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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돌 첼리스트

원평재 2011. 2. 18. 02:59


여러날 전에 쇠락한 온천 도시 수안보에서 무슨 세미나를 마치고 
월악산 밑 송계 계곡을 훑으며 마침내 마애석불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정작 수안보 시내는 마치 피난으로 疎開가 된 도시 같아서 문자 
그대로 인적이 없었는데,
그나마 월악 깊은 산골 송계계곡에는 그래도 등산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애석불도 세속의 때를 벗고 있느라 인부들이 밧줄에 붙어서 
세탁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전 시내의 인적 없음이 아직도 시야에 남아있던 뒤끝이라 
애쓰는 인부들의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때 날렸던 이 동네의 관광객들이 다 어디로 갔지?"
내가 딱하다는 투로 말을 내 뱉었다.
"자업자득이죠. 이 동네가 한 때 바가지가 참 심했어요. 불친절했고.
잘 나갈 때는 국제 학술 대회가 모두 여기 파크 호텔에서 열렸는데---. 
저도 공무원들 앞에 놓고 발제를 꽤 많이 했지요. 
그 때는 정부의 정책 발표 중의 상당 부분이 '수안보 파크 호텔에서 
열린 정책회의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머릿말을 달고 신문에 소개
되었다니까요."
행정학을 전공하는 동행이 수안보의 전후 내력을 설명해주었다.
"그 말이 맞아요. 더우기 서울 근교에도 온천이 또 얼마나 많이 
개발 되었나요. 포천의 그 목욕탕 같이 붐비는 온천이랑---. 
여원 출판사던가 학원사던가에서는 서초동의 회사터 밑에서도 
온천수를 퍼 올리잖아요, 하하하. 또 불가마인가 뭔가 하는데에서는 
남녀가 헐렁한 마대같은 걸 걸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둥켜 안고도 
있고요---. 더우기 요즘 젊은애들이야 해변이나 해외로 빠져 버리지 
이런 썰렁한 동네로 오겠어요?"
나이든 동료 한 사람도 옛날을 회고하며 오늘을 진단하였다.
그래도 쇠락해 가는 왕년의 온천 도시가 새롭게 거석기 조형물도 
중심부에다 새로 세우고 친절 교육 지표도 곳곳에 붙여놓으면서 
부흥의 기치를 내건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시내가 그러하니 계곡인들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음식점에서 서비스하는 인력도 주름진 할머니급이었고 그 흔한 
연변 아주머니도 이 곳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산천은 의구하여 차가운 개울에 발을 담그니 써늘한 냉기만은 
예나 다름없었다.
"산천은 의구한대 인걸은 간 데 없네".  
시 한 수가 입에 걸렸다. 
참으로 인걸은 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정말로 간 곳 없어서 내친 김에 철 지난 우스개를 
내가 중얼거렸다.
"그 많던 선녀들은 다 어디 갔을까, 나무꾼들은 이렇게 많이 왔는데?"
"아, 그야 노래방의 도우미로 다 나가버렸지요."
내 허튼 말이 올드 버전 아니랄까봐서 누가 얼른 정답을 맞추어 
내놓았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설악산 대청봉에서 정말 선녀를 만났어요."
젊은 항공 공학 박사가 선녀 이야기로 갑자기 좌중의 시선을 끌었다.
"대청봉 산장에서 폭설을 피하여 칼 잠을 자려는데 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있어서 실눈을 하고 보니 아, 이게 선녀가 
들어오지 뭡니까."
하루종일  퍼붓는 폭설로 산장에는 사실 조금 과장된 공포감이 가득
하였었는데 
선녀가 들어옴으로써 아연 활기가 빼치카의 불꽃보다도 더 뜨겁게 
타올랐다.
소형 무인 정찰기 분야에서는 세계적 권위인 이 공학박사는 선녀가 
나타나자 벌어지는 산장의 백가쟁명에는 서뿔리 뛰어들지 않고 
틈새를 노렸으나 산악 기상과 폭설에 관한 산사나이들의 일가견
에서는 결코 승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이 되어서 이날 산장의 
토론회에는 결국 끼어들지 못하고 잠을 청하였단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있는건가, 
공학 박사께서는 마침내 그녀를 울산 바위의 가파르면서도 고드름이 
더럭더럭한 하산길에서 재회하였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런 선녀를 그 이후에는 다시 보지 못했어요. 신사동이나 
청담동 어느 카페에도 없더라구요." 이러면서 우물우물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후일담을 묻는 공세는 집요하여서 공학박사는 후일담 보다는
또다른 이야기로 자리를 피하였는데 그게 덫이되어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아, 용대리, 바로 백담사 입구 마를에서 진정 더 아름다운 선녀를 
만났지요."
공학박사가 만난 선녀는 첼리스트였다.
줄리아드이던가 커티스이던가에서 연주학 박사까지 한 여성 
첼리스트가 왜 퇴행성 병을 앓고 있는 지금의 남편, 
즉 백담 순두부 집 주인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박사님도 잘 몰랐다.
하여간, 
기막히게 예쁜 이 첼리스트가 장독대가 백개는 넘는 이 용대리
산촌 식당에 나타난건 불가사의인지 모른다.
선녀와 나뭇군의 전설에서도 선녀가 하필이면 금강산 선녀탕으로
내려왔는지는 밝히지 않듯이---.
예나 지금이나 목욕탕이 좀 많았는가---.
내 동료 항공공학 박사가 그녀를 선녀라고 부르는데 인색하지 않았듯이
나도 그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였다.
왜냐하면 글쎄 르네상스 뒷골목의 노래방에 출몰하는 선녀들도 시간당
도우미 수수료가 3만원 씩이나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메주 띄우고 장 담그며 백담사 앞 용대리를 지키고
이 나라 지조와 절개의 대표성을 또한 몸소 지켜주는 여인이라면
진정한 선녀임에 틀림없을 터이기에!.
아, 그런데 선녀에게는 또하나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국산 콩을 멧돌에 갈다가 오른 쪽 손을 찧는 사고를 당했다.
당사자에게는 비극이었지만 처음에 나는 감동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 비극만이 줄 수 있는 순수한 감동같은것 말이었다.
그러나 곧 이러한 전말을 글로 옮길수가 없었다.
너무 극적이지 않은가. 
너무 가슴 아프고 너무나 통열한 스토리였다.
이럴 경우 사실 여부에 대한 치사한 세속적 의심도 피치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현실이기에는 너무 달콤 하지 않은가.
(아,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그러나 나는 오늘 진실을 느끼고 확인하였다.
오늘 이야기를 전했던 동료와 우연히 그 이야기를 나누던중,
그녀가 손가락을 날린 것은 멧돌을 돌리다가 당했다는 낭만적
설정이 아니라 쇠로 만든 콩가루 분말기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였다는 것이다. 
식당의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으나 3년전의 그 번호를 여기에 올리고
싶지는 않다.
첼리스트가 오른쪽 손가락을 몇개 잃어버렸다면 그 처절함의
백분의 일 만큼은 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문의 자격을 따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내 딸이 의대를 다닐 때에는
의대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했다.
가족들과의 해외여행도 여러차례 포기하고 데이트도 못하고
힘든 공부와 아귀다툼하던 아픔들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후유증을 
수반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이 손두부 식당의 첼리스트는 속절없이 남은 인생을 
된장이나 맛있게 띄우며 살아가야할 형편인가보다.
아, 그대의 찬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