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왠일이세요? 이사 떠난 동네를 다시 찾아오시고---."
추운 겨울날 그가 논현동 논현 아파트 근처를 서성이는데 혜미의 소프라노 음성이 뒤에서 울렸다.
"어? 이 근처에서 저녁 모임이 있는데 시간이 좀 남네. 옛 동네 생각이 나서 이리로 좀 걸었지."
"혜미 생각이 나서 이 추운날 걸어오셨다고 하세요. 도망가듯 사라지시더니---."
"전화 안한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아니 그보다 내 전화도 받지않고 끊기에 이제 우리 사이는
끝인줄 알았다."
"그 동안 일이 많았어요. 우리 저기 두산에서 하는 카페에 가요. 가서 생맥주 한잔 사줘요, 오빠."
"이 동네에 혜미 아는 사람이 한둘이야. 소문의 소굴로 들어가자고? 난 또 곧 술마시는 모임이
기다리고 있고."
"오빠는 맨날 소문 타령이네. 난 이제 괜찮아요. 과부 되었으니까."
혜미는 그의 친구 여동생이었다.
한때는 그녀의 적극적인 유혹으로 오래토록 몸도 나눈 처지였으나 세월은 잠깐인가, 지금은
모르는듯이 지낸지가 반년은 되었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오래 살던 논현 아파트를 팔고 이사를 가자는 바람에 지난해 가을에 부랴부랴
정리를 하고 신도시로 이사를 떠날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래 정사를 나누며 지냈다.
그는 시중 은행에서 낮은 직급의 행원을 오래 하다가 겨우 부장까지 승진을 하였는데 이것도
"라이프 디자이너"로 일을 하는 아내가 손을 써서 된 모양같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인생 설계, "라이프 디자인"도 아내에게 맡기고 사는 형편이었다.
아내의 직업이 라이프 디자이너라는 것도 그녀의 잘 만든 명함을 통하여서 알고 있을뿐 구체적인
것은 깜깜인데, 아마도 보험 설계사 계통의 일인듯 싶었다.
거기에 은행에서 하는 파이낸셜 플래닝을 곁들인 모양인데 은행원인 그와 일을 하지는 않고
그 윗선, 본점의 임원들과 줄이 닿아있는듯 하였다.
그는 그런걸 모르고 지내면서 오히려 "살기 편하다"라는 인생 철학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라고 왜 욕망과 자존심과 오기가 없겠는가. 그러나 살아봐라. 자기 아내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굳센 성격으로 내주장을 하며 자기 생활을 하는데, 그걸 고치려면 이혼밖에 없고, 그 이후를
그는 진정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딸, 여자대학을 다니는 딸을 생각하면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 강 화백이 언제 돌아가셨어?"
생맥주를 한잔씩 놓고 자리를 잡았을때 그가 물었다.
혜미의 남편은 이름이 별로 나지않은 화가였다. 혜미네의 친정이 워낙 부자라서 유산으로 받은
건물을 세놓아먹으며 그들은 강남 부자로 살고 있었다.
두 집은 논현 아파트의 같은 단지내에 있어서 그의 아내가 주선하여 가끔 저녁을 먹은 적도
있었으나 그래봐야 일년이면 한두번, 특히 그와 혜미가 몸을 섞고 부터는 거의 그런 모임도
피하며 살았었다.
"오빠네가 이사가시고 얼마되지 않아서였어요. 그때 사실은 이미 남편이 말기암 판정을 받아서
중환자실에 있었어요. 내가 우리 만나는 일을 한동안 거절한게 그런 사연이 있었지요."
"아니, 왜 안알렸어?"
"금방 과부될 팔자인데 자존심도 있었고, 과부 된 후에는 망자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해서 자숙
겸, 침묵 정책이었지요. 또 오빠같은 성격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어요? 호호호"
그녀가 정말 예쁜 과부처럼 웃었다. 교태가 미태 속에 담겨있었다.
"참 딱한 성격이네. 그 자존심---."
"오빠 부인 뻐기는것도 보기 싫었고---. 오빠 부인이 왜 논현 아파트 팔고 신도시로 내뺐는지
모르죠?"
"그건 당첨이 되어서, 아니 그게 아니던가?"
"답답하시군요. 부인이 강 화백과 오래 바람을 피웠는데도 모르시고."
"강 화백이야 아뜰리에에 누드 모델들이 수두룩 다녀가잖아. 그런 판에 중년 여인이 모델 좀 서면
어때서?"
"참 할말이 없네요. 내가 오빠를 유혹한건 부인과 내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네요. 그건 그렇고
남편이 죽기 얼마전에 오빠 부인도 끝장이 왔다는걸 알았고 그래서 서둘러 이 추억의 장소를 떠난
것 같아요. 이제 아셨어요?"
평소 술을 잘 안하던 그녀가 생맥주 한잔에 얼굴이 빨개져서 마구 말을 내뱉었다.
"모임 시간이 막 지났어. 난 일어나야겠다. 혜미야."
"오빠는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네. 사람이 뭐 그래요?"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건 이미 오래 되었어. 놀라지도 화낼 일도 아닌것 같다, 혜미야."
"오빠! 오늘 못가십니다. 우리 집으로 가요."
"강 화백이 귀신되어 달려들라. 농담같이 들리면 용서해라."
" 이제 탈상도 끝났네요. 오늘 밤, 원 나잇 스탠딩이라도 좋아요. 제 곁에서 못떠나요, 절대로."
"전에도 원 나잇 스탠딩만 하자구 해서 시작이 되었잖아. 난 그래도 우리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만나는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사랑이 아니라 기이한 복수극이었네. 혜미야, 이제 너는 내 친구의
여동생일 뿐이야."
그가 시계를 보며 단호히 일어섰다.
(끝)
창작 노트;
아직도 겨울 바람이 매섭고 황사가 심하던날, 저녁 약속 장소로 가다가 논현동 관세청 건너
동현 아파트 근방에서 친구를 만났다.
도봉산을 다녀 온다는 강골의 친구는 근처 생맥주 집에서 한잔 하자고 권했다.
약속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 시간을 죽이기에는 딱 좋은 권유였다.
두산에서 하는 그 카페에는 부인들이 많았고 친구는 그녀들이 모두 동현 아파트 사람들
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주제는 "이재용"이가 이혼한 사연에 대한 따끈따끈한 내용이었다.
그러다보니 약속 시간에는 조금 늦었다.
다만 어떤 시민단체에서 창간호를 내는데 숙제로 받았던 꽁트 한편을 위와같이 건졌다.
천만다행이었다.
시민단체의 이름은 녹색건축 청색도시 시민디자인연대(녹청련)"이고 계간지의 제호는
"에어 디자인"이다.
숨 좀 제대로 쉬고 살자는 염원이 담긴 이름이다.
환경을 주제로 하여 건축, 건설, 도시, 생태, 디자인, 조경 등등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자는
시민운동가들의 모임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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