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청보리밭의 아낙네들

원평재 2010. 4. 7. 21:06

   

  

 

   

  

      

    

 

      

   

  

   

      

 

   

  

 

    

       

  

 

     

  

      

  

  

  

 

 

서초 문협 발간 <문협 서초>의 지난해 2009년도

 

"소설 문학상"

 

 

 

 

해금 산조(奚琴 散調)

 

 

“학교”라는 두 글자만 봐도 나는 항상 가슴이 뛴다. 더욱이 그 학교가 '대학' 혹은 '대학교'라고

하면 내 가슴은 종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높은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내 평생의 소원 같은 게 그런 심정을 자아낸

결과이겠지만 그렇다고 턱없는 욕심을 부릴 까닭도 없다.

그건그렇고 수도 서울의 북쪽에 있는 “모래내”, 행정구역상으로는 “남가좌동”에 있는

“수도 예술 대학”의 평생 교육원에서 “해금”을 배우는 성인 교실이 있다는 소리를 남편의 

중고차에 있는 라디오에서 들을 때만 하여도 그건 소음이었다.

 

주부 들을 위한 그 안내 소식이나 내 희미한 기억 속의 해금 소리는 모두 그 오래된 차 속의

고물 라디오에서 찍찍대며 나오는 잡음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다만 대학 평생 교육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대학 문턱에 대한 내 소망과 관련

하여서라면 약간의 흥미는 끌 수 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여고생 딸이 대학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나도

그때는 대학의 문턱을 자연스레 넘어 볼 것이었다. 내 소망의 한계는 그 정도일 따름이었다.

 

"당신도 저걸 한번 다녀보지."

소음으로 여겼던 "해금 교실" 안내가 끝나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착한 남편이 기절초풍할

제안을 하였다.

운전대 위에 턱 얹힌 남편의 손마디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로 부풀어 올라있어서 볼

때마다 나는 안쓰러운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남편은 미장일을 하고 나는 벽지 붙이는 일로 서울이나 신도시를 안다녀 본 데가 없는,

우리는 아파트 건축기사 부부이다.

하기 좋은 말로 남편은 미장 기사, 나는 도배 및 실내 도장 기사인데 협력업체를 묶어서

교육시키는 큰 건축 원청회사에서 발행한 기능공 자격증이 집안 어느 구석엔가 보물처럼

잘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자격증에는 물론 기사가 아니라 기능공으로 나와 있다.

 

하여간 그 "종이 쪼박지"라고 우리가 부르는 자격증이 남들에게는 무어 대수롭지 않을는지

몰라도 그래도 남편 보고 노동판의 십장이 "어이, 쓰미!"하고 하대하여 부르거나, 여자인

나보고 "어이, 벽지 잡부!"하고 막말로 불러대던 때하고는 자격증 이후의 대접이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영등포에 있는 공고를 나온 다음, 주물 하는 데에서 끓는 쇳물을 붓다가 발등을 덴

후부터는 미장일로 돌아서 일급 미장 기능공이 되었고, 나는 서울 역 뒤, 만리동 꼭대기에

있는 여자 전수 학교를 나와서 중소기업의 사환 겸 경리 직을 하다가 경리과장이 추군 거리는

게 싫어서 사표를 내고 나왔었다.

마침 인근에 국가에서 하는 건축 기능공 단기 훈련 과정이 있어서 기술을 금방 익힌 다음

아파트 공사장을 돌아다니는, 날 품팔이가 되었지만 수입은 해마다 아주 짭짤하게 올랐다.

공사판에서 젊은 나이에 우리 부부는 눈이 맞아 일찍 결혼도 하였고 딸아이도 하나 낳아서

잘 키우며 살고 있다.

일이 좀 힘들고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라 그렇지 우리가 받는 일당은 벌써부터 8-9만원

남짓이 되어서 특별히 잔업으로 날밤을 지새운 공사까지 낀 달에는 둘이 받아서 쓰고도

한 달에 몇 백만 원 씩 돈을 모은 적도 있다.

비오는 날도 공치는 날이 이제는 아니다. 내장 공사 전문으로 우리 부부는 이름이 나서

겨울 한철 조금 빼고는 일 년 열두 달 노는 날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닥치는 건설 경기 불황 때면 몇 달 씩 손을 놓고 얼마 벌어놓은 것을 까먹는 신세가 되는데

그럴 때는 죽을 맛이다.

특히 매일 아침 책 가방을 메고 학교로 나가는 딸을 보면 벼랑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요즈음 그런 악몽이 다시 시작될 조짐이 좀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 서울에서는 버틸 만

하다는 것이 건축업계 바닥에서 일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다.

 

  경기가 좋은 시절이면 남편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말 타면 종마 잡히고 싶다네"라고

하면서, "우리도 남들처럼 일당 말고 월급이란 걸 한번 타봤으면 좋겠어---", 혹은 "회사

전화가 몇 번이냐고 묻는 딸아이의 성화에 휴대폰 아닌 직장 전화라는 걸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네," 등등의 배부른 타령도 가끔 했으나 흘러가는 한 순간의 푸념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비정규직이라는 팔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여 간 세월은 많이 좋아졌다. 사글세방으로 시작한 집만 해도 전세방을 거쳐서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우리의 집을 등기부에 올리고 살게 되었다. 집이라야 대단치는

않아서 오래된 연립주택의 반 지하층이긴 하지만 사는 데에 지장은 없다.

다만 딸아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아 하지만 성격 좋은 아이라서

마음에 타격 입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니 내색만 않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못난 부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니 사실은 우리 부부가 꼭 못난 사람들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강남 일원동에도 오래된 연립주택이나마 지하를 쪼개서 등기한 게 있긴 한데 그 무슨

재건축법이 바뀌는 바람에 강남 주택 자가 되려는 다 된 밥에 정부가 재를 뿌린 미해결

사건 같은 것도 우리는 안고 있다.

머리는 굴렸어도 운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기다리다 보면 강남 주민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강북의 연신내 쪽도 무슨 뉴타운인가 뭔가 하는 게

된다고 하니 지금 살고 있는 헌 연립주택에도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강남 사람이라고 모두 날 때부터 부자도 아니고 더 지혜롭거나 부지런 한 것도 아니면서

어쩌다 판이 갈라졌는데 이제는 맨발 벗고 따라가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지만, 나는 기가

죽거나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두고 봐라, 이제는 강북 시대가 정녕 오려니 하고 굳게 기다릴 셈이다.

아무리 개인이 근면 성실하여도 나라의 정책이나 흐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개인으로서는

이런 차이를 회복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파트 공사판에 나와서 세상 물정 돌아가는 것을 그동안 보아 온 내 안목적 견해로는 이건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강남에 집 있는 사람들이 더 근면하고 머리도 좋고 지혜가 더 있고 더

성실하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예전에는 모두 얼마 되지 않은 자금으로 은행 빚 얻어 우연히 남쪽에 살다가

횡재를 했거나, 직장 탓으로 그리 되기도 했을 것 이고, 혹은 미리 알음알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공기를 알아 자리를 잡은 결과가 이렇게 팔자를 갈라놓은 게 아닌가 말이다.

 내가 뒤늦게나마 이런데 눈이 뜨여서 강남 일원동에 쪼가리 등기를 해 놓는다고, 이자가

조금 센 저축은행의 돈까지 얻어서 과하게 투자를 한 탓에 우리생활은 항상 빠듯하지만

남편은 이런 미래 계획도 모두 내가 전수학교나마 나와서 경리사원도 해보고 또 건축

공사판에 들어와서 견문을 넓힌 지식 덕분이라고 항상 고마워한다.

어쨌든 정치가들 때문에 건축법이 까다로워졌지만 언젠가 빛을 보리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는다.

물론 때때로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가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불안 해 하며

가족들에게 미안할 때도 많다.

 

남편은 내가 전화 번호 스무 개 쯤은 지금도 외우는 실력을 항상 아까워한다.

전수 학교를 나와서 경리직원까지 한 내 경력도 남편은 항상 높이 평가해준다.

사실 만리동 꼭대기의 그 전수학교 야간부는 돈이 없어 낮에는 사환 같은 일을 하다가

밤이면 중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겠다고 모인 악바리 소녀들의 집합 장이었는데,

나쁜 데로 풀린 애들도 있었지만 다들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고 중소기업이나

때로 대기업, 좋은 회사로 진출한 경우가 더 많았다.

또 탤런트나 여배우로 나가서 이름이 난 선배 언니들도 있었는데 최근에 무슨 학력

시비가 났을 때에 그 스타들로부터 솔직히 우리학교 졸업생이라는 당당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섭섭한 적도 있었다.

그 언니들은 우리 후배들의 존경과 희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보, 내 말에 왜 대답이 없소?”

남편은 끈기 있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금을 배우라고요? 아이구, 미쳤어요. 당신 농담이지요? 무슨 깽깽이 판에 돈을

내고 다니라니 그럴 돈도 없거니와 또 그 시간에는 돈도 못 벌잖아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당신 정말 아이들 말처럼 맛이 갔수?"

내가 지난 생각을 하다가 남편의 엉뚱한 제안에 화들짝 놀라서 그의 굵은 손마디를

꼬집으며 강력하게 반대를 하였다.

내가 특별히 교양이 있는 사람은 못되지만 이렇게 까지 반응이 격하게 나가는 것은

모두 은행에서 얻은 빚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담담하였다.

 

"깽깽이라니 그런 교양 없는 소린 하지 마시게. 얌전한 내 각시가 그런 험한 소리는

어디서 배웠어?

그리고 내가 지금 방송을 들어보니 일주일에 하루만 나가서 세 시간 몰아서 수업

받고, 또 그 해금이라는 악기도 당장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빌려준다는데---.

우리가 지금 주로 모래내 공사장에 있으니 해금 배우는 장소도 가깝잖아. 이럴 때

대학 문턱도 한번 넘어봐. 당신은 아까워---."

대학이라는 말이 우리의 대화에도 이렇게 쉽게 끼어들어가고 또 내 재능을 아깝다고

표현하는 남편의 말에 내가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이 울컥하는데 그는 말을 이었다.

 "엊그제 우리가 왜 공사장에서 밥 시켜 먹을 때 깔아둔 신문지에 요즈음 가정주부들이

무슨 해금 배우는 게 유행이고 어쩌고 하는 기사가 나왔잖아.

그때 같이 있던 인부들이 할 일 없는 여자들 지랄 떤다고도 했지만 지금 방송 들으니

그게 정신 수양도 되고 교양에도 좋겠네.

우리 겨울마다 건축회사 교양 시간에 나가서 교육 받고 오잖아, 귀찮다고 하면서도

대학 교수들이 와서 좋은 이야기 많이 해 주었지."

 

  남편의 갑작스런 권유는 눈물겹게 감사했지만 내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돈 문제만이 가장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돈에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돈과 관련한 그런 강퍅한 생각 때문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의 뜻 있는 시간을 접어버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내가 멈칫한 것은 오히려 나처럼 전수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주제에 비록 정규 대학은

아닐지라도 대학 부설 평생 교육원이라고 하는 데를 통하여서 대학의 문턱을 갑작스레

넘게 된다는 생각에 잠시 심장이 멎을 번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날 저녁, 남편은 해금 문제를 집으로 까지 갖고 들어왔다. 계속 머뭇거리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여고생 딸 아이였다.

 

"엄마, 거기 수도 예술 대학 말고 신촌 쪽으로 더 나가셔서 이화여대 쪽으로 가시지

그래요. 그리고 한번 외치는 거예요. '나도 이대 나온 여자야!' 라고 말이지요."

집안에 큰 웃음이 터졌고 나도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깊은 호흡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식구들의 결정은 끝이 났다. 딸아이는 인터넷으로

해금 교실에 등록을 해 주면서 자꾸만 이화여대로 가라고 했지만 우선 모래내 쪽이 금액이

쌌고 지금 작업장과도 아주 가까워서 일단 2년제인 “수도 예술대학”으로 시작을 하고

나중에는 정말 나도 "이대 나온 여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해금 교실에 나가기 전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이 오지않는 이유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 부부는 모래내 그 학교로 일찍

찾아갔다.

나는 남편과 거의 같은 작업장으로 나가니까 남편은 이날도 나를 평소처럼 차에 태워서

집을 나섰다.

다만 중간 목적지가 새로 생겨서 나를 대학 문 앞에다 내려놓고 인근에 있는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으로 갔다.

나도 오전 해금 교실을 마치면 오후부터는 다시 공사장에 반나절 일을 하러 가기로 하였다.

 

  대학은 신선함을 넘어서 신성하게 느껴졌고 일찍부터 교문을 들어서는 젊은 학생들은

우리네 공사장 일꾼들 하고는 벌써 종자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도 내가 너무 흥분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교문 입구부터 평생 교육원을 안내하는

화살표는 친절하게도 발길을 이끌었고 종내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강좌로 화살표가

갈라졌는데, 그 중에서도 '해금 교실'이라는 글자는 내 눈에 더욱 아름답고 선명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그 화살표대로 당장 들어갈 형편은 아니었다.

우선 교육원 입구에서 등록 확인을 할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복남인데요---."

내 목소리가 작았는지 사무원 아가씨는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물어보았고 "김복남"이라는

촌스럽고 애매한 이름이 다시 한번 그곳 대리석 바닥과 천정을 송구하게 울렸다.

복이 많고 남자처럼 씩씩하라고 가난하며 병약했던 내 아버지가 40년 전에 소망을 담아

주신 이름이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신규세요?"

"네에? 뭐라구요?"

"처음 오셨죠?"

"아, 네에---."

"301호실로 가세요. 인터넷으로 등록이 잘 되어있군요."

그렇게 해서 당도한 301호실에는 나 말고도 몇 사람이 벌써 와 있었다.

젊은 여자, 할머니, 중년---,

나도 중년이니 우선 중간은 되는구나 싶어서 안심이 되었다.

의자 위에는 다시 한번 "김 복남"이라는 명찰이 이미 빛나고 있었고 부드러운 재질의

악기 케이스도 얹혀 있었다.

"해금이야!"

내 눈치가 나에게 속삭였다.

"케이스가 깨끗하지 않은 걸 보면 우선 빌려주는 거야."

눈치가 또 알려주어서 나는 케이스를 열고 해금을 만져보았다.

그림이나 TV에서는 보았지만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내 눈치 동작에 고무되어서 요란한 옷을 입은 아주머니를 필두로 하여 모두들 케이스를

열기 시작하였다.

케이스 속에는 두 줄을 생명의 탯줄처럼 달고 있는 작은 악기가 앙징스럽게 누워있었다.

가끔 TV에서 본 바이얼린 같은 것이리라고 짐작을 했는데 막상 보니 그 크기는 공사장에서

가끔 보는 허리가 잘룩하고 왜소한 베트남 근로자 모양이랄까, 하여간 가녀린 악기가

너그러운 주인의 손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자기소개를 통하여서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썩 잘 차려입은 삼송리에서 온 노처녀 타입의

여자는 방금 케이스를 열고 꺼낸 악기를 끼고 앉아서 무얼 어떻게 하는지 낑낑대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우리 해금 신규 교실의 총무가 되었다.

나도 덩달아서 케이스를 열고 유심히 들여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받은 해금 악기는

몸체와 활이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몸통과 활, 두 부분이 한 세트로 된 악기라서 이리저리

다른 사람의 것과 잘못 섞이는 걸 막으려고 평소 묶어둔 결과이겠지만, 수강생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도 분리하지 않고 그냥 붙여놓은 것은 담당자들이 좀 불친절하거나 게으른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즈음 중소 규모의 건축회사 수준만 되어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학교라는 데가 사회에 비해서 제일 늦다더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쨌든 시간을 내서 해금을 배우러 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듯이

어느새 자리를 다 채운 수강생들이 활과 몸통을 분리하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워낙 조심성 많은 나는 그들을 잘 관찰하면서 분리 작업을 눈여겨 보아두고만 있었다.

이윽고 머리를 위로 부풀려 올린 구파발에서 온 부인이 일착으로 그 작업에 성공하였다.

삼송리 여자는 구파발 부인이 먼저 핀을 뽑아내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나서는 역시 금방

따라서 분리를 한 다음, 한발 늦은 것이 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다는 듯이 케이스 속에서 송진을 찾아내어 활에다 문지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저 활과 송진을 본적이 있었지.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던가---.

전에 우리는 진관외리에 살았었다.

거기 초등학교에서 재능 개발 교육을 시킨다고 그림과 체능과 악기 등등의

특별 활동 수업을 크게 시작하였는데 그 때 딸아이는 바이얼린을 하고 싶다고 얼른 신청을

해서 학교에서 외상으로 준 악기까지 집으로 갖고 온 적이 있었다.

아이는 배우기도 전부터 그 서양 깽깽이를 잘도 만졌고 활에다가는 송진인지 무언지로 풀

먹이는 시늉도 하면서 즐거워 한 적이 있었다.

 

아이의 꿈은 어쩌다 며칠 후에야 알게 된 아빠가 혼구녁을 내면서 박살이 났다.

계집애가 무슨 그런 무당 같은 짓을 하느냐며 딸을 혼내주는 아빠의 말은 막무가내 주장에

다름 아니었는데 그걸 듣고 보며 서럽고 억울하긴 엄마인 내가 딸 보다도 더하였었다.

물론 당시의 우리 주제에 그런 돈 쓸 여유가 어디 있으며 있다하여도 절약을 하자는 남편의

깊은 속마음을 알 듯도 싶어서 결국 나도 딸을 말리고 말았다.

하여간 그런 정도로 깽깽이를 싫어하던 남편이 세월은 좀 흘렀지만 이제 와서는 나에게 무슨

은혜 베풀 일도 아닌데 이렇게 나오니 정작 나도 얼떨떨 할 따름이었다.

 

아침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신규 수강생들이 자신의 해금에서 몸통과 활의 분리작업을 거의

끝내갈 무렵, 젊은 여성 강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자기를 평생 교육원 소속의 강 인영 교수라고 소개하면서 그냥 강 교수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였다.

"제가 젊은 노처녀니까 강 교수님이라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강 교수! 그렇게만 부르세요.

호호호.

여러분 웃읍죠. 한번만 더 웃읍시다. 바나나가 웃으면 뭐라고 하죠? 네에---, 바나나

킥이에요, 호호호.

하나만 더 할까요? 자갈이 삐쳐서 치~하면 뭐가 되죠?"

"자갈 치!"

구파발에서 온 부인이 얼른 정답을 외치더니 혼자 또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네, 맞습니다. 신규 분 들이라 참신하고 의욕적이어서 저도 항상 즐거워요.

그런데 큰일들을 내셨어요. 활을 본체에서 다 뽑으셨네요. 이를 어째요. 다 망가뜨렸어요.

해금은 바이얼린과 달라서 원래 두 부분이 붙어 있어야 되거든요.

아이구, 저 신규님은 송진까지 갖다 바르셨네요. 송진은 물론 앞으로 열심히 활에다가 발라야

되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본체와 활을 연결해야 되니까 송진이 자꾸 손에 묻게 생겼어요.

힘들게 되셨네요, 호호호."

 

 신규 부인들은 다시 악기를 조립하여 하나로 만드느라고 난리를 쳤다.

설마 악기를 부셨으니 변상하라고는 않겠지만 아무튼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다.

"자, 이제 분위기를 살려서 자기소개를 해요. 그리고 반장도 한 분 뽑아야 하는데---."

강 교수의 시선이 내게 와 박히더니 일단 내 옆의 할머니 같은 분에게로 갔다.

할머니를 시작으로 모두 돌아가면서 자신에 관한 소개를 먼저 하라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나가는 곳을 대며 모두 집안 살림만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준비한 듯이

줄줄 읊었지만 나는 그저 집에서 밥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반장은 아까 그 내 옆의 할머니가 연장자라서 임명이 되었고 총무를 뽑는 순서에서 교수의

시선이 또 내게로 왔다.

 

"저요, 저! 제가 하겠어요."

삼송리 아주머니였다. 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반장 님 부터 이제 여기 해금 교실에 등록하신 동기를 한마디로 소개해 주시죠."

"네, 저는 아까 그 부업도 있고 손자도 키워 주는데 영감부터 저를 너무 무시해서 황혼

이혼을 하려다가 해금을 배우러 왔어요. 해금이 화병을 고쳐준다고 해서요.“

"잘 오셨군요. 국악이 음악 치료 효과에도 안성맞춤이지요. 하지만 힘들면 화병을 더

키우시니까 마음 편하게 슬슬하세요. 그럼 총무님은요?"

"저는 구파발에서 왔지요. 국악에 관심이 많았는데 기회가 없다가---, 가야금은 줄이 많고

이건 두 줄이라서 쉬울 것 같아서 왔어요. 그쵸, 교수님? 그런데 우리 연주회는 언제 하게

되나요?"

"네, 그런 건 나중에 답해 드릴 테고 계속 또 돌아가면서 소개하시죠."

"저는 기자촌에서 왔어요. 그런데 보통 해금 교실이 오후에 있더라구요. 그런 시간에 

나갔다가 집에 오면 항상 저녁 시간에 쫓길 테고 밥 기다리는 가족들이 맨 날 해금 진도

나가는 거나 물어 볼 텐 데, 그래서 용기가 안 생기더라구요.

여기는 아침 시간이어서 슬쩍 다녀오면 되겠다 싶어서 힘을 냈어요. 행복해요~."

"아유, 우리도 그래요!"

기자촌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가좌동, 북가좌동에서 왔다는 부인 두엇도 얼른 그 말에

동조하였다.

 

하여간 소개는 그런 식으로 돌았고 이제 자유질문 시간이 되었다.

구파발에서 온 머리를 높이 올린 여자가 물었다.

"아까 연주회 언제 하느냐는 질문도 나왔었지만, 우리 자격증은 언제 따요?"

"자격증? 아니 해금 연주에 무슨 자격증이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네, 2년쯤 되어야 딸 수 있어요. 그런데 우선 실기는 우리 해금 교실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제가 수시로 평가를 하구요, 출석과 더불어 그게 모두 합산해서

들어가죠. 필기시험도 쉽지는 않지만 음악은 일단 연주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묻지요? 첫날부터---."

"아이, 첫날이니까 묻지요. 자격증 따면 나도 해금 교실을 동네에서 한번 열어볼까

해서요---."

 

"꿈도 야무지시네."

이런 소리는 물론 나오지 않았지만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모든 이의 입 속에서는 그런

말이 맴돌았을 법 한 분위기였다.

"자, 그럼 우리 한번 해금 악기의 소리부터 내 볼까요?

이렇게 따라하세요."

 

신규 수강생들은 강 교수를 따라서 해금의 생명줄을 왼손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잡고 거기

붙은 활을 오른 손가락으로 걸친 채 잡아당겨 보았다.

여러 가닥의 말총으로 된 활은 억지로 나오는 신음이나 막 되먹은 비명은커녕 하다못해 짧은

한숨 소리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모두 긴 침묵의 바다에서 하릴없이 노 젓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정말 강의실은 쥐죽은 듯 하여서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두 줄 밖에 되지 않아서 찾아왔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간단한 그 현으로 득음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거기 모인 누구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아이구, 웃음 참느라고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연주회 언제 하느냐고 보챈 사람, 그리고 

악기 연주 자격증 따는 걸 묻던 사람들이 글쎄 깽깽이 소리하나 못 내고 강의실은 쥐죽은 듯

했으니, 하하 호호, 아이고 미쳐요. 하하 호호."

그날 저녁 연신내의 우리 연립주택은 모처럼 배꼽을 잡는 소동이 벌어졌다.

해금 교실은 일주일에 한번 화요일 오전 9시부터 세 시간 동안에 걸쳐있었다.

강 교수의 열정은 알고 보니 이 분야에서는 호가 나있었고 아침 시간이라 주부들의 어려움이

해소 되어서인지 선착순 신규반은 열두 명 정원이 금방 다 찼고 수강생들의 열의도 대단하였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 건축 공사장은 연말이 되면서 일거리와 분위기가 모두 좀

시들해졌다.

모래내의 주상 복합 공사가 워낙 커서 매일 일은하지만 잔업을 잡아서 돈을 더 벌 기회는

없었고 뉴 타운 계획도 당분간 분양 시장의 흐름을 보고 계속 되리라는 말이 돌았다.

내가 해금이라도 배우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집안에는 웃음이 사라질 뻔하였다.

독서실과 학원에서 늦게 들어오는 딸아이 하고는 될수록 말을 아끼고 TV도 작은 것을 놓고

마치 몰래 듣고 보다시피 하는 가정에 잔업도 없이 일찍 들어와 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에

깽깽이를 사이에 한 대화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아무런 낙이 없을 뻔하였다.

 

물론 동짓날 긴긴 밤을 이 좁은 연립주택에서 깽깽이를 연습하며 보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다가는 주민회의에 붙여져서 쫓겨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들도 결코 아니었고---.

우리는 그저 해금이라는 국악기에 관하여 별로 깊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으쓱하였고 행복하였다.

해금 연습의 진도가 좀 나간 어느 날 저녁에도 우리 부부는, 아니 내가 주로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정말 해금이 좋아요. 악기를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가 더 생기고 부터는 점점

더 많이 반했어요.

정말 아주 예쁜 아낙네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슴은 봉긋하고 몸매는

가늘어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모습이 정말 그래요.

또 그 기능은 얼마나 신기한지, 악기에 줄이 딱 두 가닥 뿐인데 모든 음을 다 낼 수가

있어요.

더 놀라운 것은, 그 음들이 연주 중에 제가 다 조절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악기들처럼 연주전에 미리 조율을 해 놓으면 그 다음에는 무조건 그대로

음이 나오는 그런 장치가 아니라니까요.

연주 중에도 제 손가락으로 줄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면, 음이 그만큼 올라가고, 힘을 조금

빼면, 음이 낮아지고,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서 순간순간마다 호흡을 맞춘다니까요.

정말로 딱 두 줄 뿐인데 바깥 줄, 유현은 대체로 높은음을. 그리고 안줄, 중현은 낮은음을

내요.

두 줄의 사이는 너무 좋아요. 금슬이 우리 부부처럼 좋아요. 꼭 사랑하는 연인 같아요.

둘이 서로 어우러져 만지고 사랑하고, 그래서 소리를 내고---.

그리고 해금의 줄이 붙어있는 그 긴 막대를 죽대, 혹은 줏대라고 해요.

그래서 ‘줏대가 있다, 없다’ 하는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거기 줏대 높은 쪽의 끝에 붙어있는 여인의 가슴 같은 것을 주아라고 해요.

그걸로 현, 그러니까 줄을 조절해요. 조이고, 또 느슨하게, 그래서 정음을 찾아내지요.

그리고 활. 활대에 말총을 묶어서 활이라고 하는데, 손잡이가 있어요.

이 손잡이는 여기 보듯이 이렇게 가죽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 모든 힘을 제가 또 조절을

해요.

말총이 묶어진 이 활, 이것을 이렇게 팽팽한 긴장 상태로 제가 제 손의 힘으로 만들어

내지요.

바이얼린 같은 현악기나 다른 모든 악기는 이 활도 미리 조절해서 연주를 하는데, 우리

해금은 제가 제 손과 손가락으로 힘을 조정해서 한다는 게 참으로 마음에 들고 대견

하다니까요.

여보, 제가 언제 이렇게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소리를 내며 살아 본 적이 있어요---?"

 

"그래, 그것 참 신통하네. 나도 정말 당신과 똑같이 맨 날 눈치나 보고, 또 미리 짜여져

있는 공사 진도표대로 꼼짝없이 살아왔지. 언제 내 손에 힘주고 내 창의성 갖고 살아본

적이 있느냐 그런 말이지.

교양 교육 받으러 가면 맨 날 창의성을 발휘하라고 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정말 신나는 당신의 설명이야. 당신이 그걸 느끼며 악기를 배우고 있다니 그게 더 신명이

나네.

그런데 해금에도 무슨 콩나물 대가리 같은 게 있어야할 것 아니요.

그런 게 당신 노트에는 통 보이지 않더만?"

 

남편은 자신이 워낙 아는 범위가 좁아서 노상 걱정이라는 듯 이 날 저녁에도 내 긴

설명에 조심스레 물음표로 응대를 하였다.

"네, 서양 음악이야 오선지 위에 콩나물을 그리지만 우리 음악은 그냥 글로 써서

황-태-중-임-남이라고 높낮이를 표현하는데 피아노의 낮은 중간 음 같은 것이지요.

물론 우리도 실력이 나아지면 서양 악보를 놓고 그대로 연주도 한데요."

"난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네. 하여간 그러면 국악기나 해금 악기가 음이 좀 적다는

말인가?"

남편의 관심이나 생각이 진정 내가 하는 해금 공부에 깊은 반향을 나타내 주고 있었으며

나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아뇨, 꼭 그렇지만은 않죠.

해금의 경우, 줄을 잡아당기고 또 풀어서 음정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서양 12음계는

물론이고 더 나눈 음, 미분 음까지도 낼 수 있어서, 현대적 창작 음악, 서양 음악까지

연주가 가능하대요.

악보를 여기에선 정간보라 하는데 모든 음악의 음을 이 정간보 위에 그리지요.

모든 수강생들이 한자는 잘 모르고 해서 그저 한글로만 통하지요, 호호호."

내가 웃으며 해금을 쥐고 연주를 조금하였다. 해금 소리가 외곬으로 골이 깊어서

구슬프게 들리기가 십상이지만 오래 끌지만 않는다면 연립주택에서도 그럭저럭

소리가 용서될 만하리라고 나는 내 식으로 해석을 하여서 집에서의 연습에 너무

과민하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이웃에서는 대체로 면죄부를 주는 듯싶었다.

 

"여보, 제가 정간보, 그러니까 악보의 계명을 부르며 한번 켜 볼게요. 이게 무슨

곡인지 알아 맞춰 보세요.

황황태태황황남ㅁ

황황남남임ㅁㅁㅁ

황황태태황황남ㅁ

황남임남중ㅁㅁㅁ

여기 정간보에서 보시는 네모는 두 박자이죠. 음이 그만큼 길게 끌려요."

"아, 지금 한 건, 그거 학교종이 땡땡땡이네. 그런데 음정들이 낮으니까 학교가기가

아주 싫은 아이가 부르는 소리구만, 하하하."

“호호호, 그러게요.”

남편의 우스게에 나도 큰 소리로 화답하며 웃었다.

 

"그런데 연주하는 모양이 어째 우습네. 양 다리를 쩍 벌려서 양반 다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연주할 때도 그렇소?"

남편이 내 양반 다리 사이를 힐끗 보며 웃었다.

"에이, 주책이셔. 하긴 오른쪽 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서 좀 우습죠?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무슨 가부좌 모양이라던가요. 하여간 여자들이 그러고 있으니

쩍이 아니고 짝이라고 하세요, 호호호. 하여간 그게 기본 몸 사위랍니다.

하지만 연주할 때는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경우도 꽤 되나 봐요.“

"여보, 지금 우리 어떻게 안 될까?"

"안되죠. 아이가 곧 올 텐데. 저는 다리 사이를 손수건이나 타월로 덮고 연주 하는데

용기가 있는 건지 다른 여자들은 정말 짝 벌리고 그냥 연주해요. 호호호."

"그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말 오래 참았던 이야기를 물어 봅시다. 당신은 그런데 왜

우리가 사랑을 할 때면 꿈쩍도 않고 그냥 누워만 있으면서 또 쥐죽은 듯 아무 소리도

내지를 않소?

친구들이나 일터의 남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여자가 우는 소리도 내고해야 기분이

오르고 더욱 사랑하는 생각이 난다는데 말이오?"

"에이, 끔찍해요."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면 그게 정상이야. 난 물론 집이 작고 형편없어서

당신이 참는 줄로 알고, 고맙고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지만 말이오.

그런데 요즘은 우리 사정도 좀 나아졌고 하니 말 타면 종마 잡히고 싶다고 말이오,

하하하.

하긴 이런 게딱지같이 작고 헐어빠진 연립 지하를 괜찮아졌다고 하는 내 마음도 염치가

없구려. 당신이 항상 가여워."

"미안해요. 사실은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마다 제가 감정을 억지로 참고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그 후 새 엄마가 들어왔는데 밤만 되면 무서웠어요. 밤일을 나누는데 어떻게나 비명을

지르던지, 새엄마가 말이에요.

무얼 찢는 듯한 골이 깊은 비명과 이어서 흐느낌 소리, 그게 꼭 무어랄까, 아, 그래요---,

그 때 제가 살던 시골 오일장 때마다 장터에서 해금, 그때는 앵금, 또는 아쟁이라고

했어요.

그 악기를 연주하고 잡화를 팔던 어떤 나이든 아저씨의 깽깽이 소리 같았어요.

특히 그 흐느낌 소리가 말예요.

저는 그래서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면 꼭 소리를 죽이고 입을 닫았지요.

그때 들은 그 소리가 생각도 하기 싫었어요.

물론 제가 감정을 억누르는 더 큰 이유는 우리 집이 허술해서 항상 우리 하나 밖에 없는

딸아이에게 신경이 쓰인 탓이 컸지만요---."

"미안하구려. 내가 그런 당신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물론 우리 아그 새끼 때문

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큰 집이 아니라 제대로만 되었어도 사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오.

자 우리 즐거운 이야기로 말을 바꿉시다. 아까 무슨 정간보라고 했던가, 그 악보에서

황황태태 하니깐 나는 시원한 황태국물 생각만 나데, 하하하."

"호호호, 내일 아침에 끓여 드릴게요."

남편이 웃자 나도 따라서 시원하게 웃었다.

"여보, 그런데 참, 그런 과거 이야기가 있었다면서 이제는 그 아쟁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졌소? 진저리치지 않고?"

 

"네, 그럼요. 황이라는 음정에 맞추면 좀 쳐지기는 해도 그렇게 비명 소리도 아니고,

또 이제 하나 높여서 중이라는 음정에 맞추어 높여 봐도 아주 소리가 아름답고 천연덕

스러워요.

현이라는 게 원래 좀 처량한 데가 있지만 그것도 곡에 따라 다르고 또 연주자의

마음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요. 더욱이 이제 연말이면 어찌되었건 연주회도

하자고 몇 사람이 성화를 대니까 분위기가 아주 떴어요.

저는 이제 해금이 주는 스트레스로 부터 해방이 된듯해요.

그 어둠의 과거로부터 빠져나온 것 같아요. 그게 모두 당신 덕분이지요.

그런데 여보, 당신은 왜 그렇게 우리 딸아이에게 바이얼린도 못하게 하더니 제겐

먼저 해금을 배우라고 했어요?"

 

"나에게도 말 못할 과거지사가 있다오. 말하기 부끄러운---, 아니 이제 당신에게는

말해 볼게.

내 고향이 원래 저 소백산과 노령산맥 골짜기, 무진장이라는 데 아니오.

무주, 진양, 장수 마을이 지금은 아름다운 곳으로 탈바꿈했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지.

그 세 동네의 5일장터를 돌아다니며 앵금을 켜고 동냥을 얻은 당달봉사, 장님이 내

아버지였다오.

어머니는 언제 어디에서 헤어졌는지 내 기억에 없고 아버지도 자기 새끼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실 리 없었지요.

이 양반은 5일장터의 몫 좋은 곳에 슬그머니 다가가서는 아쟁을 꺼내놓고 "앵금아~"

이렇게 당신의 목소리로 먼저 불러 재치지요.

그리고는 활로 앵금 줄을 쓱 그으면 '으응~'하고 대답이 나온단 말이오.

사람들이 와아 웃으며 '앵금이 새끼도 노래한곡 해라' 이랬다오.

나는 죽어도 노래를 하지 않았고 그러면 아비는 어림짐작으로 활대를 들어 자기

새끼를 후려쳤어요. 새끼는 피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맞아주며 앙~!하고 울었고 그게

또 앵금 소리 같다고 사람들이 다시 와아, 웃고---.

그렇게 해서 손님이 꾀면 몫 좋은 곳에 좌판을 깔아놓았던 장사치들이 그제야 울 아비,

장님을 내 쫓아요.

나는 눈이 먼 그 양반을 끌고 또 시장 바닥 다른 데로 쫓겨 가서 다시 앵금 판을

벌이고---.

나이가 조금 들자 나는 서울로 도망을 왔다오. 그리고 별별 고생을 다해가며 야간

공고까지 다니고---.

앵금 소리만 나오면 나는 치를 떨며 살았다오.

우리 딸아그 새끼가 바이얼린 배운다고 했을 때 내가 돌아버린 것도 그런 때문

이었고---.

그런데 우리가 그나마 조금 먹고 살게 되니까 내가 버리고 도망 온 당달봉사 장님,

울 아비 생각이 나서 미칠 것만 같더란 말이오.

더구나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들으니까 그 깽깽이, 앵금, 아쟁이라고 하는 게

해금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고 궁중 음악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무슨 정악인가

뭔가, 하여간 결코 무시할 위치가 아니고 그 연주가들이 참으로 위대한 기술자라던가

뭐라더라---.

그런 소리를 듣자 눈물이 팍 쏟아집디다.

중산층 부인들이 그걸 배우러 다니는 열풍이 불었다는 소식까지 흘러나오자 나는

당신이 꼭 그걸 해주기 바랐다오. 이제는 당신의 그 연습하는 모습과 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에게 한없는 그리움을 갖고 속죄하는 느낌도 들고---."

 

"여보, 난 아직 형편없어요. 하지만 정말 잘 할게요. 자신 있어요."

"그럼, 당신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잖아."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할 때면 꼭 밖에다가 사정을 해요? 처음에는 우리가 큰 아이

하나만으로도 살기가 벅차서 그런 줄 이해를 했는데 그 후 조금 생활이 나아져서 하나쯤

더 갖자고 해도 당신은 들은 척도 않았어요.

저는 그게 당신의 사랑이 부족한 건가 섭섭할 때도 참 많았답니다."

"내가 오늘 다 고백하리다. 내 아버지가 당달봉사, 눈 뜬 장님이라고 했잖소. 그게 내

마음에 항상 걸렸다오.

혹시라도 내 새끼에게서 장님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얼마나 불안한지 당신은 모를

거야. 오죽하면 당신이 공사장에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놈, 경리과장 놈이 그

작업장에 나타나서 당신과 시비를 붙었잖아.

당신이 울면서 그 유부남을 때리고 맞고 그리고 곧 까무라쳤지. 그럴 때 내가 당신 앞을

가로 막고서 그 녀석을 흠씬 쥐어 패 쫓아 보냈지.

내가 자취를 하던 방으로 당신을 데려와 눕히고 동네 약사 아주머니를 불러서 영양제

주사를 놓고---.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린 곧 몸을 섞었잖소.

우리 큰 딸 아그새끼가 당신 몸에 들어선 것도 바로 그때였고---.

죄 받을 소리 같지만 난 차라리 그때 우리 딸아그가 그 경리과장의 씨앗이라면 싶었다오.

그러면 혹시라도 장님이 나올 걱정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뭐라구요?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여기고 내가 지금껏 살아왔다니, 우리 당장

갈라섭시다.

내 처녀를 당신께 받쳐서 첫날 밤 피까지 보고서도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어요?"

내가 몸을 던져 그를 때리며 엉엉 울었다.

 

"에이, 울 아버지 바보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갑자기 연립주택 반 지하 방의 낡은 문을 부수듯 우당탕하며 딸아이가 울면서

뛰어들었다.

"해금 연주와 엄마 아빠 대화가 좋아서 밖에서 듣고만 있었는데, 아빠 너무하세요.

제가 간호 대학을 갈려고 하잖아요.

생물과목이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구요.

우리나라가 못 살던 시절과, 또 아프리카 흑인 나라에서는 지금도 트라코마, 눈병이

유행이래요.

모두 방역과 위생이 불량한 탓이었지요.

그 눈병은 시기를 놓치면 장님을 만드는 후진국 병이고 그러다 보니 자식에게도

눈병이 옮겨서 2대, 3대 장님, 당달봉사라는게 생길 수도 있대요.

그게 무슨 유전병이라고 그래요, 엉엉엉."

아이가 몸부림을 쳤다.

 

"그래, 미안하다. 넌 내 새끼가 틀림없어.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니. 그래도 내 어린

시절의 그 악몽이 내 생각을 그렇게 만들어 왔단다. 무식한 아비를 용서 하거라."

그날 저녁 그 허름하고 낡은 반지하 방에서 우리 세 가족은 목을 놓아 울었다.

얼마가 지나서 복 받힌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무렵, 내가 해금을 껴안고 활대를

손으로 잡았다.

"우리 노래 하나 불러요. 이제는 황으로 시작하는 낮은 음이 아니라 진짜 해금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중'으로 시작할게.

내가 먼저 정간보에 적힌 음정으로 불러 볼 테니 천천히 따라서 가사로 불러 봐요."

 

나는 정간보를 펴놓고 먼저 조용히 음계로 노래를 부르며 해금의 활대를 움직였다.

황태태ㅁ

태태황ㅁ

태ㅁ중ㅁ

태ㅁ황ㅁ

태ㅁ중ㅁ

태ㅁ황ㅁ

황태태ㅁ

태태황ㅁ

태태황황

황태황ㅁ

태태중ㅁ

태태황황

황태태ㅁ

태태황ㅁ

태ㅁ중ㅁ

태ㅁ황ㅁ

태ㅁ중ㅁ

태태황ㅁ

 

내 계명을 듣던 가족들은 얼른 무슨 곡인지를 알아차리고 가사를 붙여서

조용히 노래를 합창하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우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다.

눈물은 그렇게 두는 게 훨씬 마음에 편했다.

 

(끝)

 

 Your Love - Dulce Pontes & Ennio Morricone 

              

 

       I woke and you were there                     잠에서 깨어보니
       beside me in the night.                            밤새 당신이 내 옆에 있었습니다
       You touched me and calmed my fear,      당신이 있으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turned darkness into light.                       암흑이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I woke and saw you there                       눈을 떠 보니 전 처럼
       beside me as before                                당신이 내 옆에 보였습니다
       My heart leapt to find you near                가까이 있는 당신을 보니 가슴이 뛰었습니다
       to feel you close once more                    가까이 있는 당신을 다시 느끼게 되다니...
       To feel your love once more.                   당신의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Your strength has made me strong          비록 삶은 우리를 떼어놓았지만
       Though life tore us apart                          당신의 힘은 날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and now when the night seems long        길게만 느껴지던 밤들이었는데
       your love shines in my heart                    당신의 사랑이 제 가슴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Your love shines in my heart.                   당신의 사랑이 제 가슴에 환하게 밝아옵니다 

 

 

 

 

            Your Love - Dulce Pontes & Ennio Morricone
            (영화 " 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음악에 가사를 넣어 만든 음악)

  

                  

                 

  

                     Dulce Pontes

 

                     1969년 포르투칼 출신의 파두 신세대 주자.
                     1991년 포루투갈 송 페스티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해 발표한 데뷔앨범 LUSITANA가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성공적인 장미빛 미래를 그려내기도.

                     데뷔앨범에 수록되 있던 Cancao De Mar(바다의 노래)가
                     리차드 기어,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영화 "프리미얼 피어"에
                     삽입 되면서부터 더욱 명성과 인기를 확고히 했다.

 

                     전통과 현대의 접점을 지혜롭게 탐구해 낼줄 아는
                     Dulce Pontes는 본인이 직접 작곡, 작사를 하는

                     싱어 송라이터이고 앨범의 컨셉까지 직접 맡을 만큼 음악적

                     감각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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