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Slovenia) 국토를 달리면 풍요로움을 느낀다.
발칸 소국의 하나이지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등에 접경하고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대부분이어서 서유럽의 한 부분같기도 하다.
면적은 20,256㎢이며, 인구 약 200만 명으로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1918년부터 잠시나마 유고슬라비아의 지배도 받았다.
인구의 대다수는 슬로베니아 인이고, 좁지만 일부 지역이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다.
헝가리 출신 바르톡(Bela Bartok,1881~1945)의 루마니아 민속 무곡(Rumanian Folk Dances)과 함께 여정에 오릅니다.
수도 외곽에서 다차 전시장을 만났다.
다키아, 다시아, 데이셔 등으로도 불리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 들어왔다.
‘리틀 비엔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류블랴나는 인구 28만명.
BC 1세기 로마가 전략도시를 세우고 ‘에모나’라고 불렀다.
류블랴나라는 이름은 도시를 관통하는 류블랴나 강에서 왔다고 한다.
1895년 대지진으로 몇 채의 건물만 남기고 모두 무너졌는데
지금 대부분의 건물은 그 후에 건축된 것이다.
1809년~1813년까지 프랑스가 점령하였고, 나폴레옹은 이곳을
유럽풍의 거점 문화도시로 만들어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한다.
도시의 중심에 프레셰르노브(Preseren)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광장에 서있는 동상은 이 나라의 문호인 시인 프레셰르(1800~1849)인데
그는 슬로베니아의 국가 가사도 만들었고
평화와 사랑의 주제가 많다고 한다.
류블랴나 대학생들---
한국어 강좌가 있다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 있는 표지
광장에 면한 고급 백화점에서는 중국과 아랍권 관광객 유치에 열렬하다.
트리플 다리(triple Bridge)
독특하게 3개로 나누어 만들어진 다리로 1842년 첫 번째 다리를
만든 후 1931년 Joze Plecnik가 2개의 다리를 더 만들었다고 한다.
드문 구조로 낭만적인 이 다리는 류블랴나 강 위에 있으며, 광장과 시장 사이에 있다.
프란시스코(Franciscan) 교회
동상 뒤에 있는 성당은 1646년에서 1660년 사이에 만들어진 바로크양식의 건물로 유리와 철을 이용한
아르토모 양식이라고도 한다.
류불랴나 성
트리플 다리 건너 낮은 산 위로 보이는 이 성은 12세기 이곳을 통치한 Anheim Carinthan 공작이
만들었다고 하며,
15세기~17세기까지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심에 있는 류블랴나 대학 앞에 섰다.
귀한 기회였다.
이 대학에 와서 인문학,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과 그 관련 학문에 대한 학제적 연구
(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유명한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라보이 지제크 [ˈslavoj ˈʒiʒɛk] , 1949년 3월 21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젝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후에 슬로베니아의 수도가 된다.
지젝은 10대 시절부터 영어로 쓰여진 문학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17세 무렵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첫 저서를 발간했고,
1971년엔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동시에 취득했다.
1975년에는 문학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400쪽에 달하는 석사학위 논문 <프랑스 구조주의의 이론적, 실존적 타당성>을 통해
지젝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질 들뢰즈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위에 언급한 인문학자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논할 때에는 네임 드로핑, 그러니까 이름 흘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는 정치이론, 영화이론, 이론정신분석학에 공헌을 해왔다.
지젝은 현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학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며,
또한 유럽 대학원(European Graduate School)의 교수이다.
그는 주체,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근본주의, 인종주의, 똘레랑스, 다문화주의, 인권, 생태학,
세계화, 이라크전, 혁명, 이상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대중문화, 오페라, 영화,
정치이론과 종교를 포함한 많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
한국학과 관련하여 한국어 1, 한국어 2, 한국어3 이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하나의 독립된 학과로 만들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로운 한국학 프로그램을 위해 기존에 있었던 아시아 역사의 이해, 아시아 예술의 이해,
아시아 문화의 이해, 문화교류의 연구 방법 이외에도 한국어, 한국사의 이해, 한국문학의 이해,
한국철학의 이해 등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예정이라고도 한다.
자긍스럽다.
지하철 이름에서 로마시대의 이곳 이름 "에모나"는 살아있다.
"엄마 스시"라니? 일인들의 상혼이 놀랍다.
시 청사 앞
어린이가 분수대에 올랐다.
대학 도시이기도 한 류블랴나는 파울로 코엘료가 쓴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한 곳이기도 하다.
저기 바로 그녀가 바라 본 분수가 아닌가---.
류블랴나 관광을 마친 발길은 자연히 포스토냐 동굴로 향한다.
히치하이커의 포즈가 여유롭다.
여유는 청춘에서 나오지만 상처와 좌절도 그때에 가장 쓰라리다.
벨라 바르톡(Bela Bartok,1881~1945)
루마니아 민속 무곡(Rumanian Folk Dances)
The Divertissement String Ensemble
188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바르톡은 1907~1934까지
부다페스트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로 재직하며
1934~ 1940년까지 그는 루마니아슬로바키아,
트랜실바니아등 헝가리의민요들을 채집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민요로의 접근을 시도, 민속음악 리스트를 포함한
19세기의 사람들은 헝가리 도시지역에서 떠돌아다니는 민요들이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민요라고 생각했었다.
바르톡과 코다이는 서유럽의 영향밖에 놓여 있는 민속음악(노래무곡)을
농부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채보하기 위해 여행했고....
후에는에디슨 축음기로 녹음했다.
이들은 20개의 농부의 노래들을 수록한 모음집을
1906년에 출간연구 영역을 확장시켜(특히 동유럽으로)
남아 있는 민요의 보존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는다.
1934년 한 해에만 1026개의 녹음 원통을 채보, 이 작품은 바르톡이 죽은 후에야
완결된다.
바르톡 음악의 독특한 본질과 표현은 민요로부터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장,단조의 극복과 새로운 리듬, 선율, 음색을지향한다.
1940년 바르톡은 스위스로 망명 뉴욕으로 건너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그의 작풍은 바하의 완벽한 대위법적 수법과 베토벤의 음악적 전개발전의 방법,
그리고 드뷔시의 음색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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