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토요일에 청록파 시인
박두진 님의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시인께서는 년전에 돌아가셨는데,
맏자제가 말하자면 시인의 생가를 지켜나가고 있었으나
이분은 문필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이 괜찮은 중견 기업체를 운영해
나가는 기업인이었다.
우리가 이 댁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은 것은 사업을 하는
내 친구 덕분이었다.
내 친구가 사업상 알게된 박사장이란 사람이 어째 인품이 고매하고
느낌이 달랐는데 알고보니 집안 내력이 박두진 시인의 맏자제더라는
것이다.
내 친구도 사업을 잘 하는 기업인지만 한때는 문청(文靑)이 아니었던가.
금방 의기투합하고 조금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교분이 쌓여가서
이 댁의 만찬 초대를 받았고 우리 부부는 겻다리로 끼이게 되어서
수저 두모를 더 얹은 꼴이었다.
아니 두모가 아니라 한모가 더 늘어서 세모가 되었다.
잡지사를 하고 있는 조사장이라는 분이 내 친구의 또다른 겻다리
초대 손님의 리스트에 올랐다.
조사장이라는 분은 선친께서 "춤"이라는 잡지를 오래 출간하셨던
출판인이었는데,
지금도 "춤"은 격월간으로 자제인 조사장이 내고 있었다.
다만 요즈음 조사장의 역점 사업은 서울의 문화 콘텐츠를 소개하고
안내하며 개발하는 정기 출판물 "서울 스코프" 쪽이었다.
저녁 초대 시간은 늦은 다섯시였는데 세모의 주말 스케줄들이 부부
간에도 들쭉날쭉하여서 일단 오후 두세시쯤 평창동의 "가나 미술관"
을 집결지로 하여 숨고르기를 하기로 말이 오갔다.
빛나는 문화의 주말이 바야흐로 전개되는 셈이었다.
오랬만에 들린 가나 미술관은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적막강산이었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가 세모의 주말 탓인가---."
나의 탄식에 조 사장이 확인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주인이 얼마전에
바뀌었다던가---하며 조심스레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하여간 덩치큰 문화 공간을 유지하는 것은 헌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은 미술품 옥션으로 이 곳이 문화가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도
있는데,
나오면서 들린 이웃한 작은 갤러리의 주인들은 옥션가격의 2/3쯤이면
자기네 가게에서 비슷한 작품을 살 수 있다고 열을 올렸다.
미술품의 가치라는 것이 원래 천차만별이어서 섯불리 그런 말을 믿을
수는 없겠지만 옥션의 열기 같은 것을 생각하면 작은 가게의 주장도
일리는 있는듯 싶었다.
하지만 백화점의 상품과 남대문의 상품을 누가 비교하여 가격타령을
하는가---.
"아, 사간동에 있던 그로리치도 이 곳으로 옮겼네---"라고 하는 내
친구의 감탄사를 귓전으로 들으며 나는 진눈깨비 사이로 북악을 올려다
보았다.
"아! 세상에!"
나도 순간 비슷한 소리를 내었으나 이번은 감탄사가 아니고 탄식이었다.
북악은 내 이마 윗쪽에서 정상 포물선을 그리며 의연하고 웅혼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산자락은 이미 훼손될데로 되어있었다.
내가 신도시로 옮기기전 매주 찾았던 북악은 그 허리둘레까지 무슨
빌라인지 빌라트인지 연립주택들이 곡예하듯 달라붙어서,
황소 잔등의 피를 빠는 쇠파리처럼 산의 정기를 빨아먹고 있었다.
그건 마치 못볼 것을 봐버린 장면같았다.
"아이구 빨리 떠나세."
비명같은 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별말없이 동조해주었다.
이심전심인지 눈발 때문인지는 분간키 어려웠으나---.
연희동의 박두진 시인댁은 찾기는 쉬웠으나 골목은 미로 같았고
가파른 등고선이 차를 허덕거리게 하였으나 그래도 일진이 좋았는지
마침내 간신히 주차할 공간을 한뼘가량 집옆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삼층으로 된 생가는 옛날 기준으로는 전망 좋은 언덕배기의 명당에
자리하여 한쪽으로는 경의선이 멀리 내려다 보였고 다른 한쪽으로는
매일 출근 하셨던 연세대학교가 지척으로 건너다 보였다.
첫인상에서 대번에 밝고 선한 품성이 내비치는 박사장은 선친을
바로 빼닮았구나,
나는 속으로 단정했는데 나중 식사 시간에 들은 바로는
지금 호주에서 미술 작품활동을 하는 계씨가 재능의 면에서
선친을 이어받고 있다고 하였다.
은근한 외양의 생가는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있었는데 시인께서 타계
하시기 6년전에 손수 옛집을 허물고 신축하셨다고 한다.
집안의 초입에는 가옥과의 경계를 슬그머니 흐트려놓은 정원이 전개
되고 있었는데 곳곳에는 수석들이 무심한듯 놓여있었다.
이 무심한듯한 배열이 사실은 가장 힘든 작업이 아니던가---.
시인께서는 문인화나 서필에도 조예가 깊으셨는데 그 그윽한 묵향이
수많은 수석과 어울려 집안의 도처에서 살아 숨쉬면서 그쪽으로의
수준이 얕은 우리 지식인들을 고즈넉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살아 생전에 쓰시던 서제로 들어서니 시인의 미망인께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는데 곱게 늙으신 모습이 내 친구의 말마따나
"소녀"같은 인상이었다.
이 댁의 안주인께서는 손수 부억에서 방문객들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해 내왔는데 이 시대에 이런 만찬을 집안에서 내오는 부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시인의 가풍에 순치된 탓도 다소는 있을지언정, 이 댁의 평소의
적덕이 이런 아내와 며느리를 불러들일 수 있었으리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원판 불변의 법칙"이 있지!
요리 솜씨를 칭송하면 무슨 밥값을 한다고 지레 짐작할수도
있겠지만, 이 댁에서 사용하는 소스는 모두 자가, 자작의
특허가 있으니 이날의 밥상 차림에 아무리 극찬을한들 지나침은
없으리라---.
다만 할머니와 며느리와 남편이 서로 상대에게 그 공을 돌리니
세분 중의 한분에게만 개인적 찬사를 보낼 처지는 아닌듯하다.
겻들여 마신 호주산 와인도 향기 그윽하였고 방과 복도와 마루에
즐비한 수석에는 그 나름의 사연과 시가 함께하고있었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서 시성의 고향인 안성 시에서 땅과 건물을
마련하여 선생님의 저서와 詩作과 수석과 그림과 서필을 전시할
공간을 꾸밀 모양이다.
이런 부분에 우리나라의 분위기가 여태껒 인색하였던 것은
이러한 분야에 투자를 유도하는 인센티브가 없었던 모양이다.
뿐만아니라 이런 공간 마련에 오히려 제약은 또 엄청나다는 것이다.
예컨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이나 단군왕검을 빼면
공공 장소에 동상을 세우기도 엄청나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퇴폐 이발관 간판 세우기가 훨씬 쉬워요."
누가 농담쪼로 사태를 비관하였다.
"보통 이발관 간판하고 퇴폐 쪽하고 표시가 달라요?"
누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요, 팔랑개비가 두개 돌면 퇴폐라니까요."
답이 나오고 모두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또 동상 세우기를 쉽게 허락하면 우리나라는 온 천지가
동상 공해로 시달릴 우려가 있다는 말도 나왔다.
그나마 안성으로 박 시성(詩聖)의 작품이 모아질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어려운 가운데에서나마 유족들이 1000여평의 땅을
그곳에 마련해 둔 것하며, 최근에 봉평에 이효석의 메밀곷 유적이
유명해지면서 지방 자치 단체가 비즈니스 마인드를 깨우쳤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매서추세츠의 애머스트(Amherst)에서 본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기념관 생각이 문득 치솟았다.
시유지에 시립 도서관의 형식을 띈 건물이었는데 시민들이나
인근 매서추세츠 대학생들 그리고 관광객들(과연!)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유럽에서 대 문호들이 받는 사후의 예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문가의 후예들이 겪는 명암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년 까지도 기일이 되면 당회에 속하는 교회와 지인, 후학들이
밀려와서 공식 추도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명성의 뒤안길에서 이런 지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후손들의 희생이
막심할 것이었다.
이 댁은 마침 사업을 큰 규모로하는 훌륭한 후손이 이끌어 나아가고
맏며느리의 훌륭한 처신이 뒷바침이 되어서 그렇지,
어느 집안에서 이런 규모의 명성과 지체를 끌고 갈 수 있으랴.
유품을 팔게되는 이런 저런 명문가의 일들을 패륜으로 모는 무자비한
잣대도 남의 사정을 모르는 폭거라고 할 수 있겠다.
소녀같은 할머니와도 지나간 시절의 문학동네 이야기를 나누면서
격식을 차린 후식까지 만끽하고 일어나면서 내가 물었다.
"수석이 한 4-500점 되는 것 같은데요?"
소녀 할머니께서 조용히 내 말을 수정해 주셨다.
"천점이 조금 넘어요---."
마침 방안에는 산(山)모양을 닮은 빼어난 수석이 많이 있어서 내가
또 물었다.
"선생님이 쓰신 도봉이라는 詩作도 유명하시지요?"
그러자 미소 지으며 박사장이 수석 한점을 가리켯다.
과연 "도봉"이라고 이름 지어진 수석이 방 한쪽에서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오후에 보았던 만신창이의 북악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드님이 다시 규모가 큰 수석 한 점을 보여주었다.
"이걸 보시죠."
아, 거기에는 웅혼한 북악이 주위를 압도하며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숨이 멎는듯한 느낌으로 나는 북악을 우럴어 보았다.
30년도 더 전에 내가 북악의 앞에 섰을 때의 감동이 내 몸을 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