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박물관, 환도산성, 압록강 뱃놀이
고구려 탐방은 묘지 순례라더니 장군총(그러니까 장수 왕 능)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또 오호 묘(五? 墓)로 갔다.
그러나 정작 이 큰 묘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벽화들의 사진만 보여주었는데
역시 대단한 규모에 정교한 묘사, 아직도 생생한 색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곳 묘지는 오두회분(五頭?墳)이라고도 하는데 인근에서 가장 큰 다섯 기의 무덤이
마치 투구(頭器)와 같아서 그렇게도 부른다고 한다.
머리가 크면 장사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이 곳에서 그 역사성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오호 묘를 나와 집안 박물관으로 갔다. 거대한 강역을 장악하면서 이 곳에서 장장 19대왕,
424년의 도읍으로 삼은 곳의 박물관으로는 건물 규모나 소장품의 내용이 볼 품 없었다.
입구의 설명문에는 2000년 전에 이 지역을 다스린 “지역 정권”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노여워 할 자격도 못되는 후손들의 입장인지 모른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지만 허다한 중국의 역사서에도 “고구려”라는 명칭의 기술은
겨우 여섯 번인가에 불과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연의 “삼국유사”가 없었으면
“웅혼한 고구려”는커녕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물론 “구려, 고려. 구리, 고리” 등의 기술이나 민간 전설은 회자되고 있으나 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확실하게 실증적으로 외연 발전시키는 작업은 우리 후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물론 요즈음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각성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음은 다행이지만
이 것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가슴과 머리와 발이 함께하는 작업이어야 될 줄로
안다.
지도에 나와 있는 당나라 시대의 최대 강역에 신라는 제외되어있었다.
424년을 여기에서 지내고 장수 왕 때에 평양성으로 옮겼으니 명당이 아닐 수 없으리라.
입구에는 역시 장군총에는 비길 수 없으나 거대한 적석총들이 총총히 들어차 있어서
문득 이집트의 “왕가의 골짜기”를 연상시켰다.
아마도 고구려왕들은 태평성대에는 집안의 국내성에 있다가 다소라도 전운이 감돌면
이리로 들어와서 국가의 안보를 도모했으리라.
(국내성 터---, 하천의 방천 역할이 되었다.)
국내성은 마치 서울 천호 동 쪽의 백제성곽처럼 이제는 아파트와 시장 통이 들어앉아서
강가의 방천으로 쓰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흔적이 남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금년 내로 집들을 모두 헐어내고 옛 모습을 복원시킨다고 한다.
UNESCO 덕분이지만 구천의 선조들이 다소나마 해원 하시려나---.
유리왕은 한족 사람 치희와 이 지역 골천 사람의 딸 화희로 두 부인을 가졌다.
결론으로는 치희가 화희로부터 모욕을 당하여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를 따라갔다가
결국 데려오지 못한 왕이 한탄하는 노래가 황조가여서,
혹 유리왕의 심약함을 탓하는 사가들도 있으나 당시 이 광대한 만주 벌판과 중원,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패권(헤게모니)을 다투며 살아가는 통치자의 사방 아우르기 전략이
아니었을까.
왕은 심지어(연변 표현으로는 그냥 “지어”) 자기의 장자를 이웃 왕을 모욕하였다고
하여서 자결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패권 국가 사이에서 안보를 도모해야하는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큰 타산지석이 된다.
우리도 멀리 국내성이 보이는 장대에 올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통시(通視)하며
분(忿)과 한(恨)의 대담을 나누었으나 태극기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환도산성을 점지한 것은 돼지였다고 한다.
설화가 따르지만 여기에 옮길 여유는 없고 아무튼 고구려 조상들이 돼지를 중히 여긴
데에서 나온 이야기이리라.
삼겹살에 소주 한잔! 대단하지 않은가.
늦은 점심을 조선족이 하는 불고기 집에서 먹었다. 석쇠에다 얇게 베어서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를 얹어 숯불로 굽는 정통 우리 요리였다.
아, 이 곳 “집안”의 말씨는 바로 강 건너 북한식이었다.
통화에서부터 따라온 우리 가이드도 바로 그 평양식 “문화 어” 발음을 간드러지게 하면서
우리를 안내하였다.
3년 전까지 북한과 무역을 하다가 중국 관광 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안내질”을 하는데,
이 질이 수입도 좋고 재미있다고 하였다.
북한 산(북한의 산)이 왜 민둥산인가, 뗄 감으로 다 베어나갔는가, 복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통나무로 베어서 중국에 모두 팔고 식량을 사갔다고 한다.
새 묘목을 심는다고 했는데 아직 육안으로는 볼 수 없더라고 사실만 말하였다.
두만강으로는 버스로 옮아갔지만 한국식 식당이 즐비한 곳에서 백 걸음 남짓이었다.
이미 알고 갔지만 두만강은 흙탕물이었다.
유람선이 아니고 7-8명이 타는 보트를 타고 그 강을 한 20분 전속력으로 오르내리는데,
건너편 산 중턱으로 낸 길에는 북쪽 사람들이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모습이
“가담 가담” 보였다.
보트타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큰 적석총들이 있는 고묘군의 한 군데를 들렀다.
거기 함께 있던 네 기는 사라지고, 하나 남아 있는 큰 묘는 “천추묘”라고도 하는데,
명정에 천추만세영고(千秋万歲永固)라는 글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이 거기 담겨있는 듯싶었다.
우리가 본 고묘에는 모두 클로버를 심어놓았는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하지, 아마.
이 날 우리 집을 포함하여 몇몇 부인들은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이 추가된 셈이라던 가---.
“저는 세 잎의 행복이면 충분해요.”라고 찾지 못한 어떤 부인이 담담하게 말을 하는데,
“다섯 잎이다!”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진들을 찍고 부산을 떠는데,
“여섯 잎이다!”라는 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정녕 여섯 잎이었다.
마침내 네 잎 까지는 봐주고 다섯 잎과 여섯 잎은 클로버가 아닌 변종으로 처리하였다.
다수의 위력이었다.
(북한으로 가는 철교인데 보이는 도시는 만포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좀 있어서 북한의 만포가 보이는 곳 까지 가 보았다.
밭을 건너 방천 위에서 북한으로 가는 다리를 보고 사진도 찍었다.
20여분 동안에 북쪽에서 두 사람이 건너 왔고 트럭 한대가 건너갔다.
내 고국 북한산에는 진달래가 다 졌겠지만, 북한의 산에는 이제 진달래가 만개하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