 즐겨
방어해 나아갔다.
강력하게 그의 위에서 짓이겨 나오던 그녀는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면 "I miss(ed) it"
이라고 신음하며 침대 밑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순간절규는 이제 막 절정에 도달할 찰나에 그 경지를 놓쳤다는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금방 움켜잡았던 그 절정을 벌써 다시 그리워한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아마도 miss라는 영어의 뜻이 그렇게 중층이었고 시제도 과거인지 현재인지 헐떡이며
발음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궁금하였다. "놓쳤다"라는 뜻이라면 그는 다시 한 번 분투노력을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벌거벗고도 한참동안 숨을 몰아쉰 다음 그가 그녀에게 그게 무슨 뜻이었느냐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그런 걸 묻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자신도 그 뜻은
잊었노라고 그녀는 부끄러이 말문을 막았다.
어쩌면 그 말뜻의 전후 사정이야말로 10개 국어를 넘나든다는 그녀의 언어 개념에
들어있는 "참말"과 "거짓말"의 미묘한 경계, 분수령이 아닐까하고 그는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하여간 그는 귀국하였고 그녀는 남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 그녀는 얼마 전부터 생리가 중단되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생리가 중단이라니, 그럼 임신 아냐? 나랑 서울 가서 같이 살자."
그가 종용하였다.
"그럴까? 서울 가면 산부인과에서 애 떼는 수술이 쉽다는데 그럴까? 호호호."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웃었다.
"임신이 아니고 생리 불순일거야. 또 그렇다 쳐도 여기 홍콩에서 낳아서 영국 국적을
얻을거야."
그 때 쯤에는 같은 과의 중국인 친구들이 귀띔을 한 바도 있었다.
그녀가 홍콩 부자의 숨겨놓은 연인인가 정부인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전산학 전공은 당시만 해도 아주 드물었다.
더구나 여학생은 더더욱 드물었다.
앞으로 그녀의 꿈은 인공지능을 개발하여서 자동번역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와 같이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도전해 볼만한 분야라는 것이었다.
"하하하, Time flies like an arrow라는 문장을 시간 파리는 화살을 좋아한다 라고
번역할 번역기 말이지?"
과묵한 그가 어쩌다가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이제 정말 시간은 화살과 같이 날아가서 벌써 한 세대도 훌쩍 지나가고 대학교수로
평생을 지낸 그도 벌써 정년을 하였다.
부인과 얼마 전 어정쩡한 나이에 사별한 그는 한국에서 수발하는 아들과 며느리
보다 딸이 만만하여서 이 곳 피츠버그에 사는 딸네 집에 왔다가 설국에 갇히고 만
셈이 되었는데 갑자기 유령같이 나타난 젊은 날의 김홍련을 보게 된 것이다.
홍련의 생각에 얼마나 골똘하였으면 그는 노란색 스쿨버스가 떠나가면서 외손녀가
유리창에다 대고 "그랜파, 알라뷰"하는 입모습에도 제대로 손을 흔들어주지 못하였다.
요즘 공부를 잘하는 외손녀에게 "차이니즈"라고 낄낄댄다는 스쿨버스의 악동들
이야기가 마음에 쓰였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도 안중에 없었다.
딸네가 사는 피츠버그 북쪽, 잘사는 동네는 완전히 백인 천지라서 중상층의 어른
사회까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세계는 우발적 인종차별의 우려가 현실일 수도 있었다.
남녀 관계란 무엇이며 추억이란 또 무엇인지, 그런 뭉뚱그려진 사연이 현실의
문제의식까지도 밀어내 버리다니.
그는 사무실 쪽 문을 밀고 방금 전의 여인들이 들어간 로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은 원래 '메인트넌스 센터'라고 하여서 관리실쯤 되는 곳인데 넓은 로비와
피트네스 센터, 실외 풀장이 있고 커피와 스낵을 먹을 준비도 되어있는 꽤 큰
사무실 건물이어서 사람들은 보통 오피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두 여인은 벌써 커피까지 따루어 우아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화제는 그 사이에 자식들의 학교생활로 옮겨와 초등학교 상급학년이면 작문
과외를 시켜야 되지 않느냐는 토론이 오가고 있었다.
젊은 모습의 홍련이 그런 주장을 펴고 인도계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는 과묵한 채로 카페인 없는 커피를 조금 마셨다.
"머리가 좋아서 의과대학을 보내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영어로 응원을 청했다. 주변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홍련의 방식이었다.
"아, 뭐, 온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가 한국말로 우물쭈물하였다.
"한국분이세요?"
젊은 홍련이 역시 한국말로 반색을 하였다.
인도계는 마침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슬그머니 일어나 사라졌다.
"네, 아주머니는?"
"홍콩에서 왔어요. 한국말을 좀 하죠."
한국말을 좀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유창했다. 더욱이 유창한 한국말에 홍콩이라는
말까지 들어가자 그는 털썩 주저앉을 뻔하였다.
"초면에 실례지만 패밀리 네임이 무언지요?"
"진이라고 해요. 아, 한국에서는 김이라고 하죠? 저는 홍콩 국적이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한국계로 김씨라고 하죠. 중국 성씨로는 아주 드물어요.
선생님 성씨는 어떻게 되시죠?"
"아, 나도 김씨입니다. 한국에는 워낙 많으니까요."
그가 사족을 황망하게 덧붙였다.
"부모님은 중국에 계신가요?"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 아버지는 문화혁명 때에 고향인 동북지방으로 가셨다가 돌아가셨답니다.
어머니는 홍콩에 계시는데 곧 이리로 다녀가실 것이구요. 오시면 한번 만나
보시지요. 여기는 한국 사람이 너무나 드물군요. 어머니는 저처럼 한국말도
잘하세요. 10개 국어를 하신다니까요."
그는 그만 로비의 카펫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세요?"
어느 틈에 퇴근을 하였는지 딸이 초인종 대신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그는 정녕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응, 아니다. 아침에 나가보니까 키가 큰 동양계 여자가 보이더구나.
일본여자인지 중국계인지 모르겠더라만, 가와바다 야스나리 이야기를
얼핏하더구나."
"아, 그 키 큰 여자? 허리가 길고. 뻥이 좀 쎄요. 영국 국적이라는데 우리말도
곧잘 해요. 한번 직접 말을 붙여보지 그러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혼
자서 심심하실 텐 데. 이 설국에서."
"예끼, 네가 아버지를 놀리는구나, 버릇없이! 알다시피 내가 은퇴 후에 창작
글을 좀 쓰고 있는데 아까 아침에 아이를 스쿨버스에 데려다 줄때 사람들 중에서
문득 설국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이야기가 나오더구나.
그래서 조금 따라가 보다가 오피스 현관에서 그만두고 집으로 와버렸단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 상상력을 발휘하여 픽션으로 이끌어 보고있단다."
"결과가 궁금한데요. 그래서요? 기절할 결과는 아니구요?"
"결과는 독자 모두의 몫이니까 지금 공개하기는 곤란하고---.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 허리가 길지?"
"그렇다니까요. 스피치도 잘하고. 자기 친정 엄마가 곧 온다고 하지요, 아마.
홍콩에서."
"나 여기 설국이 싫어졌다.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련다."
그가 공연히 손사래를 치며 거실 귀퉁이의 여행용 가방으로 눈길을 보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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