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스플리트 (동서 로마 분리의 연원), 트로기르 (황금사자상의 원형)

원평재 2012. 9. 20. 10:04

 

 

스플리트에 있는 황궁 알현소의 천정

 

아드리아 해의 감추어진 보물, 스플리트의 아름다운 열주 광장

 

발칸반도에서 태어나 로마제국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고향마을이자

은퇴 후의 거처가 된 스플리트 항구 도시,

아름다운 경관 말고도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름을 세상에 올린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역사에서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지중해를 정복한 강력한 황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 근처 살로나의 하층민 집안 출신으로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으로 재직 중,

284년 황제가 사망하자 부하들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사두정치체제를 시작했고 그 중 하나가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는 역사적 일들의

연원이 된다.

황제의 사후에 일어난 역사의 소용돌이였으니 저승의 당사자는 알지 못할 이승의 일이었다.

기독교 탄압의 황제였으니 천당에 있지는 못하리라.

 

 

Split이 "분리"를 뜻하므로 동서 로마가 그의 사후 곧장 쪼개진 사실과 관련하여

어원 상의 연관성을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전혀 무관"하다고 자신있는 대답을 한다.

어쩌면 "고향"이라는 뜻이나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유추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무자비하게 기독교도를 박해한 황제로

이 시기를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박해시대' 라고 부른다.

기독교 박해는 309년까지 지속되었고 31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망과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히 끝난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로마 역사상 재위 중 은퇴한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은퇴하며 이곳 슬플리트에 궁전을 짓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

이 궁전은 기독교도들을 강제 사역하여서 지었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곳에서 무릎 관절을 치료하며 노후를 지냈는데

아내와 딸이 납치되고 마침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Split의 뜻은 동서 로마의 분리라는 거대 서사와 연결되기 보다

가족의 비극적 해체라는 뜻과 관계를 맺나 보다.

 

 

(Split의 한글 표기는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스플릿 대신 스플리트로 합니다.)

 

스플리트로 가는 길은 방문객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하고 기대에 부풀게 했으나

사람 사는 모양은 딱했다.

 

 

 

 

패러글라이더에 매달린 사람은 아마도 서유럽이나 미국, 혹은 러시아인이 분명할 것이다.

 

 

종지 잔 같은 데에 담아주는 에스프레소는 처음 그 양이 매우 짜게 나오더니

북으로 올수록 점점 늘었다.

 

이 청춘은 모양이 외래인이 아니라 발칸 청춘같다.

역사를 떠멘 존재는 청춘이다.

쇤 이스트 디 유겐트!

청춘이 아름답다는 인증 샷!

유년과 중년도 아름답다.

 

Split의 남문에 도착하였다.

원래는 바다에 면하였는데 지금은 흙이 쌓여 도로가 하나 생겼다.

건너편에 신도시도 생겨서 이곳은 구도시가 되었다.

 

 

구도시의 원형과 역사를 설명하는 현지 가이드.

 

 

 

황제의 궁전 앞에 있는 일종의 알현 대기실

지금도 아카펠라가 합창을 하면 공명이 절묘한 구조이다.

다만 지붕이 뚫린 것은 그런 메카니즘 때문은 아니고 나중에 중앙 로톤도의 돔 부분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어지는 열주 광장에서는 로마 병정으로 분장한 모델들이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다.

디오클레시안 성당

 

 

28000 평방 미터가 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궁전은

열주랑(列柱廊 Peristyle)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뒤에 보이는 문이 동문이다.

 

북쪽은 금문, 동쪽은 은문,

서쪽은 철문, 남쪽은 청동문이라 부른다.

 

 

동문의 밖에는 기념품 가게가 많았다.

문안의 성내에는 지금도 일반인들 3000명이 살고있다한다.

 

 

 

 

 

 

 

 

북문밖의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

10세기에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 닌은 크로아티아인이 모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투쟁한 인물이다.

1929년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청동으로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동상이다.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황궁으로 쓰던 곳의 지하가 드넓다.

이스탄불의 바자 광장에는 턱없이 못미치지만---.

기념품 가게가 넓은 가운데 모딜리아니의 복제된 나부가 덜렁 누워있다.

 

 

 

 

 

 

 

동서 181m, 남북 215m 규모의 궁전 건물은

두께 2m, 높이 20m 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295년 부터 스플릿 앞 바다 브라체(Brac) 섬에서

채굴한 질 좋은 석회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그리고 기둥과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가져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브라체 섬의 회색 사암은

1500년 후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을 지을 때도

공급되었다고 한다.

 

 

 

 

 

 

 

 

넥타이의 발원은 크로아티아라고 하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게 넥타이 가게가 뽐내고 있다.

 

 

유서 깊다는 카페에서 생맥주 한잔에 에스프레소를 곁들였다.

이 앞 광장에서는 매년 여름 나부코가 공연된다고 한다.

 

 

 

 

 

스플릿에서 한 40여분 이동하면 Trogir트로기르(크로아티아어: Trogir,

이탈리아어달마티아어: Traù, 라틴어: Tragurium,

그리스어: Tragurion, 이탈리아어: Traù, 헝가리어: Trau)이다.

아드리아 해에 있으며 크로아티아

본토와 치와보(chivo) 섬 사이에 있는 작은섬이다

도시 전체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가운데 섬이 트로기르

 

 

작은 해협 안에 있는 섬으로, 성의 해자 폭 정도의 바다에 다리로 연결 되어 있다.

트로기르에 도착하여 다리를 건너 트로기르의 관문(Land Gate)으로 들어간다.

이곳을 건너지 못하여 징기스칸의 유럽 진출은 여기서 끝났다 고 한다.

 

 

 

수호성인 이반 오르시니(북문)

 

 

 

성 로렌스(로브르) 성당

 

15세기 피렌체의 니콜라스의 작품이다.

트로기르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13세기~15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크로아티아의 건축물중 가장 걸작으로 뽑힌다

특히 서쪽의 정문은 라도반(Radovan)이 만들었다는 로마네스크-고딕 건물.

라도반의 정문 이라고도 한다.

좌,우에 아담이브의 상이 조각되어 있어 유명 하다.

성당 양쪽 기둥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사자상이 있다.

트로기르가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베니스 영화제 황 금 트로피에 나오는 황금사자상도 같은 맥락이다.

 

브라보! 김기덕 감독이 생각난다.

베니스가 베네치아의 영어 표기임은 물론이다.

 

오래전, 베니스에 갔을 때도 사자상을 보았겠지만 기억에는 전혀 없다.

 

 

여기 사장상 위에 달마시안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누드 조각

아담과 이브의 상이 있다.

 

 

 

 

구 시가지의 중심인 나도르니 광장의 시계탑,

그 오른쪽이 탁트인 코린트 열주식의 법원 건물,

시청사 건물

성인의 반열에 오른 페트루 베라슬라비추 주교의 상이 법원 건물에 부조되어 있다.

공정과 정의의 염원은 동서고금이 없나보다.

 

 

 

 

 

 

이곳에도 빨래를 이웃집과 도르레로 연결하여 널어놓는

테라뮬러 빨래줄이 골목마다 보인다.

테라는 당기다의 뜻인줄 알겠다.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트로기르의 중심가

 

 

 

 

 

 

 

다시 성 밖으로 나왔다.

카메를렌고 요새를 보기 위해서였다.

 

해안에 쌓은 카메를렌고 요새는 13세기 15세기에

베네치아가 오스만 투르크를 방어 하기 위해 축성한 것이다

트로기르는 400여년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발칸의 작은 베니스로도 불리어 진다

 

 

 

 

 

사진에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오른쪽으로는 성 마르코 요새가 자리 한다

공연이 있는지 입장료를 받아서 카메라만 들이대었다.

 

 

 

한때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일부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축성해 군사기지로 썼고

지금은 야외극장 이벤트 장소로 쓰인다고.

비록 낡았지만---.

이곳도 이제 떠나는 마음이다.

시베닉Sibenik)부근의 솔라리스(Solaris) 리조트에 왔다.

내해가 호반처럼 잔잔하다.

해변의 가게에서 면세 와인을 하나 사서 마시고 잤다.

 

 

 

 

 


Chorus of the Hebrew Slaves
from Opera "Nabuco" Act.3

베르디 .... 오페라 나부코 中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Va.Pensiero"

 




Chorus of the Hebrew Slaves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BBC 필하모닉/ Cond - Leone Magiera
로시니 합창단. 모데나 합창단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 음악은 베르디의 4막 오페라 "나부코(느부갓네살)" 중 제3막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히브리 민족의 종교적 탄압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애국적인 주제를 표현한 곡이다. 특히

시편 137편은 그 때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던 히브리 민족의 애환

을 잘 묘사하고 있는 시편이며, 다니엘서는 이것에 대한 역사적

실을 기술한 것이다.

"노예들의 합창"은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밑에 있던 이탈리아 국

들에게 감동을 줌과 동시에 조국의 독립 염원을 위해 시사하는

가 컸다. 오랜 분열과 오스트리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통일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조국애를 일깨우고

강한 활력을 불어 넣은 곡이다.

1842년 이 작품이 초연될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작품 속 줄거

리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국민의

애국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 때에 거의 이태리

국가처럼 불렸고. 베르디의 장례식에 불린 노래이기도 하다. 일종

의 이태리 "국민찬가"이다.


Va, pensiero, sull'ali dorate

va, ti posa sui clivi, sui colli
ove olezzano tepide e molli
l'aure dolci del suolo natal!
Del Giordano le rive saluta,
di Sionne le torri atterrate.
Oh, mia patria sì bella e perduta! Oh, membranza sì cara e fatal!

Arpa d'or dei fatidici vati,
perché muta dal salice pendi?
Le memorie nel petto raccendi,
ci favella del tempo che fu!
O simile di Solima ai fati
traggi un suono di crudo lamento,
o t'ispiri il Signore un concento
che ne infonda al patire virtù!

금빛날개를 타고 날아가라, 내 상념이여
가거라,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향기에 찬 조국의
비탈과 언덕으로 날아가 쉬어라!
요르단의 큰 강둑과 시온의
무너진 탑들에 참배를 하라...
오, 사랑하는 빼앗긴 조국이여!
오, 절망에 찬 소중한 추억이여!


 


예언자의 금빛 하프여,
그대는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우리 가슴속의 기억에 다시 불을 붙이고,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해다오.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 부르자.
참을 힘을 주는 노래로
너에게 용기를 주시리라!


Nabucco

 


4막 오페라. 구약성서 ( 에레미아서, 열왕기 하, 다니엘서 )에 나오는 영웅 바빌론왕의 이야기- 이

스라엘 역사에 일대 타격을 가한 네부칻 네자르 왕 (Nebuchadnezzar 2세)의 침략, 포로, 멸망의

역사-를 베르디 자신이 "이 오페라는 행운의 별 아래 태어났다" 고 술회했듯이 베르디에게 최초의 성

을 가져다 준 걸작인 동시에 그를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고 이름을 전 유럽에 떨치게 하였다.

나부코는 벨칸토 (Bel Canto)방식에 아주 충실하다. 게다가 역대 벨칸토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스케일, 깊은 울림을 갖는 성악의 표현을 통해서 극과 음악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오페라이기도 하다.

한편, 초연 때, 여주인공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가수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베르디와 가까워진 그녀는 베르디의 두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만큼 <나부코> 는 베르디의
인생과 예술에 끼친 영향력이 컸을 뿐 아니라 이 작품이 도약대가 되어 베르디는 19세기 오페라
무대를 석권한 위대한 거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오페라를 대단히 좋아하는데, 1986년에 있었던 리카르토 무티의
라 스칼라 음악감독 취임 공연에서는 "히브리노예들의 합창" 이 끝나자 열광적 박수가 무려 30분
동안 쏟아져 토스카니니가 공연도중 앵콜을 금지한 이래 수십년 동안 이어져오던 라 스칼라의
'금기'를 깨고 한 번 더 앵콜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부코>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을 이탈리아식으로 줄여서 부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