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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놀이

원평재 2013. 8. 27. 19:48

 

 

 

 

 

 

 

 (시) 마실 놀이

 

마을 잔치를 마을 축제라니

대학 잔치를 대학 축제라니

무슨 놈의 제사가 이리 많아졌냐고 불호령하던

국문학 노교수는 세상을 뜨셨는데

  

조금씩

마을 축전이니

대학 축전이니

본적의 이름을 되찾으며

두고가신 뜻이 제삿 상 물리고 잔칫상 차림 되어

이 마을 저동네에 울림이 큰 신생을 돌린다

  

마을 잔치 마쓰리まつり도 그렇지 

마실놀이가 현해탄 건너다 쭈그러진 소리이고

씨름의 강개한 고구려 기상과 기얌은

대마도에서 "시르무"로 약화되더니

혼슈에 오를때는 비계덩어리 스모すもう로 어기적 거리지

  

동방예의지국에 제사 의식이야 없을리 없지

거창하지

왕궁의 종묘대제는 유교의 석존 제식을 슬쩍 앞세우며

질서에의 희구와 문화의 확장을 의미한 의전이었지

왜인들이 떠들석 거리는 왔소 왔소 축제와는 

마당과 대청마루의 차이였는데

  

아뿔사

부산 국제영화제

안동 탈춤 국제 페스티발의 축제 표현

전주와 부천에서도 영화제라니

정말 그 어른 말씀마따나

제사가 와이리 각중에 많이 생겨뿌릿노

특히 탈춤은 전복적 속성과 해방구의 염원 따라

카니발의 속성이거늘

페스티발로 작명이라니 무슨 외압 음모론은 아니니껴

  

여름과 작별하고 가을을 맞는 넓은 땅 미주에도

각종 마실놀이

BBQ 페스티발

풀 파티

캔디 피스트

계절이 바뀌면서 아이들은 새학년, 새학교

어른들은 짐을 싸서 떠나기도

돌아오기도 하는데

  

어릴 때에는 잘 모르는 일들만 많아서 축복이야

회자정리 거자필반도 그런 속내일거야

세월은 강물되어 흘러가버리기도 하지만

계절이 되어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나무 잎은 맨 위로부터 단풍이 들어

자기 뿌리로만 중래하지 않고 저 멀리로도 날라가듯

구름도

공활한 하늘 색갈에 존재를 양보하여

생자필멸로 보일 테지만

보이지 않는 산골로 들어갔다가

눈과 비 되어 다시 찾아오는걸

  

* 기록 본능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캪션을 달아서.

100여호가 모여사는 단지에 해마다 여름을 보내는 잔치가 열립니다

어린이 포함 일인당 5불인데 빠지는 가구가 많습니다.

기호 맥주도 한컷 

전에 이야기했던 바이얼리니스트 가족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뒷열에 있습니다.

4년전 서울에서 정명훈 지휘자와 협연하였다고 합니다.

 

조라는 이름의 남자가 너무 착하게 보입니다.

개가 주연인 어떤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특이한 움직임의 거동을 피사체로 즐겨찾는 습관에 따라 몇 컷을 노립니다.

 

 

벌써 단풍이 든 잎새는 낙엽이 되었군요

칩 멍크가 뚫은 구멍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거나한 분위기 입니다,

연기 쪽에 렌즈를 갖다대는 것이 전율일 때가 많지요.

스타우트 맥주, 와인 그리고 별로 쓸데없는 이야기

 

볼륨이 좋은 Herberts 부부가 오늘의 잔치를 만들었습니다.

모닥불이 쇠락할 때쯤이 마쉬 멜로우 구워 먹는 차례이지요. 

 

 

  

버팔로 와일드 윙 체인에 가서 인디아 페일 에일을 마셨던 기록입니다.

이 술의 탄생 내력은 동인도 회사가 있을 때~~~, 뭐 그렇답니다. 

 


 

 

하이든 / 첼로 협주곡 제1번 C 장조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No.1 In C major Hob.VIIb:1

 

하이든 [Franz Joseph Haydn,1732∼1809]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궁정의 수레바퀴 제조자인 아버지의 12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삼촌에게서 잠시 음악을 배웠고, 1740년부터 10년 동안 
빈에 있는 성 슈테판(St. Stephan)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악기를 배우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며
 변성이 되어 더 이상 성가대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1749년 성가대를 나왔다. 
1750년부터 10년 동안은 교회의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고 건반악기 레슨도 하였다.
 이 때에 메타스타지오의 소개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었던 
포르포라(Nicola Porpora)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잠시 작곡이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든은 푹스(J. J. Fux)으 l[Gradus ad parnassum]으로 대위법을 익히는 등 
주로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758년에는 포르포라으 추천으로 
모르친(Karl Morzin) 백작의 궁정 음악감독이 되었고, 이곳에서 목관악기를 위한 
<디베르티멘토>와 첫 교향곡 D장조를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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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 1번 C장조는 200년 가까이
 귀족의 문고나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작품으로, 
1961년에 음악 학자인 폴케르트가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서
 하이든 시대의 필사 파트 악보를 발견하고, 
쾰른의 하이든 연구소 학술 주임 페더에 의하여 사료적 측면에서
 하이든의 작품으로서 신빙성이 높다고 판정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의 첫 머리 주제를 하이든 자신이 '초안 작품 목록'에 기재한 데서, 하이든이 직접 작곡한 첼로 협주곡이라는 것이 실증되었다. 또한 '초안 작품 목록'의 성립 상황과 더불어 양식 연구를 통하여 하이든의 창작 시절의 초기에 해당되는 1761년 대의 작품이라고 추정되었다.
작곡의 동기에 대해서는 에스테르하지 공작가의 오케스트라에서 1761년부터 69년간에 걸쳐서 활약한 첼로 주자 요제프 바이글을 위해 작곡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62년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미로슈 사드로의 첼로, 찰스 마케라스의 지휘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방송 교향악단에서 부활의 무대에 올려진 이후, 많은 각광을 받게 된 제 1번 첼로 협주곡은 하이든의 원숙기에 씌어진 제 2번과는 달리 바로크의 흔적을 남긴 하이든의 초기의 협주곡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곡의 하이든 첼로 협주곡에 얽힌 이야기들은 좀 기묘하다. 한 곡은 1963년에서야 발견되었고 다른 한 곡은 오랫동안 다른 이의 곡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두 곡은 모두 하이든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첼로 협주곡 1번은 1756년에, 협주곡 2번은 1783년에 작곡된 곡으로 추정된다.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No.1 In C major
 

 

 

 


하이든 첼로 협주곡 제1번 1악장 장한나


J.Haydn - Cello Concerto No.1 C Major, 1 movement / MINT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