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발가락이 닮았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우리의 조상 부여족들과 혈연임을 믿고 싶어 한다.
순 억지는 아니다.
언어와 인종적으로 남 슬라브계에 속하는 사람들이지만 어쩐 일인지 몽골 반점이 많다.
오래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중, 묻어들어 온 DNA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 해석보다 아예 부여족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진출할 때 불가리아
지역까지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고추"도 이 지역의 특산물이며 요리에 많이 쓰이고, 이 나라 역사상 "불가"국이라는 이름의
시대도 있었다고 한다.
부여와 불가는 박혁거세의 "밝, 바이칼 호수에서 연원하는 "불함" 문화 등과 함께 어떤
음운상의 근친 관계를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다만 고추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이 나라의 수도 "소피아"라는 이름은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지혜의 성녀에서 따온
기독교적 색채 같기만 하다.
하지만 부여족이 나라를 세울 때는 통상적으로 수도의 이름을 "사비" 성으로 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이르면 공연히 손이 안으로 굽는다.
부여족의 일파인 백제의 옛 수도 이름 역시 사비성이 아니던가.
놀랍게도 소피아의 옛 지명 또한 "소비"였다는 것이다.
거기 더하여 이 나라를 관류하는 꽤 큰 강 가운데 하나가 "소비"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한글이라는 문자를 창제하여 쓰듯이 불가리아는 키릴 문자를 창제한 국가이니
DNA의 창조적 성향 까지 닮았다면 너무 강변인가.
사람에게 자신과 닮은꼴을 찾으려는 집착이 있다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다.
이런 현상을 현대의 분자생물학 지식으로 유추해 보자면 DNA 상의 근친관계를 찾으려는
본능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개화기의 작가 김동인이 쓴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에는 생식 불능의 사내가 자기 마누라가
낳은 불륜의 자식에게서 "가운데 발가락이 닮았다"는 한 조각 단서를 근거로 삼아 친자라 믿고
싶어 하는 간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욕망을 폄하하고 무시만 할 일도 아니다.
우리 모두 그런 집착의 동류항이 아니겠는가, 그럴 사정에 놓이게 된다면.
영리한 유태인들은 그래서 혈족을 모계 중심으로 하며, 딸이 낳은 자식만 확실히 믿는다던가.
얼마 전 미 서부의 데스밸리와 브라이스 캐년, 자이언 캐년을 처음 트래킹 하였다.
모뉴먼트 밸리를 빠뜨린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아래 나바호 족이 아직도 살고있는 그곳은 사라져가는 인디언
영혼의 마지막 처소라고나 할까.
데스밸리에서 우연히 만난 교포 트래킹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관광규정상 인디언 마을 쪽에서도
하나가 나와야 하는 트래킹 가이드들 중에 백발을 휘날리는 우상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한다.
서부의 캐년들이 보통 지형상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협곡을 내려다보는 식이라고 한다면
모뉴먼트 밸리에서는 계곡에 우뚝 솟은 거대한 흙돌 기둥을 올려다보며 일종의 영기를 내려
받고 그 장엄함 속에서 무속적인 강신의 경지까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바로 지프차를 타고 흰 머리칼을 흩날리며 앞서 달려 안내를 하는 백발의 인디언 가이드!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자태는 무속계의 샤먼 그 자체더라는 것이다.
처음 그는 찾아 온 한인들을 매우 홀대한 모양이다.
그런데 일단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앞서 보인 그의 태도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에 대한 분개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말과 태도는 매우 겸손하지만 내심에는 교만함이 있었고 또한 메뚜기 떼처럼 훑고
지나가는 단체 의식에 항상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그들이 동아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미국을 기습하여 때렸다는 역사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백인들이 자신과 같은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사실과도 어느 면에서는
맞물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히 한반도와 한민족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더욱 기분이 나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민족은 나바호 족과 너무나 닮은 데가 많아서 한 핏줄, 혈족이 아닌가 말이다.
백발 나바호의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내세운 혈족이라는 표현과 주장은 막연히 인디언들이 아시아 인종과 닮았다고
그러는 게 아니었다. 몽골 반점만 엉덩이에 달고 나오면 다 근친이고 혈족인가?
결코 아니다!
우선 팔뚝을 좀 꺾어보아라. 한인들은 팔뚝 아래쪽에 줄이랄까 홈이 파인다.
(전생이 거지라서 깡통 매달았던 흔적이라고 낄낄거린 유년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나바호 족이 그러하다.
그 다음으로 새끼발가락과 발톱을 보라. 백인들은 다섯 발가락과 발톱이 모두 똑 같다.
그러나 우리와 나바호족은 새끼발가락과 발톱이 다른 네 개와 달리 꼬부라져있고 발톱은
갈라져있다.
시각에 따라서는 좀 못생긴 편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유니크하다.
그 외에도 아버지를 "애비"로, 신발을 "모카 신"으로, 강을 "간"으로, 여러 어휘상의 비슷함은
말할 것도 없고 절구통이나 생활용품의 닮은 꼴, 그리고 어린이를 등에 업고 짐을 머리에 이는
행동과 모습 등도 꼭 같으니 형제자매의 사이가 아니고 그 무엇이랴.
이런 인연으로 백발의 트래커와 젊은 교포 가이드는 그 이후 친 형제처럼 지낸다고 한다.
나이 차이?
놀랍게도 그 백발의 노인은 겨우 50대 초반이었다.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니면 카리스마 핏줄이 있어서 노숙하게 보이는지는 모른다.
그러고 보니 부여족들도 고구려의 기상은 다 잃고 근대사에 이르러서는 고생이 많았다.
30여 년 전, 중국 동북지방(만주 지역)을 처음 여행하며 조선족들의 참상을 목도한 바 있다.
돼지우리간 보다도 못한 집에서 사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 민족과 그 족친들은 왜
이렇게 항상 고난참담의 길을 걷는 가, 비통한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한류를 보라. 그 때로 부터 한 세대도 흐르기 전에 세계사의 진운에서 우리 민족과
주변 근친의 핏줄들이 모두 앞장을 서고 있다.
다만 유일하게도 우리의 북쪽 한 곳을 빼고서는---.
금강산 만물상 관광을 십여 년 전에 다닌 바 있었다.
이제는 통일 한국의 지도를 펴놓고 개마고원에서 올라가는 백두산과 기기 묘묘 절경이라는
묘향산 그리고 칠보산 트래킹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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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최근 우거하고 있는 피츠버그의 어떤 몰에서 베스트 셀러 중심으로 몇 컷 한 것입니다.
뉴욕에서는 전문 서점인 반슨 노블(Barns & Noble)의 일부와 Borders가 2년전 문을 닫는
모양도 목도하고 놀란적이 있습니다.
피츠버그는 교육도시라서 그런가, 아직 서점이 문을 닫는 일은 없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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