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동북공정 지대에서(호태왕능, 장수왕능, 순장묘, 쪼다

원평재 2005. 5. 7. 10:24
 

호태왕능,장수왕능,순장묘,쪼다

 

(장수왕을 모신 피라밋으로 4-5층에 현실(玄室)이 있다. 앞 쪽 입석의 가운데 돌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한다. 출입이 통제 된 지역인데 행운을 위하여---.)

 

유럽 여행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교회 순례 역정이고, 중동은 이슬람 모스크,

아시아는 불교 사찰을 둘러보는 여정이며,

고구려 역사탐방은 묘지 참배 일정이라고 역사학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과연!

우리의 탐방 일정은 환인에서 보고 들은 수천기의 수몰된 적석총에서 비롯되더니,

오늘도 유명 무명의 거대 묘지 군락을 돌아보는 발걸음이었다.

 

(호태왕능에도 입석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민둥산은 북한 지역이다.)

 

따지고 보면 유명, 무명이라는 말도 터무니없다.

호태왕 비석의 좌우에 있는 두 기의 장군묘도 시대에 따라서 광개토대왕 능이니,

장수왕의 능이니, 주인이 왔다 갔다 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평양에는 또 다른 장군 묘가 있어서 장수 왕 능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하는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왕의 능이 그 곳에 있다는 주장에도 당연히 일리가 있으리라.

 

전통 사관으로는 고구려의 역사를 서력기원전 37년인가로 보지만 새로운 사관의

학자들이나 북한의 주장으로는 그로부터 한 25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BC 277),

“역사란 오래 된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욕심에서가 아니라 수몰된

1000여의 묘기 말고도,

일만 이천의 또 다른 적석총들과 그 출토물들을 이번에 둘러보며 느낀 아마추어의

감상으로 말하자면, 이 새로운 사관에 신뢰성이 더 짚이기도 하였다.

 

                               (일만 이천 적석 묘 군의 일부이다---.)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거대 능은 위대한 왕의 위엄이 서려있을 뿐 범인의

흥미를 일으킬 사연은 허락지 않고 있었으나 장수 왕 능은 거대한 돌들을 촘촘히 쌓은

품새하며, 뚜껑을 덮은 장엄한 천개석의 규모, 무거운 돌들이 바깥으로 밀려나오지

않게 사방마다 세 개씩의 무지무지하게 큰 입석을 세워놓은 모양들이 참배객(?)들을

압도하고도 남았으며,

역사의 이끼처럼 내려오는 설화들이 범부의 가슴을 또한 적셔주고 있었다.

 

장수왕은 재위 기간만도 78년이나 되어서 그의 아들 조다(助多?)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어서 오늘날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못난 인간들을 “쪼다”라고

일컫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우스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란다.

 

“장수 왕”이 거의 100세 가까이 장수를 누렸기에 일찍 죽은 왕비는 가묘의 상태로

있다가 오랜 후에 왕이 천수를 다한 다음에야 왕의 옆에 합장이 되었는데

이 피라밋 같은, 아니 7층으로 된 이 피라밋의 4-5층 현실에서 이 위대한 왕과

조다의 어머니인 왕비는 마침내 영면하였던 것이다.

 

“영면”이라는 말에도 어폐는 있다.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이 아시아의 피라밋도 언젠가 세월도 모르는 사이에 도굴이

되었고 현실의 주인들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왕은 죽을 때 저 세상으로 혼자 가지 않았다.

피라밋의 뒤 곁에는 멸실된 묘기 넷을 포함하여 도합 다섯 기의 순장묘가 있었다.

왕과 함께 간 처녀들의 나이들은 하이틴도 되지 못한 이팔청춘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평균 여명을 감안하더라도 십육 세란 너무 억울한 나이가 아니던가---.

 

                               (유일하게 남은 순장묘---.)

 

 

나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순장묘에 딱 붙어서 만주벌 처녀의 천년도 더된 호흡을

느껴보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아니 바람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절규인가, 환희인가?

 

왕과 함께 망각의 강을 건너도록 간택된 다섯 여인들은 가문의 영광에 전율

했겠으나 옹근 닷새를 버티도록 들여 넣어진 양식이 끝날 때쯤에는

이 명예의 전당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혼절해 갔을까---.

내 소년 시절에 두 번의 접신 기회를 맞고서 그 직전에야 겁이 나 닫아버린 체험

탓에,

아직도 그런 신 끼가 좀 남아있을까 기대를 해 보았으나 내 나이든 육신에

그런 영험은 다시 찾아오지 않고 말았다.

 

윌렴 포크너는 “소음과 분노”에서 시계를 가리켜 “시간의 대 영묘”라고 하였다.

지금 보니 블랙홀처럼 시간을 빨아들이고 있는 이 대 영묘 앞에서 내 관념은

거대한 자장에 붙들린 듯 꼼짝달싹도 못하였다.


밤새 봄비가 내리더니 호텔에서 이른 아침에 주일 예배를 보고 나올 때는

쾌청이었다.

5-1절 연휴를 길일로 택하여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미소 지으며 들어오던

신부의 고운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