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의 사계

9월, 빈 가람에 뜬 만선들

원평재 2010. 9. 1. 02:52

 

 허드슨 강변에도 9월이 왔다.

하지만 아직 여름 잔서는 남아있고 가을은 상기 아니 도래하였다.

허드슨 강변에 거처로서의 인연을 맺은지도 십여년 되었다.

낙동강변의 고향 땅 이름을 따라서 인터넷의 닉인지 아호인지를

두어가지로 지어서 쓰는 것 처럼

허드슨 강을 따라 거창하게 아호 하나를 따낼 수는 없을까.

허드슨 강을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표기하는지 살펴보니 ,

"哈得遜河"라고 한다.

훈독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뜻으로는 별로 묘미가 와닿지 않는다.

 

Hudson의 발음은 "허드슨" 보다 "헛선"으로 사실 2음절에 가깝다.

한자표기로는 "虛船" 쯤이 음운상 더 정확하고 뜻으로도 더 묘미가

묻어나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문득 "허주(虛舟)" 선배 생각이 난다.

정치판이 아니라 학창의 선배이고 대학 신문 제작의 대선배였다.

 

"허주" 라는 아호의 진정한 뜻은 사실 아무것도 실은게 없는 빈배가 아니라

담아도 담아도 가이없는 큰 살물선이라는 은유가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나같이 범속하고 그릇이 작은 인간은 스스로를 빈배라고 낮출

도량이나 면적이 없으니, 차라리 "만선"이라고나 자칭해야할까.

 

허주 선배가 중환이었을때 고향 사람들이 문병을 올라와서

그분의 방배동 자택으로 동행한 적이 있다.

한국 주택사에서 방배동 빌라가 이름값을 하던 때였다.

그때 기록을 "지금 몇시고?"라는 제목으로 여기저기 올렸던 기억이 난다.

황혼이 스미는 방에서 그분은 내방객들에게 별로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비서에게 그렇게 물었다.

"지금 몇시고?"

작게 속삭인 그 의문문은 깊은 함의를 간직한 시적 은유가 되어

방안을 조용히 그리고 낮게 퍼져나갔다

 

내 멋대로 "虛船"이라 이름한 "허드슨 강"을 다시 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가만히 강 이름을 읊어보니 아무래도 두운에 해당하는 "허"자에 묘미가 있다.

빈 공간을 나타내는 그 앞머리 글자의 뜻을 새기며 유유히 흐르는 이 강에

우리말 이름을 붙여보면 "빈 가람"이 어떨까 싶다.

좌우로 늘어선 마천루를 그림자로 받아들이며 이 강은 허허롭게 흐른다.

 

문제는 사람들의 탐욕이겠지.

그 빈가람 위로 무언가 잔뜩 실은 상선과 바지선 그리고 모터 보트들이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망과 충만함에 가득하여서 차라리 벌거벗은 무리들을 태운 범선도 바람을 한껏

탱탱하게 받아 요염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하구의 대서양이 만조 때면 물결이 높아져서 타운 하우스의 마당까지 부유물이 밀려온다.

 

 

 

  

 

욕망의 모습들은 강변과 강상 곳곳에서 보인다.

 

 

 

 

 

 

 

 

41817

 

'피츠버그의 사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마을 통신 1 (떠나간 친구 생각)  (0) 2011.01.25
다시 삼강에서  (0) 2010.09.08
처서 일지  (0) 2010.08.25
삼강(三江)에서  (0) 2010.08.18
여름 동화  (0) 201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