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가을 풍광이 지척이다. 넓은 나라의 단풍 벨트는 그 규모로 위풍당당이지만 우리나라의 설악과
내장도 빼어난 기품과 다양한 색조로 세상 어디에서나 꿀리지 않는다.
가을은 그래서 행락의 계절이다. 또한 더운 여름을 시원한 가을바람으로 날려 보낸 야외
스포츠도 하루라도 거르면 절기에 위배된다는 듯 관중석을 가득 채워내고 있다. 전시장과
공연장으로도 여름 열기에 주눅 들었던 발길들이 드디어 분주하다. 이런 세시풍속 가운데에서
노란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내걸린 “가을은 독서의 계절‘ 문구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가을은 정말 독서의 계절인가.
사실 통계적으로 보면 가을은 분명 "비독서의 계절"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활동적 동선
위에서 분주한데 독서 대에 차분히 앉아있을 겨를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가을에는 여름보다
15퍼센트 정도 도서 판매량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런데도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좋은 계절에 너무 놀러만 다니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권고사항의 성격이 아닌가 싶다.
또 나처럼 놀러만 다니면서도 책을 읽는다고 시치미를 떼는 사람들이 퍼뜨리는 허구이기도
하리라.
만해 한용운 선생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였지만, 법정 스님은 그렇지 않다고 설파하며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셨다.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하다. 이 좋은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 될 순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제격
일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
주신 말씀은 표면적인 뜻보다 새겨들을 내용인가 한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뿐인 듯하다. 심지어 당나라
대문호 한유 등이 등화가친을 말하였던 중국에서도 지금은 "독서의 계절, 가을"이라는 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시각으로도 “가을, 독서의 계절”이라는 명제는
받아들이기 참 껄끄러운 듯하다.
일본 강점기 중에서도 문민 통치 강조시기인 1925년에 일본 총독부가 서울에 도서관을 설치
하면서 그 개관 날짜가 마침 계절적으로 가을에 맞물려서 "독서의 계절" 운운하였고, 이를 당시
우리말 신문, C 일보와 D 일보가 맞장구를 친 게 그 유래라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 역사적 고증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기분은 나쁘지만 우리가 독서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라고하면 이 또한
진보적 결론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개념을 처음 정립한 것은 미국을 본받은 모양 같다. 미국에는 물론
그런 “계절”이 따로 없고 넓은 땅 만큼이나 <독서 주간>이 방방곡곡의 사정에 따라 달리 설정이
되어 캠페인을 벌이는 건 사실인데 마침 약 삭 바른 일본에서 이를 국가적으로 원용하게
되었다는 시각이 유력하다. 하필이면 절기가 가을인가라는 데에는 농경사회의 전통 탓이었을까.
조금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미국에는 “금서주간(Banned Books Week)"도 있다. 내용인즉, 책을
금하자는 운동이 아니라 과거에는 금서 목록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또 책의 일부 내용을 삭제
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일을 상기하면서 책을 더 읽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다.
한편 책방 사정들이 여의치 않다. 미국 최고의 서점체인 <반슨 노블(Barnes & Noble)>도 서점
숫자를 줄이고 있다. 최근 소식으로는 분기 실적 발표에서 8천700만 달러의 순손실을 냈고
온오프 분사 계획도 무산되었다고 한다. 큰 서적상 <보더즈(Boders)>는 벌써 여러해 전 회사
자체가 부도가 나면서 전부 파산을 하였다. 맨해튼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건너편의 그 큰
간판이 내려질 때는 문명의 위기감 같은 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분서갱유”와 “문화대혁명”의
인고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는 사글어들지 않았다. 전통적인 책방이 문을 닫는 현상으로 문화의
흥망성쇠를 섣불리 논할 수는 없으리라.
최근 집 근처 어떤 대형 서점을 찾아보니 책 분류 코너를 바꾸고 고치느라고 야단이었다. 문득
<반슨 노블> 서점이 생각나서 가슴이 철렁하였다. 작년도에 그 서점은 만화 코너를 서점의 맨
한가운데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활차 책 불황이라도 너무하다 싶었었는데 다행히도 알고
보니 우리의 대형 서점은 그 정도로 재배치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러나 변방에 있던 만화책들이 서점의 중앙지대 가까운 데로 진입하고 있는 현상은 비슷하였다.
모든 미디어는 문학 텍스트라는 주장에 따르면서 세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어떤 형태, 어떤 내용의 것이라도 일단 책은 우리의 곁에 있어야하고 그런 책방은
건재해야하지 않겠는가 싶다.
미국의 경우 대형 양판점, 예컨대 월마트나 자이언트 이글 같은 데에서의 서적 코너는 예전의
전통적 책방 보다 오히려 규모도 크고 효율적이며 함께 있는 전자 코너의 e-북 리더기 등과
조합하여 새로운 전자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아까 말한 만화책은 물론 오디오 책 즉 듣는 책도
부지기수이다.
우리나라도 인터넷 서적은 대형 서점 중심으로 벌써부터 스타트 업을 한 형세를 느낀다.
종이 책에만 연연해서 다른 엔터테인먼트나 게임 등에 밀려 문화세계에서 쫓겨나기 보다는
새로운 미래의 지평을 개척하고 자리를 잡아가야 할 것이다. 책의 출판과 관련해서는 유통
구조의 변화에도 눈을 떠야할 것이다. 동네 책방에 손님은 보이는데 책은 팔리지 않는 현상이
나온다고 한다. 책방에서는 책만 훑어보고 나서 주문은 인터넷 서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가을, 어쨌든 독서의 계절이 다시 왔다. 단풍 여행길에 꼭 읽을 책 두어 권은 필히 지참할
일이다.
약력; 문학마을(소설) 미주시학(시) 문학의식(평론) 등단,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부총장 역임),
서초문인협회 회장, 국제 펜 한국본부 국제교류위원장, 한국소설가 협회 윤리위원, 한국문협
회원. 소설집 3권, 평론집 1권 외 학술 및 번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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