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팩션 스토리

청담동 풍경화

원평재 2011. 2. 13. 10:11

평소 교류가 많치는 않으나 가끔 서울의 밥먹는 명소, 예컨데 충무로의

"부산 복집" 같은데에서 "복 사시미" 같은걸로 먹물인 나의 관심을 지속

시킬 줄 아는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주었다.
"야, 너 듣자하니 컴퓨터 공간인가 하는데에도 글 쓴다더니 내 푸념도
좀 얹어봐라"
"컴퓨터 공간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이라네. 무식한 소리는 그만하고---,
좋은 공간에서 밥이나 산다면 만나주지. 하하하"
얻어먹으며 큰소리치는걸 먹물의 특권인줄로 이 친구는 잘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였다.

왕년에 이 친구가 미국에서 가발 장사 할 때는, 목숨걸고 뉴욕의 할렘가를
도보로 돌아다녔는데 "서울 통상"에서 컨테이너로 들여다 팔다시피한
가발이 시들해지자, "지구표" 글래스 화이바 낚싯대로도 재미를 봤고,
지금은 국내에서 창고업을 하며 돈께나 만지고 있었다.
"소채나 건강식품 같이 유통기간이 짧은 걸 대량 저장할 데는
우리 밖에 없을껄---"
그가 언젠가 껄껄 웃으며 자랑한 적도 있었다.
소채에 얹어지는 부가가치로 그는 우리들에게 술을 자주샀다.
자유분방한 사업 스타일과 같은 맥락이랄까, 그는 한량끼도 체질적이었는데
일찌기 주색잡기 계통에 손 안대본게 없었다.
얼마전에는 그 동안 타고난 음치로 자처하고 지낸 것이 억울하다면서
"노래 연습장"이란델 다닌다고 전화로 연락인지 자랑인지를 떠버렸었다.
그것도 벌써 서너달이 되었나보다.
이제 오늘 식탁의 주제는 단연 노래방이 될 판이었다.

오랬만에 회동한 관세청 뒤의 일식집에서, 내가 작정하고 갖고간 굵은 펜으로
"노래 연습장"이라고 메모를 했더니 이 친구가 펄펄뛰며
제지를 하였다.
"대한 가요 연구 협의회 중앙회"로 고치란다.
나는 사이버 공간에 올릴 때는 꼭 고치겠다고 굳은 약속을 했다.
하여간 그 거창한 무슨 "연구 중앙회"에서 이 친구는 특별회원으로 등록
이 되었다. 그리고 하루에 한시간, 완벽하게 방음장치가 된,
이 친구말에 따르면 "야시꾸리"한 방에서 원장 선생님(물론 무명의 여가수 출신)의
특별 발성지도를 이 특별회원께서는 수개월 전부터 받기 시작했단다.
내가 메모지에 자꾸 구체적으로 휘갈겨 적어대고, 이 친구도 스스로
이미 "대한 무슨 중앙회"로 실명을 밝힌 탓이라서 그런지,
그가 발성지도의 내역을 상세히 밝히기에는 인색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노래 솜씨가
발전한 것만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 "발전 부분"은 최근 그와 어울렸던 친구들의 증언도 있었다.
내가 아직 직접 확인할 기회는 없었으나---.

그런데 이 "연구 중앙회"로 어느날 부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들이닥쳤으며,
그 과정에서 좀 곡절과 물리적인 여파가 있었나본데
그는 이부분도 내막을 밝히기에는 인색하여서
위대한 작가의 상상에만 맡긴단다.
엠플리파이어와 고급 스피커가 좀 작살이 났다는 정도에서---.
하여간 냉전이 한달 쯤 지속된 후, 부부는 화해의 저녁 모임을 청담동에
있는 무슨 카페에서 갖게 되었단다.
물론 부인이 초대한 곳이었다.
"야, 그런데 이것참 미치겠데---"
그가 나를 때릴듯이 내 코앞에서 주먹을 내둘렀다.

"그 곳 종업원들의 구성이 모두 청춘의 미남이더라구---. 이 녀석들이
마누라에게 식탁 에이프런을 채워주는데 이건 젖가슴을
떡 주믈르듯 하는거야!"
내 친구의 표현이 여기에 옮긴만큼도 점잖지는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좀 심한 표현을 떡주무르듯해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식사를 끝내고 일어설 때였다.
가볍고 비싼 부인의 외투를 입혀주는데 이건 아주 뒤에서
자기 마누라 껴안듯, 아니 기생 껴안듯 하는데 여자의 히프 부분과 미남 녀석의
앞 부분이 완전히 밀착되더란다.
아까 들어왔을 때에는 친구가 화장실로 직행을 해서 보지 못했는데,
아마 어쩌면 더했을는지도---.

"골프 연습장에서도 소위 프로라고 불리는 코치인지 치한인지 싶은 녀석들이
마누라 뒤에서 그립 잡는 것 부터 지도한다며 허벅지 대고 안고 도는데 뭘 그러냐?"
내가 위로인지 부아를 지르는 것인지 모를 말과 함께 다음 말도 덧붙였다.
"자네도 청담동에서 카페나 하나 열지. 돈 있는 곳에 항상 자네가 있었잖아."
"나도 그 생각해봤네. 가끔 유부녀들 턱받게도 채워주고, 히히.
그런데 아이구 말말어. 몇십억은 있어야겠더라. 이 나이에 그 돈을 왜
쳐박아! 아이들 교육상으로도 그렇고---"
이녀석이 내숭 떠네. 아이들 학교는 벌써 다 나왔는데 교육은 무슨---.
아, 시집, 장가 보낼 걱정 때문이구나---.

"자네, 집에 와서 마누라 안 팼어?"
내가 물었다.
젊을 때 그가 마누라를 팬다는 소문이 좀 돌았었다. 부인의 얼굴에
그런 징표가 난 것을 나도 몇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우리 나이에 그게 무슨 소리야. 쫓겨날까 가슴조리며 산다."
그가 펄쩍 뛰었다.
마누라를 오밤중에 패고는 다음날 보석으로 갚는다고 목에 힘주어
말하던 젊은날의 그가 문득 생각났다.
그래, 지금은 그런 패기도 다 사라졌구나.
19세기 낭만주의 시절에 유행했던 "노블 새비지(noble sabage)",
"고결한 미개인"이란 말도 이젠 다 흘러간 옛노래이고 우리에겐 해당이
없단말이구나---.
이 장똘뱅이 친구, 결코 늙지않을 것 같던 이 난봉꾼의 얼굴에도
언제 저렇게 주름이 깊었던가---.

마누라가 치한같은 젊은녀석들에게서 값싼 봉사를 받으며 흐르지 않는
하오의 시간에 물꼬를 트는 모습을 멀건히 바라보면서,
혹시라도 효력이 다해가는 자신의 허약해진
주요부분을 또다시

걷어채일까봐 이제는 슬슬 피하는 왕년의 가발장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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