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사마르칸트에서
김 유 조
우즈베키스탄에 눈이 내리는 건 일 년에 세 번쯤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처럼 폭설이 내리는 일은
아주 드물다고 한다. 열사의 지역은 아니어도 매우 더운 여름으로 기억되는 나라에 겨울 여행을
왔지만 설국을 맞을 줄이야.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여행자는 맑은 날을 더 찾게 마련이지만 이번은
감회가 달랐다. 에메랄드 빛 돔 모스크와 그 주변의 원주형 탑, 미나렛에 눈이 쌓여 반짝이는 광경은
미학을 넘어 신묘하기까지 하였다.
타슈켄트 공항은 전에도 유럽으로 가는 트랜싯으로 가끔 멈추었지만 이번처럼 우즈베키스탄 땅을
완전히 밟고 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공항은 지금 초라하다. 얼마 후면 새 공항을 완공한다지만
아직은 우리나라 지방 공항보다도 훨씬 못하다. 이스탄불에서 이곳으로 오며 보니 우즈벡 항공
데스크 앞에 엄청난 보따리를 들고 안고 끌고 지고, 규정이 넘는 짐은 산더미같이 탁송하는 행렬들이
있었는데 이 나라에 들어오자 곧장 이해가 되었다. 면화와 천연가스 외에는 아직 생산시설이 없는 이
나라에 외국 특히 터키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보따리장수들이 어찌 넘치지 않으랴.
새벽에 도착하여 우선 타슈켄트 구경을 위하여 이곳 화폐 “숨”을 바꾸려는데 환전소는 따로 없고
주요 호텔에서만 바꾸어준다고 한다. 담당자의 계산법도 어벙할 테니 조심하란다. 아닌 게 아니라
일행 중에 돈을 덜 받은 사람, 두 배나 더 받은 사람이 속출한다. 구소련으로부터 70년 속박을 벗어나
막 독립을 한 나라의 현실이라고 이해를 하니 다소 애교스럽다. 우리나라의 두 배 가량 되는 땅에
인구는 3천만인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오랜 옛날 티무르 황제의 영화를 미래의 꿈으로 그리고 있다.
그때는 강역이 이락과 그리스 지역까지 이르렀고 인도에도 강력한 세력이 뻗쳤었다. 지금은 스스로
이슬람의 때를 벗기고 있는 중이었다. 무슬림이 드리는 하루 다섯 번의 경배도 해제되었고 심지어
공공장소에서는 위법이라고 한다. 문자도 아랍문자에서 러시아식 기릴 문자로 갔다가 이제는 다시
라틴 문자로 혁신을 꾀하고 언어도 러시아어의 영향을 벗어나 우즈벡 고유 언어로 회귀하고 있어서
거리의 간판은 두 가지 문자가 함께 씌어있다.
티무르의 나라이니 우선 아티무르 광장으로 가보았고 거대한 퍼레이드가 일상이던 인민광장을
걸었고 1966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이슬람 사원과 재건 기념비를 찾아본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초르수 전통시장이다. 한없이 넓은 시장 바닥에서 화덕에 빵을 구워 파는
사람들, 또 수많은 종류의 야채와 식육과 반찬가게라니~.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은 닭장의 닭이 후드득
날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이를 뒤쫓는 아낙의 모습이 반세기도 더 전의 우리나라 시간을 좇는듯
하다. 그들의 순진한 얼굴도 옛 감상을 더욱 깊게 한다.
이제 비가 섞여 내리던 진눈깨비가 점점 더 폭설로 변하여서 우리는 급히 우즈베키스탄 제일의 “호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온다. 객실 수로 따지면 몹시 큰 호텔이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타슈켄트 행
여정을 걱정한다.
이윽고 다음날 눈 내리는 날의 아침, 타슈켄트 기차역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고속철을 탄다. 개통
후 몇 년 되지 않는다고 자랑하지만 우리의 KTX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속도는 시속이 140
킬로미터이고 안정감도 좋다. 중간에 크루아상 빵, 다양한 차와 커피, 그리고 따뜻한 물을 주는 점도
이채롭다. 마침 자리가 객차의 중간 지점이어서 우리나라처럼 건너편 좌석과 마주보며 앉아가게
되었다. 예쁜 처녀 둘이 타고 있어서 말을 붙여보니 여고생들이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와 말을
섞어보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꿈같다고도 말한다. 영어도 곧잘 한다. 원래 우즈벡 언어는 우랄
알타이어 계통으로 우리말과 문법이 같아서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여학생들은 영어도
잘한다. 이들은 사마르칸트 보다 더 먼 부하라에서 타슈켄트로 짧은 여행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는데 멀리 진출하려는 야무진 포부가 이곳 젊은이들의 마음을 읽게 한다.
먼먼 평원으로는 농가들이 아무렇게나 서 있는데 눈은 하염없이 펑펑 내리고 실내의 따뜻한
분위기는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한다. 고속철을 타기 전에 이름이 아프로시압이라고 맨 앞
기관차에 크게 쓰여 있어서 뜻을 물었더니 여학생들은 티무르 대왕 이전부터 이곳에 오래 세워져
있다가 칭기스칸에 의해 완전 파괴된 고대문명이자 티무르가 다시 재건 중흥시킨 문화의 터전이며
지금 세대들이 미래에 이루고자하는 꿈의 나라라고도 하였다.
부하라가 고향인 여학생들은 고속철을 계속타고가고 우리는 사마르칸트 역에서 내렸다. 눈은 계속
펑펑 내렸다. 눈 속을 걷는 사람들을 보니 동방 적이던 타슈켄트 사람들 보다 서양인들의 용모를
많이 띄고 있다. 특히 한때는 고대 희랍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았다고도 하여서 우리 역사에는
서역으로 표기되는 전말을 느낄 수 있었다. 신라의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서 이곳을 거쳐 갔고
우리가 이제 가서보고자 하는 고구려 사신들의 벽화도 이 서역으로 온 역사적 선조들의 모습
이겠다.
무덤은 항상 쓸쓸하고 유현하다. 그 주인공이 세계를 제패한 영웅이든 촌부이든 간에~. 사마르칸트
역으로부터 일행은 다시 소형 버스를 타고 티무르의 영묘, 구르에미르로 향하였다. 구르(묘), 에미르
(왕)는 아무르 티무르와 아들, 손자 등이 잠든 티무르 왕족의 묘이다. 원래 이곳에는 티무르 왕이
출중한 손자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 사원과 신학교를 건설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1404년 원정에서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전사를 하자 티무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장소에 묘를 건설하였으며, 1년 후
중국원정 중에 죽은 자신도 이곳에 묻히게 된다. 내부는 금빛으로 장식되었으며 금이 5 Kg 이나 사용
된 이 묘는 참으로 절묘하고 신묘하였으나 지금은 슬픈 전설만 현현한다.
인근에 있는 아프로시압 언덕은 철저한 파괴의 현장이었고 아직은 발굴의 엄두도 못 내고 있으나
궁전과 벽화의 일부만은 발굴이 되어서 우리나라 동북아 재단에서 몇 년 전 재현해 놓은 박물관
벽화가 예전의 영화를 일부나마 찾게 한다. 특히 1300년 전 환두대도를 차고 두 가닥 새 깃털의
조우관을 쓴 고구려의 사신이 내방한 희미한 모습은 그나마 환희를 불러온다. 다만 우리의 국력이
뻗쳐났다기보다는 당시 연개소문이 쇠락해가는 국력을 재건하기 위해 애쓴 서역 외교의 한 단편
이었다는 해석이 씁쓸하게 전한다.
뀀 요리 샤스락으로 점심을 때운 후 일행은 전통시장을 지나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원인 '비비
하늠 모스크'를 찾는다. 1399년 인도원정을 떠난 티무르는 8명의 왕비 중 가장 사랑한 비비하늠을
위해 최대 규모의 모스크를 짓게 하였는데 회군 후, 왕비와 건축가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결국 두
사람을 처형했다는 전설이 마음을 때린다.
눈은 이제 그치고 사마르칸트는 폐허와 신생이 교차하는 땅으로 내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다.
이 나라도 이제 국력을 다시 찾으면 사라졌던 황금시절의 문화예술을 다시 꽃피울 것이다.
인천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의 보잉 비행기 250석 좌석은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우즈베키스탄 인들이
가득하였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내 가슴 가득하였다.
저자 약력; 서초문인협회 회장, 국제 펜 국제교류위원장, 한국 현대시인협회 국제문화위원장, 건국대
명예교수(전 부총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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