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 한인 성당을 찾았다.
딸네가 이곳 생활 3년째에 접어들고서야 이 가톨릭 교회,
한인 성당을 발견했다고한다.
대학 병원 사람들의 모임에서 교수로 있는 내 친구의 자부와
우연히 대화가 되면서 알게된 모양이다.
금년은 크리스마스와 주일이 겹치는 날,
사위와 딸네는 성당으로 들어가고 나는 인근을 탐색하며
카메라를 작동하였다.
가톨릭 성당을 일찍 발견치 못한 이유를 알만 하였다.
피츠버그 메트로폴리탄 에어리어의 변경,
샤픈스버그라는 쇠락해가는 동네에 성당이 위치하였고
교인 수는 어린이 포함 100여명 남짓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짜임새가 있고
성 김대건 한인 성당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오래 전 한글날에 교포 자녀 한글 글짓기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시카고 한인 성당이 생각났다.
그곳 이름은 정하상 가톨릭 교회였지싶다.
그곳은 여기보다 훨씬 컸다는 기억이났다.
도시의 규모가 달랐으니까.
성당의 주변은 조용히 무너져내리는 동네같았다.
피츠버그가 한창 날리던 때에는 철강 노동자들이 이곳에 많이 살았던 모양이다.
거의 반 세기 전까지 피츠버그 철강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위세는 곧장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윽고 포항 제철의 시대가 열렸다.
이곳 기록으로는 피츠버그 철강 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선 원인으로
일본 제철과 포스코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들고있다.
우리가 타임지를 끼고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IHI, 곧 이시가와지마 하리마 중공업과 일본 철강의 이름이 광고란을 주름잡았으니
피츠버그의 쇠락은 해묵은 이야기이다.
물론 신일본제철로 합병된 일본의 사정도 지금 만만치는 않고
중국과 브라질의 용광로도 호시탐탐 우리를 넘보고 있다.
지금은 퇴락한 모습을 감출길 없어
이방에서 온 아마추어 사진가의 먹잇감이 되고 있지만
20세기 초의 철강 노동자 주거 환경임을 전제한다면
세계적 표준으로는 대궐 수준이 아니었을까.
여기 사진으로 소개하는 그림들이 현재 피츠버그의 일반적 주거사정과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2년전에 올린 사진에서도 그랬지만 오해가 두렵다.
화려한 고급 동네가 많다는 점도 밝혀두고싶다.
이곳 사는 분들에게 누가 될까 걱정이된다.
한인 성당 근처에 저기 보이는 바와 같이 큰 미국인 성당이 건재하다고 사위가 가르쳐 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우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20세기 초에 건축된 성당이 매우 큰 규모였다.
다만 노인들의 모습만 보이는게 씁쓸하다.
지금 아메리칸 페이스는 어떤 빛갈일까?
여기 보이는 성상들은 얼굴 빛이 다소 갈색을 띄고 있다.
금세기 말이면 아메리칸 페이스가 브라운 색갈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디트로이트 대학(U of D) 캠퍼스에 세워진 성모상은 검은 색이었던 기억이 난다.
피츠버그는 아직도 백인 도시이다.
그런데 여기 성상들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몰라도
미래의 안색을 내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꽤 놀랍다.
성당의 정문 쪽으로 닥아가는데 나이든 여인이 손에 담배를 들고 오다가
카메라 렌즈를 의식하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방해하여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손에든 담배는 세일럼, 박하향 담배였다.
미안할게 없다고 말하고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치아가 여러군데에서 보정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포즈를 취하며 입을 닫으니
착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보통사람들이 임플란트를 감당하기는 쉬운일이 아닌성 싶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3년 전만 해도 하나의 치아에 2000불 가량이 들었다.
"차 한대 값이 입속으로 들어갔어"라고 말 할 수있는 한국의 고령자는
해피한 사람이다.
치아가 성치않은 이 할머니는 이곳 성당이 얼마나 크고 아름답고 대단하냐고
연신 자랑스러워했다.
나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유럽의 유서깊은 종교 건축물에 입맛을 버린 입장에서는
겉모습이 그렇게 대단치는 않게 보였다.
하지만 안을 꼭 보고 가라는 권유에 입당을 해보니
과연 예사로운 성전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부심에 나는 깊은 경의를 표하였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우리는 이야기를 조금 길게 나누었다.
이곳은 이탈리아와 독일계가 많이 살아서 한때는 수많은 성당들이
교인들로 넘쳐났으나 지금은 많은 곳이 비어있다고 하였다.
교회에 사람들이 오지않으면서 동네가 쇠락해진건지 순서가 반대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종교심을 심어주지 않은게 큰 문제라고도 하였다.
자기는 종교의 전례나 의식에 구애받지 않아서 꼭 어느 종파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크리스찬"일 따름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내가 평소 갖고 있던 지론과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크게 공감의 전율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피끓던 시절을 다 보낸 남녀가 영하의 날씨에 밖에서 나눈
대화의 아우라 때문이었기 보다는
평소 품고있던 생각을 들킨 기분 탓이었던가 싶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낸 다음날 아침이라 그런지 출석 교인이 별로 없었다.
교인 수가 많지 않다고 먼저 말하기에 100명 미만인가 라고 물으니
그보다는 조금 넘을듯 하다는 할머니의 답이었다.
자비로운 과장이 아니었을까, 속인은 속물스런 추측을 해본다.
날씨도 추운데 쓸데없이 말이다.
다시 을씨년스러운 동네로 나왔다.
해병은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누군가 허름한 자기집 앞에 "해병만 주차 허용"이라는 전우애를 발휘해 놓았다.
정말로 빈 교회가 많았다.
여기는 성상의 안색이 순 백인이었다.
필라델피아 같은 곳은 과거의 중산층 마을이 흑인 슬럼가로 변하면서 파괴되고 있어서
쇠락의 핑계가 좋았는데
이곳은 계속 백인들의 마을이면서도 스스로 몰락해 가는 모습이라
무어라고 형언키 어려웠다.
나이든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더이상 보충은 되지않고
빈집이 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고 한다.
새로 들어오는 잘난 아시아 인들이나 인도인들은 도시의 북쪽으로
신도시 대단지를 만들어서 나가고
유태인을 비롯 옛부터 뼈대있는 사람들은 남쪽 끄트머리에서 웅거하는 모양새이다.
물론 다운타운의 재개발된 컬쳐타운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휴일이라서 문을 닫고있는 이곳 초등학교가 공연히 초라하게 보인다.
사실 느낌만 그런건 아니다.
실제로 명문 초등학교는 역시 북쪽이나 남쪽 끝에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농장들이 부티가 나고 아름답다.
아래는 이맘때면 도처에서 보게 되지만 하여간 북쪽 마을의 주택 단지 야경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3 부>
제 3 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
[1] No.45 Air soprano: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주가 살아계심을 나는 안다.
[2] No.46 Chorus: Since by man came death 사람으로 인하여 죽음왔으니
[3] Nos.47/48 Recitative & Air bass: Behold, I tell you a mystery ... The trumpet shall sound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라... 나팔이 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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