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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미술관, 길상사, 이태준 고가 방문하던 날

원평재 2013. 5. 26. 06:28

 

 

 

 

 

 

 

 

 

 

표암(豹菴) 강세황(1713∼91) 탄신 300주년 …

간송미술관 특별전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

 

일년에 봄과 가을, 단 두 차례만 문을 여는 간송 미술관

금년 전반기 특별전에 외우 몇사람과 다녀왔다.

 

 

좁은 전시실 계단에 줄줄이 늘어선 축하 화분과 아래

좁은 길거리 입구에 길게 늘어선 인파가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부지런한 친구가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이른 여름 더위에 고생을 크게할뻔 하였다.

 

 

 

표암이 올해로 탄신 300주년을 맞아 기리는 행사가 앞으로 많이 열리겠으나

그 처음이 이곳 간송미술관이어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특별히 표암을 중심으로 동년배인 원교(圓嶠) 이광사(1705∼77), 호생관(毫生館) 최북(1712∼86),

이어서 제자 세대로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 등 20명의 70여 점이 선을 보였는데

바로 남종화파가 그들이다.
이곳의 예에 따라 한번에 십여명씩 들어가서 관람하고 그 공간이 비워진 다음에야
다음 차례의 사람들을 조금씩 넣는 방식이어서 기다림은 지루하지만
마침내 차례가 왔을 때의 순간은 환희에 다름아니었다.
 

71세의 강세황은 만년에야 벼슬아치가 된 자신을 상징하듯,

평복에 관모를 쓴 기묘한 모습의 자화상(보물 제590-1호)을 남겼다[국립중앙박물관소장]

 

표암 강세황의 ‘노인관수(老人觀水: 노인이 물을 바라보다)[간송미술관소장]

 

  표암 강세황의 ‘소림묘옥(성긴 숲 속의 띠풀 집)’.56.5×122.0㎝ [사진제공=간송미술관]

 

 

 

성북동 주택가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으로 1938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던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고 모은
과정은 하나하나가 모두 전설이 되어있다.
간송의 사후 1966년에 이곳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어
일년에 두차례[봄,가을] 전시회를 갖는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 미술관의 고집스러운 신중함을 읽게된다.

 

 

감동을 안고 발걸음은 길상사로 향한다.

성북동 대사관 동네가 초여름 더위에 한적하다.

아니, 항상 이곳은 한적하다.

 

 

 

 

 

 

 

 

 

 

 

 

 

 

 

 

 

 

 

 

모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계곡물이 구비구비 흐르는 곳에 이곳의 예전 전설도 흐르고 있으리라는 내 친구의 말은

속세의 관점일 따름이다.

 

 

 

 

 

 

 

 

 

이곳 풀꽃은 모두 우리나라의 야생화라고 한다.

 

 

 

 

 

 

 

 

 

 

 

 

 

 

다시 속세로 나왔다.

 

 

 

 

 

 

 

 

성인 김대건 신부님의 입상이 담 너머로 보인다.

 

이곳도 성북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