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는줄을 아시나요?
2010년, 금년도 만추의 끝자락 주말에 그곳을 찾아서 거닐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지난 흔적은 주로 북간도 용정 일대, 특히 명동 마을 생가를 중심으로
남아 있다.
5년여 전, 그곳 연변 과기대에 한 학기 동안 교환교수로 가 있는 중에 그 유적들을 깊고
넓게 관찰할 수 있었으며 떠날 올 때는 아쉬움도 많았는데,
뜻밖에도 그의 문학적 체취와 흔적을 북한산 성곽길의 한 구간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여기 순례의 기록을 화보 중심으로 올려본다.
그리고 이날의 답사 기록 아래 쪽으로는 이곳 저곳에 올렸던 5년 전의 용정 기록을 찾아서
다시 연결시켜 보았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윤동주 기념관 건설은 태동만 하였지
아직 가닥을 잡기에는 일천한 모양이다.
그러나 뜻을 갖고 시작한 사람들의 열정은 조금만 도움의 손길이 미치면
금방 무언가를 이루어낼 자신에 차있었다.
명동 마을을 찾았을 때 윤동주의 생가 우물터는 시멘트를 바른 모습으로 복원이 되어있어서
사실 아쉬운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알고보니 우물이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복원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우물터 유물들은 국내로 반입이 되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이 어린 나이에 벌써 문예지를 만들어 돌렸던
그 등사 시설도 소중한 자료로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 마을에서는 원래 우리의 민속 씨름이 아직도 고유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해마다 8월에 열리는 민속씨름이 바로 그 혈연의 강이다.
이제 윤동주 시인의 선양회가 31개국으로 뻗어나가는 마당에
그 혈연의 강을 잇는 매체로 세계적인 우리의 태권도 네트워크와
손을 맞잡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인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을 다닐때 이곳 누상동에서 기거하면서
여기 북한산 자락으로 올라와서 별밤을 헤며 시상을 가다듬은 흔적이
그 인연이다.
마침 지형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르 언덕에 진배 없지 않은가?
아니 그 이상임을 자랑할 만한 풍치가 묻어난다.
다만 후세 사람들의 가꿈의 미학만 가미된다면~~~.
우리가 조금더 치밀하게 고치고 가꿀 부분들이 산견된다.
여기 세워진 시비의 자연석은 충남 부여에서 갖고 왔다고한다.
큰 역사가 이루어졌다.
앞면은 서시로, 뒷면은 슬픈 족속이 새겨져있다.
잘 알려지다시피 윤동주 시인의 묘소는 북간도에 오래 방치 되어있던 것을
오무라 가쓰오 교수가 찾아내었다.
그곳 공동묘지의 흙을 떠와서 여기 북한산 자락에 부어넣고 초혼을 한 곳이다.
오늘 이 행사를 마련한 계간 <문학과 의식>의 발행인이자
해바라기 동인회의 회장을 맡고있는
안혜숙 소설가에게 윤동주 기념 사업회의 박영우 회장이
감사의 기념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마침 국가적으로는 "G 20 회의의 끝"이라서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본 중국의 오성홍기가 태극기와 한자리를 하고 있어서
만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창의 인연으로 정소성, 허빈 소설가와 한 자리에 섰다.
원경으로 보이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아름답다.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가까이 서있다.
이곳을 찾는 이정표도 되리라.
문우들이 윤동주의 시와 자작시를 읊었다.
점심을 부암동에서 바삐 먹었다.
토요일, 예식장 갈 일이 바튼 날이었다.
부암동 주민 센터에는 매주말 이런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동동주와 파전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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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록은 5년전, 연변 용정의 명동 마을에서 찍은 사진들과 기록입니다.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 명동 생가 터를 돌아보며(1)
힘이 좋은 지프 형 RV 차량은 두 가족 네 사람을 태우고 새로 포장한 시멘트 길을
잘도 달려서 왼쪽으로는 내내 두만강을 끼고 내려오다가 개산둔(카이산툰)을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용정을 향했다.
십여 년 전 백두산 갈 때에는 “용정이나 연길이나” 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보니 깨끗하게 정비된 모양으로는 용정이고 도시 규모는 연길이 훨씬
앞서있었다.
용정 초입에서 우리는 “전주비빔밥” 집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전주”란 말은 “전 조선족 자치주”를 석권한 비빔밥 집이란 뜻으로 연길에도
몇군데 같은 집이 있다고 한다.
설명이 음식점 옥호에 지명을 쓰지 못하는 새 규정 탓인지 모르겠다.
연길의 "홍콩 반점"은 "흥콩(興豆)반점"으로 바뀌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먹을 만은 했으나 우리나라 다가공원 모악산 아래의
"전주비빔밥"에 댈 수야 있으랴.
용정 시내를 짐짓 벗어나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明東村)을 향하여 먼저 달려갔다.
시내에서 명동촌은 다소 거리가 있었는데 논밭을 좌우로 하고 달리다보니
우람한 바위산이 앞에 보인다.
유명한 “선바위”로 원래는 세 봉우리였으나 최근에 길을 넓히면서 둘을
쪼개내고 하나만 남아서 전설의 내용도 비틀어지게 생겼단다.
명동 마을은 밝아오는 동이(東夷)마을이라는 뜻으로 선각자 김약연
義士(목사)께서 명동 교회와 함께 세운 터전으로 동주 시인의 생가 터와
인접하였다.
(바라보이는 건물이 옛 명동교회인데 지금은 박물관처럼 쓰이고 오른 쪽 비각이
김약연 의사의 공적비인데 비가 많이 상해있었다)
동네의 한가운데로는 “육도하(六道河)”가 흐르고 있었고 천주교 성당도
아직 번듯하였는데 중국 공민이 아닌 신분으로 얼씬할 수는 없었다.
명동 교회도 역사의 유산으로 존재하였지 아직 공개된 예배당의 역할은
아닌 터였다.
선각한 김약연 의사의 공적비는 시인의 생가 입구에 새로 세운 비각 속에서
흰 대리석의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거친 시대를 거치면서
동네 개울의 다리로 쓰이느라 모서리가 깨지고 새긴 글도 판독이 힘들었다.
김 의사는 사실 윤동주 시인의 외조부가 되는 분이다.
윤동주의 생가도 사실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90년대에 우리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이 복원 사업을 할 때에 인근 삼합에서 똑 같은 것을 사다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유연산 작, “혈연의 강들”), 일설에는 북한에서 사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가 유연산 인민대회 상임위원이 산천어 횟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산천어는 양식이라고 한다. 이곳의 횟감은 대략 북한산이었다.)
아무려나 복원된 생가의 외양과 속 모양은 당시의 집모양이 모두 엇비슷하여서
똑 같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라고 한다.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는데 용정 시내의 용두레 우물처럼 용두레가 달린
샘물로서 복원 때에도 이가 시린 그 물을 마신 기록들이 있는데 지금은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하고 있어서 물을 마시지는 못하였고
그렇게 하는 속사정도 잘 알 수는 없었다.
너른 마당의 또 한켠으로는 씨름판을 벌일 모래판도 만들어져 있었는데
동네 놀이 행사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행사 때에
한 판 잔치놀이를 벌이는 일과 관련이 있나보았다.
이론도 있겠지만 괜찮은 발상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문화에서의 카니발 요소가 없으면 유기체가 아니라 화석처럼 무기질화하지
않겠는가.
윤동주 시인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제 설화의 경지로 승화되었고 그 설화는
다시 육화의 경지로 피드백하여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데,
다만 그가 누운 곳은 여기 용정 땅의 동산 묘지였다.
그 형제분들이 일찍이 묘 자리도 수습하고 건사를 잘하여놓았지만 오랫동안
국교의 단절에 따른 공백이 있었는데 여기 조선족 학자들과 손을 잡고
다시 그 음택을 찾아낸 이는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있던 교도 대학의
오무라(大村益夫) 교수였다.
그 때 탐사를 함께한 이는 나도 자주 만난 연변대학의 김호웅 교수였고
그가 쓴 관련 글들에는 오무라 선생에 대한 감개와 평가가 남달랐다.
(『연변문학』 2004. 12월호 수필, 『서시』 2005 창간호)
시상식을 주관하던 몇년전의 기억이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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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재작년도에 <문학과 의식>에서 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서울로 초빙하여
좌담회를 했던 기록입니다.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와 부인 오무라 아끼꼬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부터 김용만 소설가, 필자, 평론가 임헌영 교수(중앙대), 홍기돈 교수(서강대), 장영우 교수(동국대),
오무라 마스오 교수 부부,
뒷줄에 김행자 워싱턴 지부의 전지부장, 맨 오른쪽이 안혜숙 <문학과 의식> 주간 겸 발행인
▲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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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교도의 도지샤대학에서 열린 정지용, 윤동주 세미나에 참석한 기록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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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학생들이 지나가고도 지용과 윤동주의 시비는 시시비비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보는 눈시울이 젖어왔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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