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다시 설국에서 (속편)
"아버지, 그 홍콩 여자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보시지 않겠어요?"
그의 딸은 맨 날 바빠서 아버지와의 대화시간도 잘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눈이 좀
그친 어느 날 저녁에 엉뚱하다 싶은 말을 하였다.
"무슨 말이냐?"
거실의 소파에서 오래전 이우태 작가가 쓴 '남부군'을 읽고 있던 그가 놀란 듯 말을 받았으나 사실
상황은 금방 파악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옛날의 김홍련이 온다는 사태전개가 분명하였다.
"지난번 말씀이 오고간 그 왜 홍콩 여자의 엄마가 엊그제 도착했대요. 내일 아침 스쿨버스가
출발할 때 손주가 타는 모습을 보러 나온대요."
"나는 남부군을 빨리 읽고 뉴욕의 친구에게 어서 돌려줘야하는데---. 책 받은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눈이 나빠져서 그런지 독서 속도가 영 말이 아니구나---."
"그러지 마시고 한번 나가서 인사나 하세요. 남들과 한국말 나누실 경우도 없으실텐데---.
광둥 말하실 기회는 더더욱 없으시잖아요, 호호호. 또 애 아빠도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아이를 좀
데려다 주셔야하고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쯤에서 그쳤지만 아침에 오피스로 나갈 일은 그걸로 확정 된 셈이었다.
물론 그가 '남부군'을 읽고 돌려주어야한다는 말도 핑계만은 아니었다.
뉴욕에 사는 그의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는 말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이었다.
어떤 괜찮은 회사의 미국 주재원으로 왔다가 주저앉아서 초년의 고생은 있었지만 보석상으로
크게 성공을 하고 지금은 같은 업종의 도매업에 더하여 금 선물 시장에도 손을 대어서 대박이 터진
상태라고들 하였다.
더욱이 돈이 있다는 내색 없이 교포 사회에 여러모로 기여를 하고 있어서 아는 사람 간에는 말없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두 사람 모두 키가 작다는 인연으로 교실에서 가깝게 지내다가 이제는 또 두 사람
모두 미국 동부에서 만년의 생활을 편다는 운명이 다시 이들을 숙명적으로 묶은 셈이었다.
다만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데도 좀 아쉽게 아직도 메울 수 없는 어떤 간격, 불가해의 부분이
두 사람 사이에는 상존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면 뉴욕의 친구가 현실에서의 세속적인 성공과는 상관없이 아직도 특별히
대한민국 해방 전후사의 시공에 대하여 시종여일한 관심을 갖고 그 방면에 대하여 엄청난 독서량과
범상치 않은 사유의 경지를 확보하고 있는 사연의 내막 같은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뉴욕 친구가 극우편향으로 진행된 남한 사회의 역사적 흐름에 어떤 감정상의
쐐기를 박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 편향에 가담한 사람들의 사고나 행위가 그 어느 쪽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사상적 깊이나 가치관을 확보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그런 당시의 정황을 이 시대로
부터라도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소위 좌익 학자 리영희 교수가 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의 제목과 같은
입장이 그가 펼치는 생각의 중추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의 친구가 좌익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중어중문학이 속한 인문대학의 교수를 오래 지낸 그로서는 친구의 이런 생각이 별로 저항을
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에게는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로도 작용
하였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그 친구의 주장이 건너야 할 가장 큰 강, 아니 대양과 같은 간격 중의 하나는 우선 해방 전후사에
등장하는 외세부분이었다.
주지되다시피 미군은 한반도에 들어올 때에 명시적으로 점령군을 자처하였으며 소련은 어찌
되었건 간에 해방군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는 자주 적시하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귀 기우리지 않거나 미군은 당시 솔직한 태도였고 소련군은 정치적
수사를 쓴 것이니 가식적인 것 아니냐는 쪽에 머무는 것이었다.
누가 어느 편에 머물건 간에 21세기는 이미 쏜살같이 닥쳐오고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그는 해방공간의 명시적 진주군의 입장을 묵시적으로 왜곡하는 세태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도 물론 이런 주장을 시시때때로 하는 것은 아니어서 원만한 사회생활에 주름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타협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현재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부정하는 입장은 전혀 아니면서도 박정희 정권이
남한 사회의 발전에 전적으로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결코 전적으로 동조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그의 자세였다.
아마도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에서 걸린 모양 같았다.
하지만 이런 반대의 자세도 노쇠해가는 이민 1세들 사이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해 낼 수가
없었다.
물론 전체 분위기 상으로는 양비론, 양시론으로 적당히 넘어가지만 공감대에서는 매우
인색한 반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극좌파 성향을 띈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박수를 쳐대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또
가까이 하지도 않는 것이 역시 뉴욕 친구의 바르고 진정한 처신 같기 만 하였다.
하여간 뉴욕 친구는 그에게 이번에는 '남부군'을 우송하여주었다.
한때 50만부가 나갔다는 '남부군'이나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같은 책들이 절판이
되어서 한국이나 미국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분실이 될 경우는 다시 찾기가 어렵다는 뜻을 뉴욕 친구로부터 간곡하게 들은
그는 빨리 독파하고 돌려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고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딸이
홍콩에서 온 할머니라는 큰 걸림돌을 그에게 제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자다가 꿈속에서 보아도 벌떡 일어난다는 첫사랑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를 가볍게 거부한 여인이었고 세월은 정말 '시간 파리'처럼
흘러가고야 말았지 않은가.
거기에 더하여 뉴욕의 친구는 그의 독서를 채근하고 있었고 지리산에서는 눈발이 칼날처럼
빨치산들의 신발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동족간의 살육은 푸줏간의 고기를 저미는 것만도 못하게 피아골에서 또 배암사골에서
피아간에 자행되고 있었다.
"바람이 칼날 같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눈이 사정도 없이 너무 많이 내렸어."
그가 무심결에 좀 엉뚱하게 딸의 말을 받았다.
"아니 눈은 많이 왔지만 집안이 그렇게 춥지는 않잖아요. 특히 아버지가 오셔서 가스 값이
너무 나왔다싶게 불을 때고 있는데요. 아, 날씨 방송에 맨날 freezing drizzle이니
severe weather라고 해서 그러시나요? 그거다 레토릭이라니까요."
"아니 동상으로 발가락이 모두 썩어문드러졌단다."
"네?"
"아, 아니다."
그는 엉뚱하게도 지리산과 배암사골과 피아골과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에 대해서도
말을 할뻔하였다.
"그래, 오늘 밤 지나고 내일 아침에는 역사적 상봉을 해야겠구나."
그는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 내일 아침의 만남을 딸에게도 기정사실로 표명하였다.
세상일이 재미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사실 이 일의 주체나 객체는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관여하지도 않는 기이한 조우에
다름이 아니겠기에.
신문사와 통신사의 기자 생활을 하던 '남부군'의 저자 이우태는 이제 소설 속에서 1년 반이
되어가는 지리산 빨치산 생활의 막바지에 도달해있었다.
저자가 이 기록을 재현하고 출판하던 시대상은 오랜만에 한반도에도 조건이 완화된 자유화의
물결이 밀려들었고 그 물결위에 좌파의 포말이 튀어 오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출판이 어느 정도 확보된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남부군'의 내용에는
빨치산들의 주의와 주장을 그렇게 도그마처럼 많이 담아내고 있지는 않았다.
대중의 마음을 한순간에 휘어잡을 수 있는 캐취 프레이즈, 즉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공산주의 교조의 가장 선동적 주장도 그렇게 목청껏 부르짖지는 않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교조와 신념이 한갓 몽상에 불과하고 북한의 독재적 실상이 적나라하게 심판대에
올라버린 역사적 흐름 때문에 그랬던지, 아니면 문학의 가치란 원래 프로파간다는 절제하고
독자 반응비평으로 진정성이 담보된다는 작가의 지혜가 작용한 건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노골적인 공산주의 찬양은 죽어가는 빨치산 중에서도 얼마 안 되는 핵심 분자들만이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는 정도였다.
그가 남부군을 손에 들고 놓지 못하는 것도 무슨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공감이 되었거나,
사라진 몽환의 허깨비에 마음이 빼앗겨서가 아니라 저 처참한 지리산의 비극, 차라리 주의와
주장을 내뱉지도 못하면서 발가락이 썩어 뭉그러질 때 까지 그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 안타깝고도 가슴이 아파서 자신의 성한 손가락으로는 그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의 빨치산에는 북으로부터 내려왔다가 퇴로가 막힌 인민군 병사들, 지역에서 좌익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의 추이에 따라 합류하였다가 월북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 여순 병란
때의 탈주병들, 그런가 하면 순수 공산주의에 사상적으로 물든 젊은 청춘남녀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온 경우 등, 모두가 이리저리 엮어져있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치열한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 같은 것도 특별히 나눌 기회가 없을
정도로 각박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물론 초기에는 꽤 낭만적 평등사상이 부분적으로 흐르기도 하였으나 상황이 엄혹해지면서는
마침내 일본 병사들의 악바리 근성의 잔재 같은 것이 새삼 군율로 자리하기 시작하였고 일이
이렇게 전개될 즈음해서는 이미 빨치산의 대오는 흐트러지고 사라지는 운명을 맞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쯤에는 가증스럽게도 권력투쟁의 와중에 있던 북한으로 부터도 이미 이들의
실체는 거추장스럽고 오히려 민족 해방전선에 해가 된다는 식으로 궐석재판과 처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는 뉴욕 친구의 진정한 뜻이 바로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알리고 또한 확인하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지만 따로 그런 심중을 물어볼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초창기에 중국의 변경인 홍콩에서 학문을 했지만 당시 그곳의
대학 분위기는 군사정권 아래의 남한 사정 보다 훨씬 좋았고 고단하기 쉬운 유학 생활을
풍요로운 경제사정으로 즐기며 지냈을 따름이었다.
특히 김홍련과의 사랑이라는 젊은 날의 피항지, 해방구가 있었기에 사상적으로는 그저
무풍지대에 있었으며 이후에 대학 교수 시절도 어떻게 보면 나약한 지성인, 창백한 얼굴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가 귀국하여 교수가 되었을 때에는 대학가에 한참 반독재 데모가 성행하여 휴강이나
휴교가 학기마다의 정례행사가 되었지만 그는 중국 고전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그 자유
시간을 향유했을 따름이었다.
지금도 평생에 걸친 캠퍼스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여서 미국 동부지방에 잠시 나와 있다가
폭설을 맞았지만 백설부나 염두에 두면서 한시 한편을 찾아내어 읊는 것으로 설국 생활을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눈이 내리고 쌓이던 이곳 설국의 시초에 그는 조선조 선조 때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최립이 지은 백설에 관한 시의 두 번째 연을 감동으로 읊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또 생기는 은가루 쌓인 언덕이요 / 風吹更作銀堆地
해가 비치자 모두 매달린 옥 새끼줄 처마로세 / 日射都成玉索簷
이만하면 시의 소재 풍부하다고 하련마는 / 也覺詩家情境富
쇠한 늙은이 송곳 끝을 새로 내놓지 못하겠네 / 衰翁不是露新尖
특히 '쇠한 늙은이'라는 구절이 그의 가슴을 쳤기 때문에 그는 감화, 감동하였고 그저
감상적 자기 탄식으로 감탄과 영탄을 터뜨렸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친구가 그에게 보내준 몇 권의 책들이 그의 가슴에 파문을 던진 것이었다.
피츠버그의 전원주택지대에 아름답고 수준 높게 내린 백설은 더 이상 백설 공주의 동화적
배경이 아니라 그의 발가락, 손가락에도 동창과 욕창을 일으키며 물러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처절한 설국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래저래 그는 밤잠을 설쳤는데 그 밤사이로 다행히 눈은 더 내리지 않았으나 찬바람을
동반하면서 새벽이 찾아왔다.
일곱 시가 되어도 아직 어둑하던 날이 여덟 시 대에 들어서면서는 분주하게 밝아왔다.
제너럴 호스피탈의 의학 연구소로 출근하는 딸과 함께 그는 아이를 데리고 오피스 앞,
스쿨버스가 서는 곳으로 나갔다. 젊은 김홍련도 아이를 이미 데리고 나왔으나 진짜 김홍련,
그러니까 할머니가 되었을 김홍련은 보이지 않았다.
"굿모닝! 어머니는 모시고 나오지 않으셨어요?"
그의 딸이 그녀에게 웃으며 물었고 그는 계면쩍게 옆에 서있었다.
"아, 오늘 아침 너무 콜드해요. 지금 오피스 로비에 들어가서 커피 한잔 하고 있어요.
그랜파도 들어가서 인사하고 차 한잔해요. 우리는 바쁘니까 여기 있다가 라이드 보고
그냥 떠나죠."
그녀가 조금 당돌하게 말하며 사무실 쪽을 가리켰다.
중국말에 존칭 표현이 없다는 생각이 그에게 뜬금없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도 새벽바람 핑계를 대고 어색한 만남에서 다소나마 벗어나고자 사무실 문을
밀고 얼른 들어섰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가 찾는 김홍련은 보이지 않았고 키가 작달막한 부인 한사람만이 서서 커피가 든
페이퍼 컵을 홀짝이고 있었다.
로비 공간 말고는 피트네스 센터가 어둑하였고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애슐리라고
불리는 여직원은 아홉시가 되어야 나오는 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셨나요?"
뜻밖에도 키가 작은, 아주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그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홍콩에서 온 부인이 여기 계실텐데요---?"
"아, 바로 제가 홍콩에서 온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오신 나이든 분이 계시다고 해서
나왔습니다만---."
그녀가 수줍게 말을 하는데 마른 얼굴에도 주름살이 많이 패어있었다.
"그러시군요. 앉으시죠."
그는 나이 든 부인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카페인 없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미니바에서 따루어 와서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무슨 생각이 섬광처럼 그의 머리를 오고갔다.
그렇다.
노년이 되어서는 세월의 어떤 긴 병목, 터널 같은 지대를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모든
연배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어떤 과거라는 초원에서 함께 혼재하는 동시대인이 된다라고
하였지.
그 동시대적 초원에서는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자기보다 나이가 더 든 남녀끼리도 청춘남녀
시절 같은 또래의 친구였고 데이트를 했었다는 착각, 아니 아름다운 상상력도 그저 보통
이라고 하였어.
전에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이 기억의 한 모퉁이에서 그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는 문화혁명이 거의 끝나가던 시절에 홍콩에서 김홍련과 어울렸으니까 지금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여인과 그 어머니의 연령 관계 계산으로는 아무래도 산술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지금 로비에서 만난 이 여인도 대략 이토록 나이가 든 사람이어야 쉽게 연대가
맞는 게 아닐까.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지난번에 허리가 긴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에 그가 느끼고 계산한
날짜로도 그럭저럭 성립될 수는 있었지만---.
"두 분 인사 하셨죠? 여기 이 둘레에 코리언들 매우 부족해서 만나보라고 미팅 붙였어요.
즐기세요. 맘, 여기서 집까지는 조금만 걸으면 되니까 아프터 더 미팅, 워크 홈 플리스.
나 출근해야 되니까요."
어느새 젊은 여인이 로비로 따라들어와서 두 사람에게 인사치례를 하였다.
지난번만 해도 한국말이 완벽하다고 느꼈던 젊은 여인의 한국말이 이제 보니 그렇게 신통한
수준은 아닌가 보았다.
그의 딸은 아까 스쿨버스에 아이가 타는 것을 보고 얼른 출근을 하여서 그 자리에는 없었다.
"아, 걱정마세요. 아주 반갑습니다. 빨리 출근하세요."
그는 신사로서의 체면을 다하였고 젊은 여인도 서둘러 나갔다.
"홍콩에서 오셨다구요?"
그가 할머니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다시 건넸다.
"네, 반갑습니다. 엊그제 왔는데 딸이 하도 성화를 부려서---. 사위는 중국 사람인데 이곳에
주재원으로 와있는 중 카네기 멜런에서 MBA를 밟고 있어서 지금 필드워크를 나가있지요."
"다들 대단하군요. 그런데 사위도 10개 국어를 하시나요? 여사께서도 그렇게 여러 나라 말을
하신다면서요?"
그가 오해를 두려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을 그런 식으로 접근하여 풀어보려고
하였다.
"네? 10개 국어요? 하하하, 우리 딸이 옌볜식 유머를 쓴 모양이군요."
"옌볜식이라니요?"
"네, 지금은 공식적으로 '위만주국'이라고 '가짜 만주국'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예전에
일본군이 동북 삼성, 그러니까 만주라고 하던 곳에 나라를 만들고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것을 부르짖었지요.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노래도 많이 있었어요.
일본, 만주, 조선, 로씨아, 몽골 사람들이 만주국의 주인이니 표면상으로는 모두 서로의
말들을 열심히 잘 배워서 함께 통하라고 했지요.
물론 강제적 공용어는 왜말, 그러니까 일본말이었지만요.
우리조선 사람들은 거기에 참말 거짓말을 보태서 7개국어를 잘하자고 뒤에서 수군거렸어요.
이제 일본이 패망하고 나니까 마오쩌둥 공산당이 들어와서 통일이 되었는데 우리 옌볜에는
저은라이, 그러니까 주은래 수상 덕분에 조선족 자치주가 생겼다고 하지요.
모르지요, 그렇게 해서 조선을 다 말아먹을 생각이었는지요.
그런데 차츰 남한과 자본주의 사회가 잘 사는 줄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제는 10개국어를 잘
해야겠다는 말이 퍼졌어요. 그래서 똑똑한 사람을 보면 10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답니다. 중국식 과장법이라고나 할까요. 호호호."
할머니가 입을 가리면서 곱게 웃었다.
"그렇다면 혹시 김홍련 씨라고 모르세요? 연세와 모습이 모두 비슷하여서요."
그가 앞뒤 염치를 가리지 않고 불쑥 물었는데, 모습과 나이 부분에서는 착오의 위험을
무릅쓰고 약간의 아첨을 섞었다.
"글쎄요. 광둥어의 성조가 높고 세잖아요. 찐헝롄, 뭐 그런 식의 이름일텐데---,"
아, 그리운 이름---, 그는 전율하면서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였다.
"미안하지만 어렵겠는데요. 그리고 이제는 또 모두 베이징 보통화를 사용하는 십억 명 중의
하나가 되어서---."
그녀가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십억명이라---,
그러고보니, 게으르게 외면하였던 과거지사가 중국식 거대서사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마는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만리장성이나 대장정처럼, 또한 '10개 국어에 능통하다'라는 수사학처럼.
거기에 더하여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으니---.
그는 자책감 속에서 창밖으로 눈을 주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다.
읽다만 책 속의 남부군과 지리산의 영상이 그 눈발 속에서 문득 떠올랐다.
"눈이 더 내리기 전에 집으로 돌어가실까요? 날도 추워질텐데---."
그가 나이든 부인을 부축할 듯이 하며 일어났다.
부인은 아쉬운듯 힐난하는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가볍게 뿌리치고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로비를 걸어나오자 그가 현관문을 열어주는데 위로부터 무언가 날카로운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와차웃 아이서클(Watch out, Icicle)!"
부인이 소리쳤다.
"왕 고드름이네요.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런데 BBC 영어를 쓰지 않으시는군요?"
그가 놀란 가슴으로 한마디 하였다.
"네, 벌써부터 CNN 영어를 쓰지요."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답하며 눈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갈 방향과는 반대 쪽이었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적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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