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날 저녁에 세 친구가 만났다.
공무원을 오래하다 나온 나와 언론계에 오래 종사하다 나온 P, 그리고
건측가로 평생을 지낸 K는 모두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청년들이었고
그 때는 "청맥"인가 뭔가하는 문학동인회를 만들어 젊음을 살찌웠는지
탕진하였는지 하여간 그러고 다녔던 사이였다.
나이들어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서 비오는 날은 우주일(雨酒日)로
삼아서 회포를 풀자고 하였으나 말만 그럴뿐 사실은 맨날 가뭄의
연속에 다름아니었다.
하여간 이제 백수가 되면서 별볼일이 없어져서인지 셋이 쉽게 만난
곳은 인사동 중에서도 조계사 쪽에 가까운 허룸한 한옥 식당이었다.
"인사동에 이런 곳이 백군데는 되는 것 같애"
여기는 언론계의 P가 노는 물이었지만 나도 이 동네는 좀 안다는 투로
유머를 섞었더니, "말 마라, 이런 집이 천군데는 된다"라고 대뜸
걸직한 답이 P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천군데나 되는 듯한 전통 한옥이 즐비한 이곳에서
하루에 굽히는 굴비는 몇 만마리나 될까.
"만복정"이라는 평범한 옥호의 식당에는 할머니가 주방을 맡고 있었고
연변 아줌마가 심부름을, 주인 마담인듯한 곱상한 여자는 우리보다
먼저와서 큰 나무뿌리를 깎아만든 원탁에 둘러앉아 이미 주흥이
도도한 어떤 패들과 술기운이 한참 올라 있었다.
우리는 풀뿌리에 앉았던가?
아니 우리가 무슨 섯뿌른 풀뿌리 민주운동 패인가.
우리도 어김없이 큰 나무 뿌리를 큰 기계 톱으로 자르고 큰 대패로
밀어부친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아서 굴전과 파전과 황태구이를 안주
삼아서 50세주, 그러니까 소주에 백세주를 칵테일한 국산 리큐르를
홀작거리기 시작했다.
50세주가 몇순배 돌아서 도루 100세주가 되었을 즈음, 이곳 터주대감인
P가 큰 소리로 장내 정리를 했다.
"마담, 거긴 그만 되었고 이리로 와~~~(요)"
글쎄 "요" 소리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담이 뽀르르 자리를 옮겼다.
70세주쯤 마신 나는 조금 걱정되었다. 오늘 여기서 저쪽 패들과 서부
활극, 아니 광화문 활극 벌이는건 아닌가 하고---.
그러나 마담의 아름다운 눈웃음에 이 모든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프리티 우먼"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귀여운
여인, 앙증맞은 여인이 고옥 주점에서 살짝 곱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입으로만 황진이 찾고 실제로는 미아리 텍사스, 천호동 텍사스 등,
텍사스 문화만 산재한 이 나라도 이제는 인사동 한 누옥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메주 띄우듯 곱게 띄우고 있으니 맛있는 간장,
아니 아름다운 전통이니 멋이니 하는 것쯤은 찾을 자격을 갖추어 가는
지도 모를 일이다.
뭐 프리티 우먼의 저 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도 몸 파는 여자
아니었던가---.
그래, 우리도 조금만 참으면 황진이가 다시 술상차려 나오는 나라의
수준은 곧 될거야---.
"저눔들 뭐해먹고 사는 것들이야?" P가 또 소릴 질렀다.
우리 앞이라서 고함이 좀 센가.
"아이, 국장님패들처럼 글쟁이죠, 뭐. 조용히 하세요."
"우리가 언제 글 썼어?"
"그럼 뭘 먹고 살았어요?"
"이 양반은 우둔한 백성들 사기쳐 먹고 살았고 저 사람은 부실 빌딩
올려서 먹고 살았고 나는 정치하는 놈들 싸움붙여 등쳐먹고 살았다."
등쳐먹는다는 말에 내 등이 좀 뜨끈거렸다. 저쪽에서 술병이라도
날라올라---.
그러나 나는 곧 이 아름답고 귀여운 여인의 절묘한 눈웃음이 방안에
있는 대여섯개 원탁 위의 공간을 가로지르고 넘나드는한,
그런 불상사는 기우가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예쁜 그녀의 눈웃음은 만리장성이나 마지노 선 보다는 확실히 더
견고한 방어선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름답게 나이든 여인의 절묘한 눈웃음,
그리고 꾀꼬리 같이 귀여운 음성까지라니---,
이 여인에게 남편이 있다면 그는 백조로 변신하여 아름다운 레다를
차고앉은 제우스에 다름아니리라.
그런데 이 프리티 우먼에게 남편이 있을까---?
리처드 기어같은 녀석이야 단연코 기웃거리겠지만---.
그림은 "Leda and Swan"
제우스 신이 백조로 변신하여 아름다운 부인 레다를 유혹하였다.
"원주의 군인 남편은 자주 오렸다?"
내 친구 P가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 무얼 꾸미는듯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또 말은 이렇게 막 놓아도 되나. 어쨌던 유부녀인데---.
아니 유부녀가 아닐지라도 나이가 마흔이 넘었거니와 어쨌던 인간
관계의 차원에서라도---.
하긴 인간관계라는 말에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무슨 사연이라도?"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럼요. 매 주말 마다 오잖아요."
P의 눈을 건너다 보며 그녀는 답을 하는 건지 말을 맞추는건지---.
"남편이 군속이요?"
내가 바보처럼 끼어들어 물었다.
"아냐, 현역이야!"
내 친구는 단호했고 프리티 우먼도 낄낄 동조했다.
"이 장사 몇년했소?"
내가 화를 내며 물었다.
"23년했죠. 그쵸?" 그녀가 내 친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로이타 홍콩 특파원하다 들어왔을 때 부터 시작했으니
그 정도는 되었네. 맞아, 너 이 년 그때---, 하하하."
그러자 "이 년" 소리도 즐거운듯 둘은 배를 잡고 또 웃었다.
"너 그때 갈보했구나."
건설 회사에 평생을 바친 건축가가 술이 150세쯤 되어서 소리 질렀다.
나도 이미 120세쯤 되어서 호기심의 경지를 넘어 화기(火氣))가 등등
했다.
"그래, 너 그때 식모살이 했지, P국장 잘 다닌 그 식당에서!"
아, 이게 무슨 망발인가.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술이 취해 인간을 등급 메기고
귀천을 가름하여 무시하고 욕하고---.
시내 버스 차장을 하던 아가씨들이나 모래내 천변에서 밀주를 따루던
아가씨들의 자녀들도 지금은 벤처 기업에서 국제 특허를 갖고 내일을
위해 쏘거나 회전 초밥 장사로 시작햐여 빌딩을 하나쯤 소유하는
시대가 아닌가.
황순원의 장편 "日月"이 소 白丁의 숙명을 한뜸 한뜸 수놓은 작품
이라면,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실도 허구도 아닌 팩션이 시공을
넘나드는 시대가 아닌가---.
시대는 혁명적으로 바뀌었어.
그녀는 조금 울었다.
나는 그녀가 식모살이라는 말 때문에 울었다고 생각해서 가슴이
아팠고 건축가는 갈보 소리 때문에, 그리고 P국장은 1년이나 되도록
오랫동안 이 만복정에 들르지 않은 탓이라고 자책하는듯 했다.
이제 모두들 프리티 우먼이 흘린 눈물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정답을
기다렸는데 눈물을 얼른 닦은 그녀는 예쁜 얼굴에 결코 정답 같은건
담지 않기로 작정한듯 싶었고 결국 우리 셋은 모두 빚진 기분이 들어서,
다음 부터는 열심히 이 곳에 오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집 지어서 전셋방 면한다더니 어디야? 비원 어디라고 했잖아?""
P가 눈물 닦은 얼굴에다 대고 또 물었다.
"그럼요. 비원이 저희 안마당인걸요." 프리티 우먼.
"까불지 말고 제대로 대봐!" 다시 글쟁이 P.
"프리티 우먼이 식당에서 식모살이 할 때부터 밥사먹으러 다녔다고
너무 그렇게 막말 하지마. 마담도 백년지객이라고 너무 호락호락
하지 마쇼, 가슴 아프네." 점수 딸려는 나.
"야, 비원이 옛날 종삼이나 종묘 뒷골목이야. 비원이 안마당이라니.
시크릿 가든에서 담요하나 갖고 장사하나---."
무슨 의미가 통하는듯 하면서도 말도 아닌 소리를 꽤꽥 내지른 것은
200세가 넘은 건축가가 마침내 토한 막가는 말.
프리티 우먼이 배시시 웃었다.
"국장님, 요즘도 옛날 신문사에 새벽마다 나오셔서 구내 식당의
죽을 드시고 비원 둘레로 조깅을 하신댔죠. 거기 달리시다가 보면
비원을 내려다 보는 빌라가 몇채 있을걸요?"
"아, 네댓채던가 있던대! 그거 도시 미관과 전통을 다 으깬 악마의
성이야, 안그래?"
"그 중의 하나가 제 빌라죠. 4층 집이죠. 4층은 제가 살고 밑에 층은
모두 분양했어요. 50평씩 방 넷, 화장실 둘!"
"허걱!"
이건 내 친구가 장난친 감탄사였고 놀라움은 이보다 더 컸다.
"비원이 다 내려다 보이는 그 빌라가 정말 마담꺼야?"
"비원이 제 안마당이라고 했잖아요."
"아, 당뇨 때문에 아침마다 지금도 일찍 나와서 조깅하며 이놈의 집이
어떤 놈 집이냐고 욕한 그집들 중의 하나가 마담꺼구나.!"
우리는 비원을 내려다보는 빌라를 위하여, 아니 프리티 우먼을 위하여
건배하였다.
"마담 같은 사람이 왕궁을 내려다 보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
군사정권 때라면 장군의 집이었을테지만---."
건축가가 건배 제의를 하였다.
"맞다, 맞어, 왕궁의 불꽃 놀이를 위하여 브라보!" 내가 소리 질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축재를 위하여!" 글쟁이 P의 건배 제의였다.
"그 땅을 어떻게 샀소?"
내가 물었다.
세상에 왕궁의 옆자락, 도심의 산록에 무슨 터가 있었을까.
"혼불을 보던 날 샀어요."
묻는 말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하여간 기대보다 나은 답이
나왔다.
J 회장이 이승을 하직하던날 프리티 우먼과 아들과 딸, 그리고 친정
부모 등 다섯명은 어디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하남시 근처를 통과하게
되었단다. 애들 아버지는 어디가고---.
그런데 굵은 불비 같은 것이 하남시 언저리에서 죽죽 내리더란다.
친정 아버지가 처음 목도하고 "아, 어떤 위대한 어른이 세상을 하직
하시는구나"하고 탄식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회장의 유택이 있는 곳이었다.
친정 아버지가 다시 말을 잇기를, 가늘고 긴 불비가 휘돌아 감돌아
다니면 훌륭한 사대부의 여자가 죽어서 그 불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이다.
저녁에 식당을 열려고 서둘러 돌아오는길에 보니 바로 그분이 오너인
국가적 대기업의 계동 본사에 상등(喪燈)이 달리고 왕회장께서 돌아
가셨다는 뉴스가 매체를 장식하더란다.
그 때도 만복정은 인사동에 있었다.
계동 사람들도 단골이었음은 물론이었다.
밥을 먹고 사는 터의 어른이어서 마담은 그 날밤 소복을 하고
계동 사옥으로 문상을 가서 큰 절을 하며 망자인 왕회장께 진심으로
영결의 인사를 올렸다.
이어서 나오는 길에 비원쪽을 바라보았더니 지금 빌라를 지은
그 산 비탈로 혼불이 움직이는 것이 또 보였다.
순간 그곳의 어떤 과장이 그쪽에 땅나온 것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밥 먹으러 와서 하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귀여운 여인은 다음날 앞뒤 재지 않고 그 과장을 통하여 60평을 샀고
그 옆의 60평짜리 주인과 땅을 합하여 빌라를 지었다.
혼불 탓인가, 과장의 덕분인가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마침 우리가락을 담은 CD를 교보에서 산 것이 있어서 아래의
그림과 같은 재킷을 보여주었더니 자기가 본 남녀의 혼불과 꼭 같지는
않으나 매우 흡사하다고 무릅을 쳤다.
위의 그림은 여자의 혼불같고 아래는 남자의 혼불과 닮았다고 했다.
"혼불은 무섭고도 대단해요. 대나무 숲은 혼불 맞으면 말라 죽어요.
소나무는 혼불 맞으면 더욱 청청해지고 관솔도 알차진대요. 계동 사옥
바깥에 심은 대나무 숲은 그 날 이후 다 말라죽엇어도 소나무는 청청
하잖아요. 대나무 숲도 이제 모두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어요."
말을 마치며 프리티 우먼은 몸을 조금 떨었다.
그자태가 또 더욱 고혹스러워서 사람을 미혹시켰다.
"혼불을 읽어봤소?" 내가 물었다.
"최명희의 혼불요? 그럼요."
"거기에도 혼불에 대해 소상하게 나와요?"내가 물어 보았다.
나는 그 방대한 대하소설의 첫권에 손을 대다가 말았었다.
그 거대한 모국어의 바다를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어찌 항해하였으랴.
"그럼요. 소상하게 나오죠." 프리티 우먼의 단호하고 예쁜 대답.
"당신은 정말 비원 안마당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소." 마침내
건축가도 감동과 감격어린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 언제 그 빌라에 가서 왕궁을 내려다 보자. 그리고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를 들으며 크게 축배를 들자. 이 풍진 세상을 이기고
마침내 왕궁을 점령한 프리티 우먼을 위하여!" P국장도 기염을 토했다.
"네. 평일날 2시에서 다섯시까지 불꽃놀이 한번 쏠게요. 주말에는
대학 다니는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까요." 마담의 흐뭇한 찬성.
"주말에는 원주에 있는 군인 남편도 오잖아!" 국장의 첨언.
"아참, 그렇지."
남편 오는 날이 "아참 그렇지" 수준이라니.
그러나 우리 나머지 둘은 아무 토도 달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
"분당이오!" 내가 말했다.
"아, 그럼 이번에 파크 뭔가하는 것 특별 분양 받으셨죠? 그쵸?"
프리티 우먼이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다.
그래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정말 그럴줄 알았어요."
하며 "큰 돈 버셨군요"하였다.
내가 펄쩍 뛰었다.
정말 그런게 아니라고 싹싹 빌다시피하여도 프리티 우먼은 믿지않았다.
"똑똑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벌잖아요."
프리티 우먼의 말은 확신이었다.
할수 없이 그녀 앞에서 당장에 1가구 2주택이 된 나는 그건 그렇고
왕궁의 불꽃놀이는 꼭 해야된다고 화제를 돌렸다.
프리티 우먼이 이제껏 속고만 살았냐는듯이 소리질러 건배 제의를
하였다.
"5월이 가기전에!"
그녀가 아름다운 입과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우리도 우물우물 따라하였다.
"5월이나 지난 다음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