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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오르실 때면~

원평재 2014. 9. 29. 23:07

 

 

 

 

 

 

북한산 자락을 안마당 정도로 여기는 산꾼들도 많은데 또 몇마디 보태려니 주제넘은 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각을 좀 달리해보면 귀 기우려 볼만한 이야기들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려니~

 

 

 

 

우선 북한산 진입로 입구 쪽을 훑어보면 조선시대 과거 급제 성적에서 최상위권의 유생들을

배출해 낸 도봉 서원이 있었다.

 위에 보이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 암각화가 그 증거이자 흔적이라고 하겠다.

조광조와 우암을 배향한 서원이 있던 이 자리에는 원래 영국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억불숭유의 조선조 정책으로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서원 철폐의 회오리 속에 서울 경기 지역의 서원이 모두 폐원 될 때에도

이곳 도봉 서원만은 명맥을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도봉 서원 말고도 서원들이 많아서 학원 마을아니 서원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에도 원래 명문 서열이 있어서 이곳의 서원들은 경쟁이 치열하여 수십대 1쯤 되는

관문을 뚫고 각각 십여명의 배경 좋은 수재들이 서원마다 들어와서 3년 이내에 

모두 과거 급제를 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도봉"이라는 산 이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삼각산 부분에서도 언급이 있고

한양의 진산으로 이름을 일찍부터 올린 명산이다.


 

 산을 오르기 직전에는 볼 일도 봐두어야 한다.

그 볼일 보는 곳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눈에 뜨이는 시비,

시인이자 교육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1923-1991)의 시비가 있다.

 

 

 "통일 기원 시비"인데 한국 방송통신대학 총 동창회가 세운 자연석 그대로의 투박한 표면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날의 강연과 해설은 김경식 시인(국제 PEN 한국본부 사무총장)이 맡아 주었다. 

해박한 지식과 직관, 그리고 은근한 해학이 좌중을 압도하였다.

이날 문학기행 행사는 서울시에서 후원하고 국제 PEN 한국본부에서 주관하였다.

 

 

 볼일 보는 곳 옆으로는 광륜사도 보인다.

대원군이 실각 후에 오래 기거한 곳이기도 한데 산신각에는 조대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누가 이야기했으나 찾아내지는 못했다~.

 

 

 

 

 

고인돌 

 이제 김수영(1921-1968) 시비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병주 소설가의 시비가 보인다.

 

1968년 6월 15일 토요일 저녁

청진동 신구문화사 근처 술집에서

김수영은 신동문(1917-1990), 이병주(1921-1992) 등과 소주를 마시고 귀가한다.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가 인도로 뛰어들어 그를 덮친다.

다음날 김수영은 적십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벗, 글벗 이병주의 시비가 바로 근처에 있음은 무슨 인연인가~~~.


 

 

 김수영의 시비 아래에는 고인의 유해가 있다는 소문도 바람결에 들린다.

확인하지 않고 지나는게 좋겠다.

사실인 경우 이장을 해야할 판이다.

뒤쪽 가림막 안쪽은 최근 고려시대의 보물이 쏟아져 나와서

발굴작업 중리라고 한다.


 

 

 

 이병주의 시제는 "북한산 찬가"이다. 




 

 이제 발길은 김수영 문학관으로 향한다.

타고 온 리무진 버스로 15분 가량이 걸린다.

 

 예전에는 내게도 북한산, 도봉산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렸던 버스 종점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눈시울이 시큰하다.

 

 

 

 

 

 

 

 

 

 

 

 

 

 

 

 

 

 

 

 

 

 

 

 김수영(1921-1968)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 도쿄 조후쿠고등예비학교 다니다 그만두고 연극공부.

 1943년 조선학병 징집 피해 일본에서귀국. 안영일 ,심영 등과 연극을 함.

 1945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시 <묘정廟廷의 노래> 발표.

 1946-1948년 연희 전문 영문과 편입하였으나 곧 그만둠.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집을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찬> 간행.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 탈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됨.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부산,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 영어교사등을 함.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개인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

 1960년 4.19혁명 일어남. 이후 죽기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발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함.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 버스에 치어 머리 다침,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함.

.....1982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였음.

 2001년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음.


 

연보에서도 보듯이 김수영은 한국전쟁 중 한동안 가족들에게도 행방불명이 된다.

후일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이 되어 가족을 찾으니 부인은 개가를 한 형편이었다.

새 남편은 시인의 친구였다.

부인을 다시 불러서 가정을 꾸렸으나 시인은 술이 취하면

부인을 때렸다는 소문도 전하여진다.

 

 

 


 

 

김수영 문학관 근처에는 연산군의 묘와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연산은 폭군으로 변하기 전, 혹은 그 후에도 허무와 비관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고한다.

시인의 입장, 시심으로는 그를 관용할 수도 있다고 그날의 분위기는 흘러갔다.

 

한편

수령 7-800년을 자랑하던 은행나무는 최근 조사에서 600년으로 강등?

더욱 최근에는 500년 가량으로 나이를 회춘?하였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젊은 나이를 찾았으니 영광이런가

하지만 국보급 보호수가 되려면 800년 이상이 되어야하기에

이 은행나무로서는 안타까운 시련기에 들어간 셈이라고나 할까---.

회춘의 비애런가.



 

 

 

모두들 연산묘 앞에서 시인이라는 측면에서 관용의 묵념을 하였다.

 모두두

 

 

 

 






 

 

 

 

 

 

연산묘를 떠나려는 입구 쪽으로 세종의 막내딸 정의공주의 묘가 있다.

한글 창제 후에 한글 활용의 내간 문학 등으로 많은 기여를 한 분이었고

세조의 횡포를 모두 목격하면서 오래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문학기행의 출발지로 돌아왔다.

시청 앞 지하보도에 아직 공중전화가 살아있다.

반갑기가 조선조 시대의 유물을 만난듯 하였다.

 

 왕복하는 리무진 버스에서 이른 가을의 정취를 조금 찍어보았다. 

 

 


 


[사랑의 음악산책]

[모음감상]

      [개별감상] 1 Giovanni Marradi - Bells Of San Sebastian(가을의시선) 2 Violin Solo & Chamber - First Love(첫사랑) 3 Erkan Aki - Forever Is Not Long Enough 4 Twin violin(연주) - Rhythm Of The Rain 5 Giovanni Marradi - Forever(Piano_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