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홍범도 장군/봉오동 수고(水庫) 나들이

원평재 2005. 5. 10. 20:16
 

홍범도 장군/봉오동의 수고(水庫) 나들이


홍범도(洪範圖)

1868(고종 5) 평양--1943


고구려 역사 탐방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역사학자께서 항일 유적지를 돌아

보자고 제안하였다.

독립 운동가 홍범도 장군에 대하여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재조명이 시도

되고 있는 가운데 봉오동 대첩지로 차를 달려 나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홍장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 때만해도 그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후 여러 사정으로 그는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러시아령으로

넘어가서는 제3인터네셔널의 동북아 대표가 되어 레닌과 단독 회담도

갖는다.

 


 ("봉오골 반일 전적비"라는 인색한 표지가 콘크리트에 파묻혀 초라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작가 김길련의

장편소설 “먼동이 튼다”(민족 출판사 93)에도 생생하게 투영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의 영웅적 행적을 익히 아는 우리들의 인식체계 속에서

진자(振子)의 운동은 그 건너편 쪽도 힘차게 아우르며 왕복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미 60년대 초에 이 분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한 바는 있다.

 

미묘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는 무력 독립운동의 후반부를 러시아

령에서 지속하다가,

연해주에서 1927년부터 10여년간 집단농장, 콜호즈를

이끌 만큼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영웅은 오로지 전장에서 죽어야만 장렬한 것은 아니다.

이 빛나는 이상주의자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시베리아 동토대를 건너야 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37년 스탈린이 주도한 비극적인 연해주 한인들의 중앙 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그는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연금 생활자로 만년을 보내다가

1943년에 생애를 마감한다.

 

역사의 꼭두각시가 된 영웅적 이상주의자의 말로는 우리에게 페이소스를

던진다.


홍범도는 항상 위대한 전략가였다.

봉오동 전투지는 삼국지에 나오는 것 같은 유인 매복의 천혜지였고

야전상황에서 그는 이 것을 간파했다.

 


       (수고라는 표현이 처음 어색했으나 생각해보니 맞는 표현이었다.)

 

지금 그 협곡 입구에는 큰 댐이 건설되어서 중국어로는 “봉오동 수고(水庫)”

라고 일컬어진다.

이 물막이가 있는 쪽으로 당시 함경도에 있던 왜군 경찰들까지 수천의 군경이

홍장군의 유인책에 따라 모두 몰려와서는,

우리 독립군을 좇아 지금의 이 수고 지역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매복전에

전멸을 당한 것이다.

청산리 대첩은 이 후에 다시 이어진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공동

승전보가 된다.

 


우리의 역사 현장이 대략 그러하듯이 이 곳도 사적지로서의 관리는 엉터리였다.

하긴 이미 남의 땅이기도 했지만 전승 기념탑이 을씨년스럽게 홀로 버티고

있을 뿐, 당장은 저수지 건설 현장일 따름이었다.

입구 쪽으로는 작고 시원찮은 휴게 공간이 있었고 손질은 방만했다.

물론 5-1절 연휴 끝이라 근무자들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공사장의 인부들이나

기술자들도 없었지만---. 

 

우리가 고요함을 헤집으며 차를 몰고 댐 꼭대기 공사현장까지 치달아

올라갔더니 중국인 하나가 무어라 고함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다.

내가 카메라와 캠코더를 감추는데, 함께 간 역사학자가 관리 사무실로

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해결을 봤다.

 

따라온 우리 두 집의 안사람들은 태연하게 나물을 캐고 있었다.